[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0) 납작한 것들에 대하여

 

납작한 것들에 대하여 

속을 다 비우고서야, 밟히는 게 아프지 않아
속을 다 비우고서야 납작해질 수 있다는 
밟혀서 온전한 것들이 보란 듯이 밟힌다

유리가 제 몸을 던져, 유리조각이 탄생하듯
더 낮게 더 작게, 부서지기를 갈구하던
욕망의 사금파리가 여기저기 빛날 때

한순간 한 토막이, 징검돌로 놓인 이 밤
죽어서 빛으로 화한 재활용의 조각들이 
은하수 다리를 건너와 눈송이로, 내리고,

누가 이 길바닥에, 온전하기를 바라겠느냐
늦은 밤 딸랑딸랑, 길 구르던 맥주깡통을 
건장한 운동화들이 강 슈팅을 날린다

길들여진 세상에서, 다시 길들여지기 위해
길 위에 납작 엎드린, 그 길 따라 가기 위해
유모차 폐지를 주우며 할머니도 가신다

재활용 될 수 있을 때, 그때를 기뻐하라
거듭나기 위해 거듭거듭 나기 위해
바닥에 엎디고서도 밟힐 만큼, 밟히며

하늘과 땅의 살갗을 온몸으로 더듬던 길
원 없이 걸었노라, 원 없이 망가졌노라
다 뜯긴 운동화 뒤축이 삐걱삐걱 거린다

/ 2012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심야산책은 차라리 겨울이 좋습니다. ‘불금’이라고 일컬어지는 깊은 밤, 겨울대로에는,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모습들이 정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살짝 취기 오른 이들의 진면모라 할까, 약간 흐트러진 노형동 본죽사거리 겨울밤이, 길 가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습니다. 

자정이 다가오면 길바닥엔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버리고 밟히고 걷어차이다 보면, 이미 납작해져 오히려 편해 보이는 것들이 보는 이들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돌려세워 만나는 것은 사람이나 풍광이 아니라, 시 또는 언어들입니다. 

유리가 제 몸을 던져 유리조각이 탄생하고, 대로변에 대굴대굴 굴러다니는 맥주깡통에 강 슈팅을 날리는 건장한 운동화들, 은하수 잔별들이 요단강 다리를 건너와 눈송이로 내리는 풍광, 거기에다 조금씩 헝클어진 크리스마스트리가 여기저기 보이기도 합니다. 

빨갛게 양팔 다

깊은 밤 고단한 도시에 죗값처럼 올린 어깨

밤꽃도 손을 모으고 그를 향해 서 있다

-「밤꽃도 손을 모으고」전문 (2013년)

심야에 양팔간격으로 벌을 서고 있는, 빨간색 십자가들이 슬픈 시 한편을 낭송하고 있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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