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제주연극계

2023년 제주연극이 말일까지 일정을 꽉 채우면서 한 해를 마무리 지었다. 한국연극협회 제주도지회(제주연극협회) 제주소재개발 창작 공연인 ‘춘희네 국수’와 원로 배우 최종원이 만든 제주 신생 극단 ‘돌담’의 창단 공연작 ‘배비장전’이 12월 31일까지 공연을 열었다.

올해 제주연극은 전반과 후반이 확연하게 대비를 이뤘다. 전반기는 22년 만에 제주에서 열린 국내 최대 규모의 연극 축제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본선에 집중됐다. 자연스럽게 각 단체들의 창작 활동이 후반기에 몰렸다.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본선은 연극 예술 불모지 제주에 연극 매력을 보다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다만, 제주도정의 ‘예산 삭감’ 영향으로 기존 연극 지원 예산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용두사미 격이 돼 버렸다.

제주 극단들은 전반적으로 새 창작보다는 기존 작품·기획을 다지는 작업에 힘을 실었다. 뮤지컬 장르에 대한 도전이 늘어났고 극단도 창단했다. 정성 들여 도민들에게 선보인 노력들도 기억에 남는다.

앞서 언급한 예산 삭감 등으로 새해는 일찌감치 우려가 예상되지만, 난국 속 새로운 변화도 전망케 한다. 극단마다 지닌 색을 살리면서, 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려는 제주 연극인들의 노력이 2024년에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대한민국 연극제 본선 폐막식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대한민국 연극제 본선 폐막식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6월 15일부터 7월 3일까지 제주에서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대회가 열렸다. 도민들은 전국 15개 지역 예선을 뚫고 온 본선 진출 극단들 실력을 한 자리에서 비교하며, ‘제주와 다른 연극’을 한껏 만날 수 있었다. 동시에 관광지와 일상 공간을 찾아가는 공연도 병행하면서, 도민들이 연극 예술을 보다 친숙하게 여기고 호기심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대한민국연극제 제주가 관객에게 향유 기회를 제공했다면, 지역 내 연극 예술 창작자들에게는 기획·자금·인맥 등 여러 기회와 경험을 남겼다. 대회 한 번으로 제주 안에서 연극 관객이 대거 늘어나고 좋은 작품이 튀어나오길 기대할 순 없다. 그럼에도 또 다른 기회로 연결되는 계기는 가능할까 기대했지만, 후술할 연극 사업 예산 삭감 등의 조치로 인해 반대로 근심이 커지는 상황이다. 모처럼 아궁이에 불씨 뭉치를 넣은 만큼, 불을 살리는 방도를 찾길 바란다. 

제주연극협회, 소속 극단 

극단 가람은 제주 대표로 대한민국연극제 본선에 참가하고 오페라 ‘순이삼촌’에도 계속 참여하는 등 2023년 굵직한 활동을 이어왔다. 또한 최근 몇 년 간 흐름대로, 우선 레퍼토리 작품을 공연하고 하반기에 신작을 발표했다. 12월 1일~2일 발표한 신작 ‘무인도에 가는 법’은 도외 극작가 이지영이 썼다. 상처 받은 군상들이 서글프게 서로를 보듬으면서, 외진 지방이나 섬 출신이라면 더 깊이 공감할 만 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제주연극계 안에서 최고참 격인 가람은 근 10년 간 선정된 공연장상주단체 육성지원 사업과 중견 배우들의 역량을 동력으로 지탱해왔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매해 선정된 공연장상주단체 육성지원 사업은 오히려 극단 활동을 고착시키는 부작용으로 비쳤다. 극작·연출·배우 등 한정된 창작 여건은 작품을 점점 옥죄는 부담을 안겨줬다. 젊은 배우들과 협업도 병행하면서 자구책을 모색했지만 유의미한 변화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당장은 체감하지 못해도 변화라는 파도는 시간이란 바람에 밀려 다가오고 있다. ‘흑백다방’, ‘무인도에 가는 법’ 등 올해 눈에 띄는 작품 선택처럼, 앞으로 계속 보여줘야 할 가람의 발전적 행보가 중요한 이유다. 

