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⑫ 돌담 장인 조환진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돌담 장인 조환진(1974년생, 한림읍 동명리 거주) / 사진=Tetsuo Goto
돌담 장인 조환진(1974년생, 한림읍 동명리 거주) / 사진=Tetsuo Goto

육지를 여행하면서 제주 돌담이
소중한 보물임을 알게 돼

Q. 돌과 인연의 시작

제주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저도 돌로 울담을 두른 돌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주의 어디를 가든 돌담이 있었기에 어릴 적에는 돌담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대학생 시절 사진에 취미가 있었는데, 2학년 때 한 출판사로부터 책에 들어갈 기찻길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제주도에는 기찻길이 없어 청량리로 가서 아무 지역이나 정해서 기차를 탔습니다. 한적한 시골 동네 기찻길을 찍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맘에 드는 이름을 고르는데 강원도 정선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청량리에서 정선을 거쳐 아우라지까지 서너 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 돌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담 풍경이 제주도에서만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날 제주 돌담이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돌담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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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돌아왔는데 돌담에서 빛이 나고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 이후로 돌담 사진도 찍고 돌담을 소재로 그림도 그렸습니다. 대학 졸업 작품도 돌담을 먹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주의 돌담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에 실제 돌담을 갤러리 안으로 옮겨서 쌓는 설치 작품도 시도했죠. 대학 2학년 시절 강원도 아우라지에서부터 지금까지 돌담과 인연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Q. 돌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1999년부터 3년 6개월 동안 ‘생각하는 정원’에서 일을 했는데 원장님이 돌담 쌓을 때 보조 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후에는 사진을 배우고 싶어서 김영갑 사진작가님을 찾아갔습니다. 삼달초등학교를 임대해서 사진 갤러리로 꾸미고 계셨는데 한두 번 사진 공부하러 다니던 어느 날 마당에 돌담을 쌓아달라고 하셨습니다. 김영갑 선생님이 돌아가기 전 3~4개월 간 한림에서 성산을 오가며 갤러리 정원에 돌담 쌓는 작업을 했습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결혼 후 아내가 임신하게 되면서 아궁이에서 불을 떼는 뜨끈한 황토방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하러다고요. 처음에는 방 한 칸을 지으려고 했는데 설계하다 보니 집 한 채가 되었고, 건축할 돈이 없어서 궁리하다가 돌로 지으면 저렴하게 지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중고 트럭을 하나 사서 굴러다니는 돌을 주어다가 직접 돌을 쌓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돌담을 높게 쌓을 수 있는 기술이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챙이셨는데 제가 돌담 쌓는 일을 하는 걸 싫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세 가지 이유로 반대하셨죠. 첫째, 키가 작고 힘이 약해서 신체 조건이 안 된다. 둘째, 돌일은 앞으로 비전이 없으니 안 된다. 셋째, 힘든 중노동이니 대학 나와서 할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학교 선생님이나 공무원 하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돌집을 아버지와 같이 지으면서
돌일을 전수 받아

아버지 집 길 건너편에 집을 지어 가까이서 살고 싶으니 돌집 축담 쌓는 것만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집 짓는 것은 도와주시겠다고 하면서 축담 쌓는 법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80세가 넘어 현역에서는 은퇴하신 상태였는데, 돌을 드는 일은 제가 하고 아버지는 옆에서 하나하나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생업으로 조경일을 아르바이트처럼 할 때라서 쉬는 날마다 틈틈이 하다 보니 2005년에 시작해서 완공까지 3년이나 걸렸습니다. 돌집 축담을 쌓으면서 아버지가 강조하신 것은 돌담은 첫째, 튼튼해야 한다. 둘째, 보기 좋게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돌담을 쌓으면서 돌챙이의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돌집 축담을 다 쌓고 울담을 쌓을 때 쯤 아버지는 한쪽은 둥그렇고 한쪽은 납작한 작은 손망치 하나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 망치는 평소 아버지가 사용하던 망치였는데 대장간에서 새롭게 손질하고 온 것이었습니다. 말은 안했지만 앞으로 돌챙이 일을 해도 좋다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뿐이 돌집을 작품을 짓는다고 요상한 모양으로 스케치해서 완공하고 나니 집이 특이하게 생겼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돌집을 지어달라, 돌담을 쌓아달라는 주문이 간간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축담 한 가지 쌓아본 경험이 전부였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돌담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일이 들어오면 무조건 아버지를 현장에 모시고 갔습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50년 돌챙이 경력의 아버지는 다양한 종류의 돌담에 대해 기초부터 마무리까지 정석대로 지도해 줬고 시간이 갈수록 조경일 아르바이트는 줄어들고 돌담 쌓는 일을 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한 번도 돌챙이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돌챙이의 길을 가게 되었어요. 내가 가는 곳마다 돌이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돌담 쌓는 현장에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다양한 돌담 축조에 대한 기술을 배워

