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끝에서 길을 잃다
백명희

악어 떼처럼 몰려든 압류 청구서들을 들고
체념하듯 찾은 현금인출기 앞
어둡고 좁은 현실의 늪 속으로
궁색하기만 한 월급 통장을 밀어 넣는다
치열했던 한 달 간의 사투가
세상의 언어들로 재배열되는 시간,
이제 곧 잔고 0의 지뢰가 터질 텐데
건조한 목소리로 종료를 알리는
인출기의 화면은 표정이 없다
무참하게 물어뜯긴 월급 통장과
또다시 이월시켜야 하는 아이들과의 약속,
습기를 머금지 못하는 바람들을
영수증과 함께 버리는 월말은
건기의 초원처럼 목마르다
새로울 거 없는 달의 끝
거리는 온통 무중력 상태
비는 언제쯤 오는 것일까
연체된 꿈에 이자를 붙여 본다

/ 사진=알라딘
/ 사진=알라딘

제주 시인 백명희가 최근 첫 시집을 냈다.

‘달의 끝에서 길을 잃다’(천년의시작)는 “처연한 삶의 기원과 기반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끝끝내 부여잡고 가는 경험의 시작을 여실히 보여 준다”는 변종태 시인의 해설처럼 그가 고단한 삶에서 느껴온 감정들을 솔직한 시어들로 묶어냈다.

모노드라마
백명희

처음부터 리허설은 없었다
배역은 연극쟁이 아내
세상이 던져 주는 쪽대본을 들고
현실이라는 무대에 오를 뿐이다
결말을 모르는 이야기도
예측할 수 없는 관객들의 반응도
모두 내가 선택한 길
서러움은 의미 없다

세상은 이제 시간을 졸라
나에게 반백의 분장을 하라는데
등에 업힌 아이들은 내려올 줄 모르고
홀로 서는 무대는 너무 외롭지만
스릴러의 대본이든 액션의 대본이든
닥치는 대로 살아 내다 보면
언젠가 이 연극도 막이 내리겠지
그때까지 담담해야 할 나의 무대

텅 빈 객석의 시간만이 관객이다

지나치게 희망적으로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도 바라보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백명희의 시선은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총 4부에 걸친 시 60편 안에서 부모, 가족, 일상에 대한 고찰을 비중있게 담았다. 

시집을 읽다보면 “유서를 쓰고 떠났던 외화 앵벌이는 다이옥신 중독이 되어 돌아”온 작가의 아버지도, “소주 한 잔에도 눈물 바가지 하시다가 큰오빠 이어 보내고 눈물이 마르”신 작가의 어머니도, “백발이 무색하게 매일이 병든 닭”인 작가의 남편도, “배고프다 달려온” 작가의 자녀도, 그리고 저자가 생생히 기억하는 아픈 기억들도 마치 공연 무대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해설을 쓴 변종태 시인은 “첫 시집을 채우고 있는 시편들은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생의 한 장면이지만 시인의 눈을 통해 우리의 삶과 직결되고 누군가에게 빚진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면서 “삶의 비애와 진실이 담긴 쓸쓸한 풍경들이 사뭇 인간적이고 진실한 감동을 안긴다”고 호평했다.

겁쟁이
백명희

가끔은 도망쳐도 돼
매 순간 전투적일 수는 없잖아

패배자가 되어 마주하는 현실이
대책 없이 깨지는 것보다
더 빠른 답을 주기도 해

겁쟁이라고 해도 괜찮아
어차피 사는 매 순간이 겁나니까
그래서 상처입은 순간이 오면
나는 종종 외로움 속으로 도망쳐

바닥까지 외롭고 나면
다시 사람이 그립고
세상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고

겁쟁이가 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해

저자는 책 머리에서 “살아온 날들에 대한 혼잣말……”이라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백명희는 제주신인문학상(2009), ‘미네르바’ 신인상(2015)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 백아카데미 원장으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97쪽, 천년의시작, 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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