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25) 섬에서 이어온 개척자적 개방-도전정신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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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대명절 설을 맞이하여 고향을 떠나 생활하던 제주인들의 귀향이 발을 잇고 있다. 제주는 유난히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출향인들의 인구가 많은 섬이다. 국내·외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출향 인구는 제주도에 사는 인구수와 맞먹는다는 통계도 있다. 과거 제주인들은 고향을 포근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아직 덜 성숙하다고 생각했고 타향이라도 어디든 상관없이 고향처럼 여기며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최근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故 송성대 교수의 해민정신을 육지문화와 비교 고찰한 최미경 작가의 『육짓것의 제주문화 읽기』이다. 이 책에서 ‘타리거생(他離居生)’이라는 생소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타리거생’이라는 말은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동하여 살라는 말이다. ‘내창(乾川, gateria)’이든 ‘오름’이든 ‘바다’든 그곳이 어디든 본향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제주는 과거 부모에게서 독립해 부부가족 중심으로 생계를 꾸리며 사고하고 행동해왔다. 현대적인 버전으로 말하면 핵가족 문화가 생활화된 곳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 거리-밖 거리’ 문화다. 제주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향을 떠나야 잘 살 수 있다는 타리거생 문화를 강조해왔다. 제주는 논도 없고 땅마저도 척박해 부지런히 밭을 일구면 밥은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지만 부를 이루기는 힘들었다. 밭이라 해봐야 한 가족이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돌랭이(아주 조그마한 밭)’ 하나 정도를 경작할 정도였다. 그 출구로 나온 것이 척박한 땅 제주에서 가난하게 사느니 다른 지방으로 건너가 터전을 일구며 잘 살라는 타리거생의 문화가 배태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사는 육지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다. 육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사는 것을 떠돌이 생활이라고 깎아내렸다. ‘대문 밖이 저승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말이 이를 방증해준다. 타향살이의 설움을 노래한 노래들이 유독 육지에는 많다. 육지에서는 농경과 촌락의 입지는 논에 물 대기 좋은 곳에 따라 결정되었다. 논농사를 짓는 육지에서는 특성상 한곳에 모여 사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래서 골짜기를 중심으로 씨족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다. 마을의 입지는 산사태와 산짐승의 습격이 없어야 하고 강의 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야 했다. 산이나 강이 너무 가까워도 안 됐다. 그나마 집 짓기에 가장 좋은 곳은 권세 있는 양반 집안이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가옥의 밀도가 커져서 모여 살게 되었다. 

이에 반해 제주에서는 마실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촌락을 정하고, 농경지는 촌락의 입지에 따라 정해졌다. 땅이 메마르고 잦은 재해로 인해 생산력은 떨어졌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바다(無主空海)는 공평한 기회를 주었고, 주인 없이 놀고 있는 넓은 들(無主空野)이 있어 누구나 부지런하면 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이 풍요를 낳지는 못했다. 역사에 나타나듯 제주는 결핍의 화산섬이라 논농사는커녕 밭농사의 수확량도 육지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소처럼 일은 많이 했지만, 수확량은 쥐의 양식만큼이나 적었다. 빈곤이 일상화된 땅이었다. 이러한 결핍의 화산섬에 살아온 제주 사람들은 “나간 개가 사나(사냥)한다”, “나도는 개가 꿩도 물어온다”, “노루도 본바닥에 들면 죽는다”, “나간 놈 직신 셔도, 자는 놈 직신 읏나(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집 안에서 자는 사람의 몫은 없다)”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바깥 생활을 권장다. 

논농사를 짓는 육지에서는 자연스레 혈연 중심의 집성촌이 생겨났다. 집성촌은 가문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배타적이고 계서적인 강한 혈연 공동체를 형성했다. 내부 갈등과 분규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인 아버지에게는 효를, 미래의 가장인 형에게는 절대적 공경심을 보였다. 마을은 나이 든 어른들에 의해 운영 방향이 결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쟁이란 것은 있을 수 없고 권위에 복종하는 일밖에 없었다. 