극단 가람의 지난해 마지막 작품 '무인도에 가는 법'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가람의 지난해 마지막 작품 '무인도에 가는 법'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세이레는 2022년 창단 30주년을 뒤로하고, 지난해 새 대표 체제가 본격 가동됐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신진 활동 비중이 커졌다. 문호를 넓힌 영향 덕분인지, 작품마다 제법 많은 관객들이 객석을 채웠다. 그러나 일부는 완성도에 있어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한 해 동안 극단이 주최한 공연이 없었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전문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긴 안목으로 볼 때 현재 세이레 행보는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지난 30년만큼 가려면 새 동력은 필수불가결이다. 잠시 동안이나마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몰입, 많은 이들이 하나 된 마음으로 무대를 완성하는 보람, 관객들이 공연장을 사랑방 삼아 반갑게 안부를 나누고, 무대라는 특별한 공간에 등장한 지인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경험. 한 개인에게 연극 예술이 물드는 의미 있는 작용이다. 아무쪼록 더 활기 있게 꿈틀대는 세이레를 기대한다. 

예술공간 오이는 핵심 운영진이 부득이하게 이탈하는 어려움 속에서 2023년을 맞이했다. 동시에 제주연극제를 통해 연출 자원 양성이 필요하다는 과제 또한 직면했다.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오이는 새로운 활동 대신 기존 활동을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많은 관객들에게 존재감을 새긴 창작극 ‘일곱 개의 단추’를 뮤지컬로 바꾸고, 뮤지컬 ‘어린왕자를 찾아줘’도 손질해 다시 무대에 올렸다. 지난해 첫 선을 보인 1인 창작극 기획 ‘오이 마주서기’를 변주해 개최했으며, 관객 신청으로 작품을 만드는 기획 ‘디어 오이’도 이어갔다. 2022년 초연한 4.3 연극 ‘낭땡이로 확 쳐불구정 허다’는 대대적인 재구성을 통해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덕분에 대전국제소극장연극축제, 말모이연극제 등 원정 공연 기회도 가졌다. 이 중에는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여건에 맞게 내실을 다졌다는 인상이다. 극단이 정중동 하자, 단원들은 타 극단 작품으로 보폭을 넓히고 개인 창작에 힘을 쏟는 등 또 다른 흐름이 생겼다. 물론 올 초 오이가 직면한 문제가 해결됐다고 명쾌하게 말하긴 여전히 어렵다.

극단 이어도의 창작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이어도의 창작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이어도는 지난해처럼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으로 한해를 꾸렸다. 제작비를 일부 확보할 수 있는 제주연극협회 주최 소극장 연극축제에 유일하게 불참했다. 동시에 제주문화예술재단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 사업에 참여해 ‘수어 연극’을 제작하며 공익과 내실을 함께 챙겼다. 그리고 사실상 2023년 유일한 작품인 창작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을 11월 말 올렸다. 11월 공연은 매진을 달성했고 12월 3일 자체 재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완성도나 성과를 감안하면 유종의 미라는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 기세를 몰아 더 많이 활동하면 반갑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거의 모든 제주 연극인들이 그렇듯 저마다 생업이 존재하고, 창작 여건이 획기적으로 달라지지도 않았다. 올해는 이전에 발표한 창작극을 매만져 다시 선보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즐거운 마음으로 이어도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극단 퍼포먼스단 몸짓과 정낭극장은 사실상 1인 극단 체제를 유지 중이다. 몇몇 작품 위주로 공연하는 이유도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소수의 레퍼토리 활동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는 전략이면서 동시에 한계로도 읽힌다. 그래도 제주연극협회 주최 행사(소극장 연극 축제, 더불어-놀다 연극제)에서 각기 다른 작품을 올렸다. 최소한 레퍼토리 안에서 변주하는 시도를 반갑게 바라본다. 극단 파노가리는 가족 극단 체제를 유지 중이다. 타 지역 젊은 배우들을 섭외해 외연 확장을 꾀했지만 미봉책에 그치는 모양새다. 레퍼토리 작품 반복은 두 1인 극단과 비슷한 고민이다. 

제주연극협회 차원의 활동은 앞서 언급한 주최 행사, 소극장 연극 축제와 더불어-놀다 연극제, 그리고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이 꼽힌다. 두 연극 축제는 제주 극단들 입장에서 보면 작품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는 몇 없는 기회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올해 더불어-놀다 연극제는 모든 작품 속 대사를 제주어로 입히는 변화를 시도했다. 극단 별 제주어 활용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은 더 많은 변화가 더해졌다. 처음으로 극작, 연출을 전국 공모해 영입했다. 제주 이주 작가 김성배가 글을 쓰고, 경험이 풍부한 신동일이 연출한 ‘춘희네 국수’는 현대사 안에서 제주사람들이 겪어온 아픔과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여백을 적극 활용한 연출이 더해지면서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다. 2018년부터 제주시와 함께한 사업이 비로소 자리를 잡아간다고 여길 만 하다. 