Q. 아버지에 대한 기억

아버지는 1923년 생으로 4.3때 한림지서에 끌려가서 여러 번 고문을 당하면서 죽을 뻔 했는데 다행히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1950년 압록강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1.4후퇴 하면서 발가락에 동상 걸려서 병원으로 후송되어 양쪽 엄지발가락을 일부를 잘랐는데 그 덕분에 아버지는 살았고 나머지 전우들은 중공군에 포위되서 전부 전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길게 하다보면 결국은 4.3이나 6.25 이야기로 이어지고 아버지는 그때 트라우마로 인해 흥분된 목소리로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말은 없으셨지만 자상하였습니다. 방패연이나 팽이도 만들어 주고 연 날리는 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동네 삼촌들과 산담 일을 하러 가면 떡도 가지고 왔는데 그런 날은 떡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랑 밭에 감귤을 심었는데 자갈도 치우고 돌도 굴리면서 아버지의 돌담 쌓는 일을 도와드렸고, 중학교 때는 아버지 혼자서 여러 날 걸려 마당에 돌창고도 지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누가 제일 실력 있는 돌챙이냐고 물어보면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아버지는 두 번째라고 하였습니다. 동네에 키도 크고 힘도 세고 실력 있는 돌챙이가 있었는데 그 삼촌이 한림읍 내에 사는 돌챙이에게 기술을 배우고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동네는 집이 몇 채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대여섯 명의 돌챙이가 있었고 솜씨 좋다고 소문이 나서 다른 동네에 까지 돌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돌일을 하면서 농사도 짓고, 소도 키웠는데 한문을 잘 알아서 동네 사람들이 초가집을 일거나, 묘지를 이장할 때면 날짜를 봐달라고 찾아오고 축문도 가끔 써주셨습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아버지가 처음 돌일 하셨을 때 잘하는 사람 일당은 쌀이 한 말, 못하는 사람은 보리쌀 한 말이었는데 돈으로 환산하면 몇 십 원 정도였답니다. 고무신도 없어서 초신(짚신)에 겨울에는 버선 신고 여름에는 맨발에 초신만 신고 돌일을 했는데 칡넝쿨로 신을 만들면 질겨서 더 오래 가긴 하는데 칡은 엮어서 쇠 매는 줄로도 사용했기에 보기 드물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장갑은 들어왔지만 귀해서 사용할 수가 없었고 1970년대 새마을사업 이후에나 장갑 끼고 일을 했는데 그 때도 장갑이 귀했다고 했습니다.

