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문경수, 생애 첫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발간

문경수
문경수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는 없고
마주하게 되는 영 엉뚱한 사람들
울고 웃고 때론 고개 숙이고
또 부끄러워지고

경수야,이만큼은 해야 사람들이 알아봐

이름 석 자를 내걸고 산다는 건

한뉘 거리에 나뒹굴며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치욕을 짓씹는 유치한 짓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수년째
광장에 주저앉아 생존권을 요구하는 보통 사람들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저치라며 욕 들어도
살아내기 위해

이름 같은 건 버린 이들을 모른 척 지나치면
양쪽으로 늘어진 흥성이는 먹자골목 간판들
얼굴을 내건 주방장의 웃는 눈과 마주친다

야,문경수!쪽팔린 줄 알아,새끼야,좀 제발.

사람들이 제 이름을 소리 내 부르지 않는 까닭
알면서도
뭐라도 된 듯

나 아냐고
나 들어 본 적 없냐고

같은 이름의 누군가를 불러 본다

버려선 안 될 것을 버려 가면서까지
그게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 사진=알라딘
/ 사진=알라딘

젊은 시인이자 현직 제주 소방관인 문경수가 생애 첫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사람)를 펴냈다.

4부에 걸쳐 50여편을 꽉 채워 넣은 첫 시집에 대해 박소란 시인은 “도무지 아름답지 않아서. 시인이 그려낸 풍경이 너무 캄캄하고 너절해서…그런 그가 나는 좋았다”고 평했다. 

문경수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포함해 성장 과정에서 직접 마주하며 느낀 솔직한 감정들, 그리고 성인이 돼 소방관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녹록치 않은 상황들을 시 한 편 한 편에 담아냈다.

“새벽엔 별 보고 저녁엔 땅 보다 집에 돌아오는 막노동 생활이 지겹다”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가도 가도 끝없는 복도를 헤매면서” 만들고 부시기를 반복한 감정들, 초코바를 통해 기억하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지인의 값싼 동정이나 동냥하는 신용 불량자의 심정으로 어언 수십 년째 도피 중”이었던 방황의 시간까지…. 


탑동
문경수

바람이 불면 우리는 공병처럼 운다

공무원 시험에 매번 떨어지는 놈, 친구들에게 꾼 돈 도박으로 탕진한 놈, 직장에서 몇 달치 월급 못 받았다는 놈, 돈 없는 부모 원망하는 놈, 결혼하고 반년도 안 돼 갈라선다는 놈, 그리고 그냥 삶이 슬프다는 놈…….

어깨를 치대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삼킨 술만큼 저마다 다른 헛소리를 해대고
서롭고 분해서 막역한 벗에게 뺨을 올리는 시늉도 하지만 관둔다

우리 어릴 적 헛헛했던 마음은 야망 같은 걸로 헛배 채우면 그만이었지만
물건을 하나씩 빼면서 무게를 맞추는,
그러나 비워내는 게 미덕이라고 말할 줄 아는 나이가 되고
산들바람만 불어도 공병처럼 울보가 된다

누가 귀에 대고 잘 사는 게 뭔지 알려만 준다면
주먹을 풀고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짐승처럼 엎드려 울 수 있겠는데
그 생각도 잠시,
이까짓 일에 울 수는 없지 울어선 안 되지
먹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붓는다

작은 바람에 휘청이는 몸을 서로 끌고 끌리며 걷다
오랜 벗은 울먹이며 말한다
내가 창피하냐, 창피해?

삼킨 것들을 이정표 아래 전부 게워내도
천근만근인 우리는 도로 노여움을 삼키며
망망대해의 조난선처럼 휩쓸려 간다


시인은 163쪽 시집 한 권이 완성되기 까지 자신이 걸어온 과거를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방황과 상념이 뒤섞이며 온통 혼탁한 세월을 지나, 어느덧 “버려선 안 될 것을 버려 가면서까지 그게 틀림없는 내가 될 때”를 다짐하는 모습은 한 인격체의 멋진 성장 과정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방관이라는 타인을 위한 직업으로서 살아가기 시작한 시인의 또 다른 삶 역시 시집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화마火魔
문경수

화염 앞에 다가서면서 마주한 벽

돼지들이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며 질식사하는
혹한의 겨울 새벽
양돈장 화재 현장에서 깨단한 그 벽은

따뜻하다
환하고 밝은 게
때론 아름답기도 하구나

온기로 둔갑한 살기에 취해
그 똥 묻은 벽에 기대어
눈물 콧물 조금쯤 흘린 적이 있다

휩싸인 연기 속에서
살길을 더듬어 가는 소방대원보다는
방송사 카메라 앞에 얼쩡거리는 얼뜨기에
내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따뜻한 화마만은 덮어 주었으므로
속삭였으므로

한 걸음 물러서,뒤로 빠져,그만하면 됐어

하한선뿐인 인생
버틴다는 건 다시 말해
비겁함이라는 밑바닥에 자갈처럼 박혀
움직이지 않는 하찮은 자세 같은 것

소방차들도 하나둘 철수하고 숯등걸도 긴긴 잠에 빠지는 그곳에서

난 무엇과 싸웠나 이제 와 고백한다

불 앞에 서는 것보다
불을 끄고 난 뒤
폐허가 된 현장의 암흑과 추위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나는 진정 나 자신과 싸워 본 일이 없음을


하트세이버
- 준환에게
문경수

죽고 싶다며 눈감는 사람의
가슴을 함부로 짓이겨도 되는 걸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그는
잠긴 문 너머를 상상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까만 동공에 심어 둔 투시경이
두꺼운 갑종방화문을 뚫는다

젖은 옷이 담긴 세탁기 옆
쏟아진 수면제, 삐뚠 글씨로 적은 비문 가득한 유서, 몇 통의 부재중 전화……

갈빗대가 으스러지도록 
식어 가는 사람을 누르며 무표정으로
스스로를 향해
“우리의 인생은 왜,왜! 이토록 허무한 겁니까!”

다려진 셔츠를 붙들고
단추가 뜯어지도록 외치지 않으면

심장이 멈출까
덜컥 대답을 들어 버릴까

손발 구르는 동안
검은 비닐봉지 밖으로 삐져나온
짓무른 귤 두 개
푸른곰팡이 슬고 있다

빨간 십자가
문을 열고 사라진 사람은
소식이 없다

그나저나 이 사람 그때 밥은 먹었으려나


시집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최진석은 “시는 정녕 미래를 약속하는가, 혹은 현재를 속일 뿐인가? 시의 위안, 그것은 어쩌면 시의 기만이 아닐까? 그럼에도 시는 왜 존재하는가? 문경수의 첫 시집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면서 “시인의 다음 시편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어떻게 다시 들려올지, 우리는 조심스레 귀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경수 시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문경수 시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시인은 책 머리에서 “실패를 자책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작은 좌절쯤은 익숙해질까. 걷다 보면 덜 웃고, 덜 울겠지. 감정도 무뎌지고 매사에 머뭇거림도 없어질 테고. 첫발을 뗄 때의 그 마음은 서서히 더러운 발자국으로 지워질 것”이라며 “하나 나는 잘 안다. 원점으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내가 어떤 ‘근사치’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무섭다. 그게 말뿐인 시밖에 안 된다는 게 섬뜩하다”는 소감을 내비쳤다.

문경수는 제주에서 태어나 소방관으로 일하며 시를 쓴다. 2019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63쪽, 걷는사람,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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