2024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 '춘희네 국수'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2024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 '춘희네 국수'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그러나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과 더불어-놀다 연극제 2024년 예산이 통째로 사라지면서 어쩌면 ‘춘희네 국수’가 마지막 결과물로 남게 될 위기에 놓였다. 위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진출작을 뽑는 제주예선대회(제주연극제)는 7000만원에서 4200만원으로 줄었고, 소극장 연극 축제는 4500만원에서 1800만원으로 줄었다. 막판까지 바쁘게 뛰며 예산을 복구한 음악, 미술 등 다른 예술 장르 협회들과 비교하면 대비를 이룬다. 제주연극협회 회장을 필두로 각 극단 대표들로 구성된 임원진들의 단합된 전략과 행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제주연극협회 밖 극단, 개인 창작

제주연극협회에 속하지 않은 제주 극단이나 개인 창작자들이 진행한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연극공동체 다움은 지난해 제주 정착 5년을 맞았다. 다채로운 오브제와 음악을 연계시킨 신작 ‘동물농장’은 제23회 밀양공연예술축제 미래상을 수상했다. 연말에는 창단 공연작 ‘송이섬의 바람’을 재공연했다.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던 5년 전과 달리, 표정과 행동에서 한결 여유가 느껴졌다. 연극공동체 다움이 자신만의 호흡으로 제주에서 개척해온 행보는, 어느덧 섬 안에서 고유한 존재감을 차지할 만큼 힘이 생겼다. 제주연극을 떠올릴 때 연극공동체 다움을 손꼽는 건 비단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극단 연극공동체 다움의 창작극 '송이섬의 바람'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연극공동체 다움의 창작극 '송이섬의 바람'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 가족·인형극 전문극단 두근두근시어터는 지역 내 젊은 연극인들과 적극적인 협업을 추구했다. 신작 ‘중섭, 빛깔 있는 꿈’을 선보였고, 대표작 ‘할머니의 이야기 치마’는 제주뿐만 아니라 타 지역 초청 공연도 가졌다. 녹록치 않은 여건에도 정체성을 지키며 활동하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제주 여성 극단 그녀들의Am은 제주 곳곳을 누비는 인형극 활동과 함께, 창작극 ‘기억, 산처럼 거기 있었다’를 연말에 선보였다. 이전에 발표했던 단편을 단독 장편으로 키웠다. 극단이 3년 만에 선보이는 실연(實演)극이기도 하다. 엄마이자 딸이자 며느리로 살아간 경험을 십분 살리면서 치매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냈다. 

극단 그녀들의 Am 창작극 '기억, 산처럼 거기 있었다'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그녀들의 Am 창작극 '기억, 산처럼 거기 있었다'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레드는 창작 뮤지컬에 도전했다. 극단 공육사는 ‘마술가게’로 제주어 연극을 이어갔으며, 문화놀이터 도채비는 연초에 제주어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 연말에는 변종수 1인극 ‘점쟁이 곽씨’로 배우 역량을 한껏 뽐냈다. 신생 극단 사자자리는 프랑스 연극-희곡을 국내에 소개하고 연말에는 체감 동화극을 선보였다. 신생 극단 돌담은 제주 살이 중인 원로 배우 최종원과 타 지역 중견 예술인들이 모였다.

극단 보라는 아직 극단 가람의 위성 극단에 머물렀고, 제주 예술협동조합 C.R.A(크라)는 표선면에 자리 잡은 크라예술센터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장애인 예술 단체 ‘예술집합소 다담’은 연극 ‘크리스마스에 삼십만원을 만날 확률’을 연말에 공연하며 창단 소식을 알렸다. 제주 해녀 이야기를 짧은 연극으로 소개하고 제주 식재료를 함께 제공하는 ‘해녀의 부엌’은 꾸준한 호응 속에 북촌점을 새로 열었다.

아코디언 악기 연주와 해녀, 4.3 등 제주 문화·역사를 접목시킨 1인극으로 전국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우상임, 제주 클래식과 극예술의 융합을 계속 도모하는 오종협, 뮤지컬 작업에 공을 기울이는 고승유, 고유한 개성을 앞세운 이상언, 극예술 너머 다원 예술까지 추구하는 김소여 등 창작자들도 활동을 이어갔다. 기사에 미처 담지 못한 여러 단체, 개인이 제주 안에서 연극 활동을 펼쳤다. 생활예술 영역에서의 연극 또한 제주 곳곳에서 이뤄졌다. 