2005년 내가 돌집을 짓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83세여서 외부로 돌일하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3년 간 아버지와 돌집을 지으면서 축담도 쌓고, 흙도 바르고, 구둘도 놓고, 초가지붕도 일었습니다. 그 후로 돌담 쌓는 현장에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다양한 돌담 축조에 대한 기술을 배웠습니다. 다른 돌챙이들과 같이 일하면서 배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버지에게만 배우다보니 요령이나 편법이 아닌 튼튼하게 쌓는 정석만 배우게 되었고 지금도 그것이 습관이 되어 요령껏 편법으로 쌓는 돌담은 쌓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2015년 돌담학교를 시작하게 된 것도 돌챙이 경력 50년의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돌담 축조 실기 지도를 했는데 처음과 마무리는 항상 아버지께서 지도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돌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신 것은 축조 기술이 아니라 돌을 만지기 전 준비운동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돌을 들면 몸에 무리가 간다고 하시면서 실기 수업하기 전에 준비운동을 꼭 시키셨습니다. 돌담이나 돌챙이에 관련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돌담에 대한 다양한 질문에 아버지는 항상 명쾌한 답을 해주셨는데 그 답들은 돌챙이만이 해줄 수 있는 대답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2020년 98세에 돌아가셨습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한 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무너진다
돌 앞에서는 절대 교만하면 안돼

Q. 기억에 남는 돌작업

신흥리 돌탑

2016년 1월 남원읍 신흥리 바나나 체험농장 입구 양쪽에 돌탑을 쌓게 되었는데 4m 높이의 탑으로 시멘트를 넣지 않고 투박하게 쌓는 일이었습니다. 타원형의 넓적한 돌이 있어서 정면 아랫부분에 포인트로 세워서 쌓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밑에서 2명이 돌을 다듬어서 줄에 걸어주고 탑 위에서도 두 사람이 돌을 받아서 쌓고 저는 포크레인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4m 거의 다 올라갔을 때 탑 앞부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포인트로 보기 좋게 세운 돌이 위에서 누르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벌어지면서 무너진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대형 사고가 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돌만 굴러 떨어지고 탑 위에 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탑 꼭대기에 있던 쇠파이프를 잡고 매달렸고 한 사람은 얼른 다른 곳으로 피했던 거였어요. 사고를 면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때 누구 하나 다쳤다면 돌일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일을 통해 한 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대천동 돌탑

2022년 여름, 송당리 대천동에서 돌탑을 쌓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시멘트를 쓰지 않고 돌로만 쌓는 작업이었어요. 처음에는 3m 높이로 쌓기로 하고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4m로 변경했습니다. 밑에서 한 사람은 돌을 다듬고, 한 사람은 탑에서 구멍을 막고, 저를 포함 한 두 명은 탑 위에서 포크레인이 올려주는 돌을 받아 쌓고 있었어요. 4m 거의 다 올라가서 상단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탑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밑으로 쑥 내려가는 놀이 기구를 타는 듯 푹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너무 높게 쌓아서 하중을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린 것입니다. 자만심에 빠져 법칙을 벗어났기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돌 앞에는 절대 교만하면 안 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용담동 울담

돌담 교육을 받으러온 수강생 중 한 사람이 용담동에 있는 어머니 집 울타리를 돌로 쌓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천초등학교 근처였는데 1980년대 쯤 지어진 양옥집으로 울타리는 시멘트 블록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동네가 대부분 시멘트 블록 울타리였고 그 골목도 좌우로 전부 높은 시멘트 블록 담당이었습니다. 멀쩡한 담당을 헐고 돈 들여 돌로 쌓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소에 돌과 식물을 너무 사랑해서 수석과 식물을 많이 수집했는데 지금을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서울 누나네 집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몇 년간 어머니가 집을 비우자 마당은 돌과 식물이 뒤엉켜서 곶자왈이 되어 버렸고, 언젠가 돌아오실 어머니를 위해 정원을 정리하고 울타리도 돌로 쌓고 싶다고 했습니다. 실은 돌담 쌓는 기술을 배워서 직접 쌓고 싶었지만 해보니 엄두가 나지 않으니 쌓아달라고 했습니다.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높은 시멘트 담장과 철대문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어머니가 수집한 돌과 비슷한 종류의 돌을 구해대가 함께 섞어서 가슴 정도 높이로 울담을 쌓았습니다. 삭막했던 골목이 돌담 하나로 인해 정겨운 분위기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돌담을 쌓는 일보다
돈을 받아내는 일이 더 힘겨울 때가 있어

