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저는 동료 신부님들과 함께 우연한 기회에 제주인이 많이 사는 일본 오사카의 이쿠노구(區)에 위치한 한인타운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재일동포들이 모진 풍파를 헤치고 조성한 시장입니다. 우리의 여느 전통 재래시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곳을 걷노라면, 여기저기서 생판 모르는 저희 일행을 향해 스스럼없이 ‘삼춘(삼촌)’이란 제주어로 불러세우거나, 3평 남짓한 가게마다 돔베고기와 삼겹살 그리고 갈치와 오징어젓갈류 등의 제주도 향토음식과 반찬들을 판매하는 모습을 예사로이 봅니다. 너무 익숙하고 친근해서 마치 제주 서문시장의 한복판에 온듯 합니다.

오래전부터 이쿠노구에는 제주인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대부분은 1930년 일제 강점기에 생계를 위해 건너간 이들, 4.3의 고초를 피해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이들, 그 뒤에 고향에서 지독한 생활고(苦)를 견디지 못해 일거리를 찾아온 이들, 나아가 그 후손들까지 셀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산천의 부모 형제를 가슴에 품고 미지의 땅에서 밤낮으로 손발이 불어터지도록 일만 합니다. 또한 혹시나 제주인의 정체성을 잃을까봐 고향 말로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고향 음식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망향의 서러움을 꿋꿋이 견디어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사카의 이쿠노구에 당당하게 ‘작은 제주도’를 일굽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오랫동안 피땀 흘려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알게 모르게 고향 발전을 위해 기꺼이 사용합니다. 가령 집에 감귤나무 하나 있으면 자녀를 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으로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 불리던 어려운 시절에 귀하고 값비싼 감귤 묘목을 다량으로 기증하여 인재양성에 힘씁니다. 여기다 리(里)단위로 학교, 전기, 수도, 마을회관 등을 지을 수 있도록 적극 힘을 보태며 고향 사랑을 이어옵니다.

간혹 필자가 산책하다 잠시 머무는 신제주 삼무공원의 정상에 자리한 연동 주민쉼터인 ‘삼무정’이란 팔각정에 재일제주인들이 건립하면서 쓴 취지문을 보노라면, 이쿠노구를 비롯한 재일제주인의 고향사랑이 얼마나 바다같이 넓고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몸은 비록 他國(타국)에 있지만 恒常(항상) 望鄕(망향)의 시름을 가눌길 없어 故鄕人(고향인)들이 힘모아 隔世(격세) 發展(발전)을 이룩한 모습을 볼 때 無限(무한)한 감명과 기쁨을 느껴 우리들의 작은 뜻을 모아 新齊州 三無公園(신제주 삼무공원)에 八角亭(팔각정)을 지어 故鄕(고향)의 그리움을 달래노라.”

이런 재일제주인들의 간절한 고향 사랑을 밑거름 삼아, 우리 제주는 지난 세월 먹을 양식은 물론 전기와 수도도 없는 고도(孤島)에서 벗어나,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합니다. 또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인정받아 매년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도시로 자리합니다. 이런 연유로 제주는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각광받습니다. 그 사이에 그동안 제주발전의 초석이던 재일제주인 1세대는 고령화로 노쇠하고 온갖 질병에다 경제적 어려움마저 가중되어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망향의 한(恨)을 간직한 채 눈을 감습니다. 여기다 2, 3, 4세대로 이어지는 후손들은 제주인의 숨결이 점점 옅어지면서 대부분 일본으로 귀화하는 실정입니다.

바야흐로 이제 우리는 이쿠노구 제주인의 고향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10일 제주도가 처음으로 재일제주인의 실태조사에서 공개한 것처럼, 상당수 재일제주인들의 소망인 전용 상담창구를 개설해줘서 타향살이의 고충과 외로움을 해소해주고, 그 외에도 빈곤층 지원, 차세대 언어문화교육, 고향과의 연대와 자긍심 고취 등등을 이뤄주기 위해 행정적으로 체계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십여 년 전부터 뜻있는 개인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던 재일제주인 돕기를 더욱 다양하게 활성화되도록 합시다. 필자 역시 조속한 시일에 가까운 이웃 종교의 스님, 목사님과 협의하여 이쿠노구의 어려운 제주인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위로의 손길을 건네고자 합니다. 이때 이쿠노구 제주인들의 고향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은 더욱 커지고, 그 후손들은 제주인의 정체성을 찾아 당당하게 제주인의 면모를 지키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제주는 도내외 백만 제주인들이 하나되어 세계 속에 탐라의 기상을 활짝 펼쳐 나가게 될 것입니다. / 천주교 제주교구 신제주성당 주임신부 고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