제주4.3 극 예술 

제주4.3을 기억하는 극 예술도 멈추지 않았다. 제75주년 제주4.3 전야제에서 초연한 창작뮤지컬 ‘사월―The Great April’(사월)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성과다. 2022년 전야제에서는 일부분만 소개했다면 1년 뒤에는 정식 공연으로 몸집을 키웠다. ‘사월’은 해방 후 제주 청년들의 열망과 4.3항쟁성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동시에 뮤지컬 장르로서도 준수한 음악과 연기가 더해지면서 많은 예술인과 관객들에게 가능성을 각인시켰다. ‘사월’은 2024년에 완성도를 높여 더 나은 무대로 찾아올 예정이다. 

(사)제주민예총은 제주4.3기념사업회와 함께 낭독음악극 ‘진달래로 타오르던, 1945-1948’을 지난해 말 개최했다. 김석범 소설 ‘화산도’, 현기영 소설 ‘제주도우다’, 김시종 자전(自傳) ‘조선과 일본에 살다’, 김경훈 시를 소재로 다뤘다. 솔직히 극 장르로 비중있게 변환했다고 평가하기에는 무리였다. 소재 발굴 취지와 함께 향후 4.3 거리굿, 해원상생굿 등에서 등장하며 발전시킬 가능성을 점쳐본다.

재경 제주 연극인 단체 ‘제주괸당들’은 4.3연극 ‘살암시난’을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공연했다. 제주 출신 극작가 겸 연출가 강재림이 쓴 ‘살암시난’은 2022년 말모이 연극제에서 초연했고, 지난해는 제주 첫 공연이다. 4.3 때 온 가족이 수장당한 김연옥 할머니의 실제 사연을 참고해,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4.3 희생자 유족의 아픔을 그린다. 특히 유족 할머니를 연기한 제주 출신 배우 신혜정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빼어난 연기력으로 “해산물을 먹을 수 없는 제주할망”을 훌륭히 그려냈다. 

제주괸당들의 4.3 연극 '살암시난' 출연진과 연출(앞줄 맨 왼쪽).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괸당들의 4.3 연극 '살암시난' 출연진과 연출(앞줄 맨 왼쪽).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극단 예술공간 오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4.3 연극 ‘낭땡이로 확 쳐불구정 허다’를 대폭 개선하면서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11월 더불어-놀다 연극제에서 초연한 ‘기’는 시간 여행과 4.3, 고려군의 탐라 학살(목호의 난) 등을 묶었다. 시간 여행은 앞서 2020년 예술공간 오이가 공연했던 4.3 연극 ‘프로젝트 이어도’에서 사용했던 설정이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애초 무용극으로 만들려던 작품을 연극으로 전환하면서 더 많은 보완이 필요해보였다. 

동백작은학교는 제주해녀항일투쟁과 4.3을 다룬 그림책 ‘빗창’을 뮤지컬로 만들면서 주목을 받았다. 창작 뮤지컬 ‘빗창’은 현재 재공연을 위해 제작비를 모으고 있다. 

놀이패 한라산은 12월 23일~24일 신작 ‘바다건너 내고향 세동무’를 공연했다. 절친했던 친구 세 명이 4.3이란 풍파를 만나 한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한 명은 일본으로 밀항하고, 나머지 한 명은 우여곡절 끝에 제주에서 살아남았다.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무에 대한 추억과 미안함을 간직한다. 

놀이패 한라산 마당극 '바다건너 내고향 세동무'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놀이패 한라산 마당극 '바다건너 내고향 세동무'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이번 신작 이전부터 놀이패 한라산 활동에 대해서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작을 마주하면서 우려는 확신으로 기울었다. 극본, 연출, 배우 등 전반에 걸쳐 완성도가 참담했다. 냉정하게 대사 없는 단역 정도를 맡아 무대 적응부터 해야 할 배우가 “최고의 인민해방전사” 주연을 맡은 아이러니, 마당극과 연극 어디에도 충실하지 못하는 애매함, 창립 멤버들의 자녀까지 투입해야 하는 운영 등 보는 내내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여느 일반 연극과 비교해도 대표작 완성도가 뒤떨어지지 않는 광주 마당극 극단 놀이패 신명 사례와 비교하면, 과연 놀이패 한라산은 당장 경쟁력 있는 작품을 내세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많은 도민들은 놀이패 한라산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촛불로 남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뮤지컬 

