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권력자 줄리어스 시저는 그의 아내 폼페이아와 클로디우스의 염문이 떠돌자 이렇게 말한다.

“클로디우스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난 폼페이아와 이혼하겠다. 왜냐하면 시저의 아내는 의심조차 받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측근이 근신해야 하는 이유를 웅변하고 있다.)

헌데 폼페이아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허기사 어떤 간 큰 사내가 감히 최고 권력자의 여자를 넘보겠는가. 만일 시저가 아닌 한국 남자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모든 게 제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입니다. 물의를 빚어 송구합니다. 앞으로는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제 집사람 단속을 잘하겠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로 보면 아내의 잘못은 남편의 잘못이다. (왜? 부부는 일심동체이니까.) 그러니 아내를 대신해 남편이 사과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난 2021년 12월 27일, 경력 부풀리기 의혹에 대해 김건희 여사(당시 윤석열 대선후보 배우자)가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다. / 사진=유튜브 갈무리

현명하고 분별 있는 남편이라면 아내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금도(襟度)를 보이면서도 이웃이나 지인들에게는 사과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사과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사과할 줄 모르는 뻔뻔함과 무감각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모든 일은 때가 있고 마음이 결정한다. 때를 놓치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못 막는 위기가 찾아온다. 마음 한 쪽이 움직이면 천하를 움직인다. 대인은 결단하여 천하를 얻지만 소인은 주저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나서야 후회한다. 이런 자명한 이치를 모르면 그것도 하늘의 뜻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예수가 병자를 고치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인 게 아니다. 유대 백성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한테 데려와서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예수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모두 꽁무니를 뺀 사건이다. 공격과 수비, 공수의 입장을 순식간에 뒤바꾼 대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졌는데, 끝 마무리는 더 드라마틱하다.

예수 : 여자여, 너를 고소하고 정죄한 그들이 어디 있느냐?
간음자 : 주여, 없나이다.
예수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놀랍게도 예수는 일흔 번 씩 일곱 번(490번?) 용서하라고 했다. (기독교를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사 서울의소리는 지난해 11월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보도했다. / 사진=유튜브 갈무리<br>
언론사 서울의소리는 지난해 11월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보도했다. / 사진=유튜브 갈무리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실수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죄나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게 누구든지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돌을 던질 자 누구인가? (그대는 그렇게 깨끗하고 완전한가?)

관용은 성숙한 자의 미덕이요, 착한 심성의 발로이다. 진실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자에게 계속 욕설과 악담을 퍼붓는다면 이거야말로 사악하고 못난 자의 패악질에 다름 아니다.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3세의 분쟁과 갈등,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용서와 화해 뿐이다. 불교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본받아 한반도와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를 종식시키고 증오와 저주의 쇠사슬을 끊어버릴 때, 짙은 암흑이 드리워진 지구라는 행성에 온전한 평화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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