Q. 돌일 하면서 힘든 점

돌은 너무 무겁습니다. 20대부터 돌을 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요령이 없어서 힘들었고, 지금은 50대가 되니 힘이 약해져서 무겁습니다. 건강관리를 잘하신 돌챙이 어르신들은 80세까지 돌을 들어 올렸지만 언제나 돌은 무겁습니다. 돌 작업은 대부분 실외 작업이라 날씨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한여름 폭염과 겨울철 칼바람 맞으며 일할 때가 힘들죠. 그래도 여름보다는 겨울철이 낫습니다. 지친 몸으로 아침에 차를 몰고 일하러 가다가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나도 이렇게 힘든데 아버지도 힘드셨겠구나, 아버지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요즘 건축에 있어서 돌담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 사항입니다. 돌집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건축에서 돌챙이들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았고 가장 먼저 일하고 돈도 먼저 받았지만 지금은 건물을 짓고 남은 돈으로 돌담을 쌓다보니 건축 자금이 부족해서 돌담이 축소되거나 취소되기도 합니다. 돌담을 쌓는 일보다 돈을 받는 일이 더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Q. 돌일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

일을 의뢰하는 사람이 구성부터 믿고 맡겨줄 때가 기분 좋고 한 덩이 한 덩이 작품을 만들 때가 즐겁고, 처음 구상한 것 이상으로 멋지게 만들어졌을 때 보람 있고, 마무리하고 돈을 받을 때 기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니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힘이 나서 일하러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돌담 축조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정성
보는 이들에게 안정감과 미적으로 아름다운 감동을 줘

Q. 돌담을 잘 쌓는 비법

아버지는 저에게 돌을 볼 줄 알아야 담을 잘 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수는 여기에 들어갈 돌을 한 번에 딱 찾아내고 초보는 맞는 돌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돌담은 쌓을수록 실력이 늘게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돌담 축조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이 들어간 담은 보는 이들에게도 안정감과 미적으로 아름다운 감동을 줍니다. 똑같은 돌을 주어도 돌챙이마다 좋아하는 돌의 형태가 다르고 손맛이 다르기 때문에 개성대로이지만 정성을 들인 담과 그렇지 않은 담은 차이가 납니다. 돌담이 무너지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신중하게 쌓아야 합니다.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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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아일랜드에서 톰(Tom Pollard)일는 석공을 만났습니다. 톰의 스승은 패트릭 맥아피(Partrick McAfee)로 세계적으로 활동한 유명한 석공이며, 지금은 은퇴 후 쉬고 있다고 했어요. 석공이 되고 싶다고 차자온 사람에게 맥아피 스승이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돌을 안전하게 드는 법이나 기초 돌을 튼튼하게 놓는 법, 연장 사용법 등 돌담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맥아피 스승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기가 쌓은 담에 새겨 넣을 자기만의 마크를 만들라고 가르친답니다. 톰은 무엇보다 돌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Q. 돌담에 대한 생각

어느날 목사님에게 제가 요즘 방송에 가끔 출연한다고 자랑했더니 목사님께서 방송에 나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묻더군요. 어떻게 하면 돌담을 잘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더니 앞으로는 돌담에게 배울 수 있는 철학을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땅바닥에 돌담 그림을 그리시더니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의 돌들이 모여서 돌담을 이루는데 서로서로 하나가 되어야 튼튼한 돌담이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돌 하나하나를 사람으로 본다, 사람들이 서로 하나 되어야 사회가 튼튼해지고 더 나아가서 나라가 튼튼해진다, 돌담에 들어있는 철학적인 이야기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돌담 속에 들어있는 철학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챙이가 제주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직업이 되는 날은 언제 올까요?

Q. 돌빛나예술학교 소개

2008년경 협재리에 있는 어느 별장에서 나무 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현장에는 협재리 돌챙이들이 울담도 쌓고 정문 기둥도 돌로 쌓고 있었는데, 큰 바위를 무 썰 듯이 쪼개고 다듬어서 빈틈없이 쌓는데 실력이 대단했습니다. 며칠간 일하면서 지켜보다가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저도 사장님네 팀에 들어가서 같이 돌일하고 싶습니다.”
“자네는 안 돼.”
“왜 안 됩니까?”
“자네는 기술을 가르쳐 주면 따로 나가서 차릴 사람이라 안 돼.”