뮤지컬 장르는 연기에 더해 작사·작곡, 노래까지 소화해야 한다. 연극 저변을 다지는데도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한 제주에서, 뮤지컬 장르는 더더욱 어려운 장르다. 예술공간 오이, 레드, 고승유 등 제주에 기반을 둔 극단과 개인들은 올해 뮤지컬 창작에 도전했다. 2022년 보다 시도가 늘어난 점은 고무적이다. 일반 연기가 아닌 ‘노래 연기’는 일찌감치 훈련 받은 연기자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작곡 역시 마찬가지. 그렇기에 소재를 제주 관련으로 택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역할 정도를 제주 예술인이 맡고 나머지 핵심은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종사자가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공연 제작사 화이브행크는 2022년에 이어 올해도 실감 뮤지컬 ‘그림책 속 제주이야기’를 제작했다. 영등할망, 칠머리당영등굿, 자청비 등 제주 전통 문화를 다룬 그림책을 공연으로 탈바꿈했다. ‘그림책 속 제주이야기’는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 기술까지 더하면서 확실한 경쟁력을 보유했다. 덕분에 서울 무대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제주4.3을 소재로 한 뮤지컬 ‘동백꽃 피는 날’은 서귀포관악단 소속 음악인 김경택이 작곡 겸 사실상 기획 역할을 맡았다. 뮤지컬의 핵심인 작곡을 제주 자원이 맡았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경우다. ‘동백꽃 피는 날’은 빼어난 음악과 유머·감동이 공존하는 이야기로 호평을 받아왔다. 올해는 서귀포시(서귀포예술의전당), 경기도(경기아트센터), 서울(국립 정동극장)에서 잇달아 공연을 가졌다. 타 지역 공연기획자들도 작품성을 인정하면서 향후 보다 많은 무대에서 선보일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날개’(날개)는 제주시 창작 뮤지컬이다. 지난해 첫 선을 보였는데, 올해는 음악 예술 단체 (주)호은아트가 새로 제작을 맡았다. 세련된 음악, 성인과 청소년 가릴 것 없이 멋진 노래 실력, 윗세대들이 몸소 보여준 도전 정신을 오늘 날 청소년들에게 전승하는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며 멋진 뮤지컬을 완성했다. ‘날개’는 2024년에도 공연 예정돼 있다. 

제주시 창작 뮤지컬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날개' 장면.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시 창작 뮤지컬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날개' 장면.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총평, 2024년 전망 

연초부터 준비에 착수해 9월초에야 마친 굵직한 행사(대한민국연극제 제주) 영향으로, 많은 공연이 후반부에 쏠리다 시피 모아졌다.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를 꾸리고 운영하는 역할도 제주 연극인들이 맡으면서, 제주 극단 상당수는 힘을 조절하는 느낌으로 2023년을 보낸 듯하다. 저마다 색이 뚜렷한 극단들이 잇달아 생기면서 향후 제주연극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제주연극협회는 해가 바뀌면 곧바로 대한민국연극제 지역 예선 대회(제주연극제)를 준비한다. 2024년은 제주연극제 예산이 7000만원에서 4200만원으로 줄면서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4200만원에는 본선 진출 비용까지 포함하기에 예선 격인 제주연극제는 더욱 궁핍하게 치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경연을 없앤 부산연극제처럼 오히려 통 크게 운영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 물론 저마다 입장이 다르고, 협회 내부의 고질적인 헐거운 결속력 문제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제주연극제를 치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뿐만 아니라 더불어-놀다 연극제와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은 예산이 사라지면서 연극 무대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추경 등에서 마련한다는 예측도 있지만 미지수이기에, 2025년 본예산을 바라보는 준비가 일찌감치 필요해 보인다. 제주소재 개발 창작 공연은 전국 공모의 효과와 잠재력을 이번 ‘춘희네 국수’를 통해 보여준 만큼, 제주시가 전향적으로 검토하길 바라는 사견을 더해본다. 

오영훈 제주도정은 2024년 문화예술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지원사업도 우려가 컸지만 감소폭을 최소화한 것으로 알려진다. 어쨌거나 2023년과 비교했을 때 부족하면 부족했지 나아지진 않을 건 자명한 사실이다. 2024 제주연극은 극단과 관객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또한 극단과 극단 간의 거리도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어려울수록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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