논농사 중심의 한반도에서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며 강한 혈연 공동체를 형성했으나 밭농사 중심의 제주에서는 ‘개체’를 중심으로 한 개방적인 혼성 촌락을 이루며 살았다. 혼성 촌락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제주인들은 선조들로부터 아무런 사회적·경제적(가문 등의) 지위를 받지 못했다. 경제적 생활 기반인 척박한 농토와 혼성의 이웃이 있었을 뿐이다. 일정한 거주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뿌리박은 생활을 고수해야 할 이유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자연적·인문적 환경 속에서 생성된 제주인의 정신구조가 타리거생 문화다. 타리거생이야말로 제주인의 특성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적인 용어다. 타리거생으로 인한 지리적 ‘이동’은 계층 이동, 의식 구조 변화, 직업 선택의 다양성, 지식과 지혜의 고양을 가져왔다. ‘이동’이 가치 창출에 이바지했다. 제주인들에게 거주 공간에 대한 해방 의식이 없었다면 제주도야말로 고립된 섬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동’의 또 다른 의미는 ‘자유’이다. 경상북도 울진, 강원도 삼척, 부산의 영도 등에는 제주 출신 해녀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의 어머니도 종달리 출신 해녀였으나 물질을 하러 육지에 가서 강원도 삼척에서 터전을 일궜다. 구룡포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의 부모도 우도 출신이다. 이동 생활을 천시한 선비양반의 붙박이 문화에서 이동은 자유보다는 퇴출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야반도주 형태였다. 육지처럼 혈연 중심의 닫힌 사회에서 쫓겨난 일부 개인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원망을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바다의 유목민이라 불렸던 제주 사람들에게 집을 떠난 생활은 곧 자유를 얻는 삶의 시작이었다. 이동과 정착을 반복하는 반유반착(半遊半着) 생활이 아니었더라면 제주 사회는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인류학자이신 故 김인호 선생님으로부터 재미있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과거 오현고 교사를 지내다 일본으로 건너가 인류학 공부를 하신 분이다. 故 조문부 총장 등이 다 이분의 고등학교 제자들이다. 이분이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일본에 사는 제주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제주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회사를 관두고 나와서 자전거를 사서 두부 장사를 하는 등 독립적인 자영업을 하더라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개체중심의 문화가 유전적으로 전승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에 반해서 경상도 사람들은 자영업을 하기보다는 큰 기업에 들어가 조직의 일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출세하는 것을 성공의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은 조직 속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제주와 육지의 문화적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내가 제주대 총장을 할 때 발전기금을 모금하러 일본에 자주 다녔다. 그때 제주 출신 자산가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은 아주 어릴 적에 일본에 와서 껌 장사, 미제품 장사 등부터 시작해 마침내 큰 사업을 일궈냈다. 그중에 제주대학교에 300억 정도를 기부한 김창인 회장도 있고 그에 버금가는 자산가들도 꽤 있었다. 이들은 점원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자영업으로 전환해 부를 일궜다. 눈물의 대한해협을 밀항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성공한 스토리는 한 개인의 성공뿐 아니라 제주인의 정신을 나타낸다. 나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초점을 맞춰 제주대학교의 정신을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정하고 이런 분들의 사례를 학생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제주대인의 정신은 무엇이냐고?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도 제주 사람이다. 내가 알기로는 북초등학교를 2~3년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제2대 제주도지사를 지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조그만 중소기업에 취업했다가 나와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와이셔츠, 가발 장사 등으로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밑천으로 대기업을 일궈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은 해방 후에 적산기업을 불하받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다. 삼성, 두산, 한화, 선경, 해태제과 등 그 예는 부지기수다. 그러나 김우중은 적수공권으로 대기업을 이룬 사람이다. 아마 김우중 회장의 DNA도 제주의 타리거생 문화가 잠재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구범 지사 때던가 김우중은 제주의 역사 및 문화 연구에 써달라고 하면서 50억원을 제주도에 쾌척한 바 있다. 그도 나이가 들어 고향인 제주에 사랑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떻든 대우는 망했지만 김 회장도 개인의 능력으로 성공의 신화를 쓴 대단한 기업인이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IMF 때 기업에서 가장 많이 해고된 사람이 인구 비율로 따지면 제주 사람이라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조직에서 일원으로 크게 성장하는 데는 체질상 문화적 저항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직원으로서 차근차근 권력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물음을 제기해 본다.

