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2) 일출봉 해돋이

 

일출봉 해돋이

몇 밤을 뒤척이다 섬을 베고 누운 바다
홀연 내 역마살이 바닷새로 깃을 펴면
치자 빛 빈 수반 위로 
떠오르던 남녘 아침

동편 수평 가득 돛폭을 거느리고
팔방으로 눈을 뜨는 저 당찬 처녀 햇살
잘 빚은 와인 한 잔이 
아침 창에 놓인다

/ 1985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생인 형의 국어교과서를 훔쳐봤습니다. 그런데 거기, 이호우의 시조 「달밤」이 게재돼 있었습니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로 시작해서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로 끝나는 네 수짜리 연시조를 서너 번 읽고는,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바로 암기해 버렸습니다. 낙동강 물을 비추는 보얀 달빛 아래 전개되는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도대체, 새까만 시골 초등학교 어린이가 시도 아닌 시조를 이해하고 몇 번 읽고 암기해 버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일입니다. 그리고 2007년, 경상북도 청도군이 수여하는 이호우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믿기지 않을 일입니다. 거기에다 시상식 수상소감에서 1959년 초등학교 6학년 때「달밤」으로 맺어진 이호우 시인과 나와의 인연을 이야기했더니, 시상식장에 모인 수백 명 청도군 주민들이 역시 믿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우리 가곡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 처녀> 등 그토록 정겨운 노랫말이 우리 민족 고유의 시조였다는 것을 나이 오십 넘어서야 알았습니다.

시 한 줄 만나기 위해 당시 고물 트럭 타고, 이곳저곳 쫓아다니던 등단 전 그때가 그립습니다.  겨울이면 반복되던 ‘삼한사온’ 제주 특유의 날씨 끝자락에 “몇 밤을 뒤척이다/섬을 베고 누운 바다”라는 시조 한 줄을 건지고 뛸 듯이 기뻐했던 순간이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 「일출봉 해돋이」를 쓰고 35년이 지난 어느 날, 표선 백사장을 맨발로 걸었습니다.  이때 밀물 녘 바다가 “사르르, 사르르” 내 발등에 수평선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부리는 나의 손주와 너무 닮았습니다. 큰 고민 없이 불과 몇 초 만에  바다가 건네는 단시조 한 편을 받아쓸 수 있어서 이처럼 만년晩年이 즐겁답니다.

고운 날 저물녘은 바다도 아이 같다

먼 데 뛰어놀다 제 집처럼 찾아온 파도

사르르 내 발등에다 

수평선을 부린다. 

「고운 날」, 2015년 作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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