그 순간 머릿속에 영감이 스쳐 갔습니다. 돌담 쌓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구나. 예전 제주사람들은 누구나 밭담 정도는 쌓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배울 곳이 없구나. 나는 앞으로 돌담 쌓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다.

그 후 7년 정도 돌담 축조기술을 연마하고 2015년 돌빛나예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제주 돌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돌담 쌓는 기술을 대중에게 전수하고자 유치원생부터 80세 이상 어르신까지 돌문화 이론교육과 실기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학교를 여러 해 동안 운영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왜 제주의 대학생이나 청년들은 돌담기술을 배우러 오지 않을까? 해마다 국가 예산으로 진행하는 밭담 교육은 무료이고 교육생 모집 신문광고까지 하는데도 대학생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016년 가을 밭담 교육에는 제주시내 세 군데 대학에 돌담 교육생 모집 현수막을 2개씩 걸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문의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아습니다. 오기가 생겨서 이번에는 눈에 띄도록 현수막을 뒤집어서 걸었습니다. 뒤집어 걸었더니 전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수막을 뒤집어 잘못 걸었다는 전화가….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노인대학에 돌담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어르신들게 여쭈었습니다.

“혹시 아드님 중에 돌챙이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르신들의 대답은 전원 결사반대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아직까지도 돌챙이를 사람이 할 일이 못되는 중노동으로만 보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이 못하게 말리는데 아들은 오죽이나 하려고 할까. 돌챙이가 제주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직업이 되는 날은 언제 올까요?

제주의 돌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고
돌챙이의 삶도 계속 찾아다니고 싶어

Q. 외국 석공들과 교류

대학시절 제주도를 떠나서 강원도 기차 여행을 통해 제주의 돌담이 우리나라의 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주의 돌담이 얼마나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지 알려면 세계적인 시각으로 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 돌챙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형태의 돌담을 축조하는지, 제주도와는 어떤 점이 다른지 궁금했습니다.

2014년 제주MBC에서 제주 밭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영국 돌담협회에서 진행하는 돌담교육 과정이 소개되었어요. 그 영상을 보고 영국 돌담협회를 방문해서 벤치마킹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2017년, 영국과 아일랜드 돌담협회를 10일간 견학하게 되었습니다. 제주의 돌담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영국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돌담 보전 활동과 아일랜드의 잘 보전된 아름다운 돌담 경관을 보고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세계 여러 나라 돌담 단체, 석공들과 소통해 오다가 2022년에는 3주간의 일정으로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석공들을 만나고 돌담 유적을 견학하고 왔습니다. 이제는 외국 석공들을 제주도로 초대하는 교류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돌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고 외국 석공들과 제주도 돌챙이들의 상호 기술교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Q. 앞으로 계획

우선 돈을 적당히 벌어서 가족들이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돌일 시작한지 14년 정도 지났는데 그 동안은 경험을 쌓는 기간이었고 이제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으면 합니다.

제주도 돌챙이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그 분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분들에게서 돌일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과 인생의 지혜를 전수받고 싶습니다. 이번 책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돌챙이 어르신들을 만나게 된 것은 저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모두들 소박한 삶을 살고 계셨고 평생해온 돌일을 어떤 명예 추구나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생계를 위해 한 일이었다고 겸손하셨습니다.

그 겸손함에 존경의 마음을 금치 못하며 저 또한 그러한 겸손을 배우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저의 아버지처럼 돌챙이 어르신들이 자꾸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돌챙이 어르신들이 평생 해 오신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고, 제주의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제주를 사랑하는 방법의 하나인 돌챙이 직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 앞으로의 바람입니다. (끝)

조환진(오른쪽)과 그의 아버지 / 사진=이겸
조환진(오른쪽)과 그의 아버지 / 사진=이겸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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