과거 제주 사람들은 상당히 개척자적인 개방 정신과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개방정신과 도전정신이 타리거생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 사진=픽사베이
과거 제주 사람들은 상당히 개척자적인 개방 정신과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개방정신과 도전정신이 타리거생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 사진=픽사베이

그렇다고 육지에서는 타리거생의 문화가 전혀 없었을까? 아니다. 육지에서도 선각자들은 타리거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 그것이 지배적인 사회 운영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잘 아는 지방자치 및 지역개발 전공자로 유명한 행정학자 최영출 교수와 영남대학교 총장을 지낸 최외출 교수 형제가 있다. 독특하게 ‘출(出)자 돌림인 이들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다. 어느 날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부친께서 어릴 때부터 두메산골을 벗어나 넓은 곳으로 가서 살라고 강조하셨다고 한다. 외지로 나가서 살라고 ‘외출’, 영원히 나가서 살라고 ‘영출’이라고 지었다니 자식을 품 안에 끼고만 살려했던 시대를 앞서나간 아버지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삶에 있어서 경쟁과 연대는 양립 불능의 행위이지만 제주인들은 이의 조화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소위 공동 목장, 공동 어장, 공동 바당, 공동학교 등의 관리와 운영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각성바지로 구성된 혼성 공동체에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생산 활동을 위해서는 ‘경쟁과 연대의 원리’가 요구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혈연 간에 상부상조만이 지극한 미덕이라 여겼기 때문에 경쟁의 원리가 뿌리내릴 수도 없었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 입각한 연대의 원칙도 세우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인의 생활 세계는 육지보다 넓은 광역적 생산 공동체(生産共同體)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인들은 흔히 ‘놈의 대동’이라는 말을 잘 쓴다. 개별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삶을 살면서도 마을 공동체의 일에는 군말 없이 힘을 합한다. 제주인들이 공동체를 유지해 온 이념은 동양에서 꿈꿔 오던 이상향으로서의 대동 세계(大同世界)를 추구한다. ‘대동 세계’ 혹은 ‘대동주의’라는 이념은 원래 유가에서 나온 말로 공동체 모두가 평등하고 고통이 없는 이상 세계를 뜻한다. 제주인들의 ‘대동주의’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 평균 지상주의의 이상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타적 이기주의,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선상에서 개체 인정을 전제로 한 현실적인 사회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제주 사람들은 상당히 개척자적인 개방 정신과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개방정신과 도전정신이 타리거생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칭기즈칸 장군들 중 한 사람의 묘비명에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다리를 놓는 자는 흥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졌으니 칭기즈칸 군대가 한때라도 세계를 지배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타리거생의 의미는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정신과도 맞물려 있다. 그러나 제주인의 젊은이들에게 타리거생 문화가 잊힌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제주를 벗어나길 두려워하고 제주 안에서만 안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국제자유도시는 세계인이 제주로 들어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제주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도 포함한다.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과거 제주인들이 가졌던 타리거생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 정신의 요체인 도전성과 개방성을 제주의 젊은이들 심전(心田)에 어떻게 심어 줘야 할 것인지가 문제다. 세계화 시대에 선대로부터 전해져 온 타리거생이라는 훌륭한 정신이 후대들에서 더욱 꽃피워져서 제주의 ‘문화적 지도’가 확장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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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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