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예술로 빛나는 제주굿의 세계] ⑤ 김영철 심방의 기메 제작 세계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은 제주만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제주 무속’ 역시 마찬가지다. 제주 무속에서 사용하는 ‘기메’는 종이 장식이나 신체 등 굿에서 쓰이는 종이 무구를 지칭한다. 종이 무구를 많이 사용하는 건 제주굿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의소리]는 권태효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민속학자 강소전이 집필한 국립민속박물관 조사보고서 ‘종이예술로 빛나는 제주굿의 세계’ 전문을 순차적으로 연재한다. 종이 예술작품 기메의 매력을 재발견하면서, 제주굿의 가치도 널리 공유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① 기메 조사의 필요성
② 기메의 명칭과 성격
③ 기메의 형태와 전승
④ 기메의 종류
⑤ 김영철 심방의 기메 제작 세계
⑥ 주요 기메의 제작 방법 및 과정
⑧ 제주굿과 기메의 활용과 실제
⑨ 기메와 신화(본풀이)의 연계 양상과 의미
⑩ 제주굿 기메의 가치와 활용


기메 제작자로서 김영철 심방에 대해서는 이미 강소전에 의해 간략히 소개된 바 있었다(강소전, 『제주의무구』, 제주대학교박물관, 2014. 35~36쪽). 하지만 당시 작업은 지면 제약상 가계 위주로 압축하여 정리해놓은 것이어서 김영철 심방을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별도로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다시 정리하여 그의 심방 내력과 기메 전수과정 등 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입무경위

김영철 심방은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부친 김상원과 모친 김순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1965년생으로 호적상에는 나타나 있지만 본래는 1964년 갑진생甲辰生이다. 그의 부가계父家系는 제주도내에서도 유명한 큰심방을 여럿 배출한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익히 알려진 김만보 심방이 작은할아버지이고, 최근 작고한 제주칠머리당 영등굿 보유자인 김윤수 심방이 고모부이다.(강소전, 위의 책, 35쪽.) 그러면 먼저 그의 입무 경위부터 차례로 살펴보도록 한다.

[심방 내력]

김영철 심방의 집안 내력은 고조할아버지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 심방은 ‘공시풀이’라고 해서 집안의 내력을 풀어주는데, 남들과 다르게 심방의 일생을 사는 연유를 닦아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공시풀이라 해서 심방의 내력이죠. 왜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어떻게 해서 이 길을 걸어야만 되는가? 꼭 가야만 되는 길인가? 안 가도 될 건데 어쩔 수 없이 가야 되고 가다 보니까 그 길이 좋은 길이었고 가다 보니까 지금은 행복한 길이 되었습니다.”

김영철 심방은 처음에는 심방의 길이 힘들고 아프고 무섭고 모든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고, 가시밭길을 걷던 것 같았으나 지금은 아스팔트처럼 편안하고 가로등 불이 켜져 있어서 편하게 걷는 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4대에 걸친 세습 무가계의 심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4대조 조상은 옛날에 도道 집사 벼슬을 했는데 지금 같으면 도지사의 비서실장 자리이다. 마을에 뭔 일이 생기면 그 정보를 얻어서 도에 보고하는 그런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 당시는 제주에 돌림병이 돌아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마을마다 병자들이 넘쳐나서 마을이 초토화될 정도였으며, 급속도로 병이 번져 구좌읍舊左邑 등지를 폐쇄시켜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군졸을 거느리고는 말을 타고 행원리를 지나서 세화리 쪽으로 들어가는데, 그 마을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거리였다. 약을 어떻게 구해다 줄 수 있을지,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또 마을을 포위해서 몰살시킬 것인가도 논의를 하면서 이동을 하는데, 도중에 말이 그만 발을 헛디디면서 낙마하고 말았다. 그렇게 낙마를 하게 되면서 몸을 심하게 다쳤고 많이 아프게 되었다. 요즘은 낙마를 하더라도 의술이 좋아서 금방 고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벼슬을 하고 있어 약간의 의술의 도움을 받긴 했어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당시 나이가 스물여섯 젊은 나이였지만 고조부는 끝내 그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 년 정도 앓다가 돌아가셨다.

고조할아버지는 당시 스무 살 무렵에 장가를 갔으나 아기는 없었는데, 돌아가실 무렵에 그만 복중腹中에 아기가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고조부나 고조모 두 분은 전혀 몰랐고, 돌아가신 뒤에야 알아서 증조부는 유복자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고조부가 돌아가시고 김해 김씨 집안사람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르는데, 송당리에 아주 좋은 군왕지기君王地氣의 좋은 묘터를 잡아 봉분을 만들어 씌운다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스님이 “아니 왜 묘를 저렇게 쓰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곳은 신神이 지나간 곳이라며, “왜 양반 집에서 심방의 터를 만드느냐? 지금 저 무덤은 형상이 북 형상이고 장구 형상인데, 저런 곳에 무덤을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말리면서, “이곳에 무덤을 쓰면 양반의 가문에서 심방이 난다”고 하였다. 그게 4대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으나 집안사람들은 그 말을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 흘려듣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양반 집안사람들이고, 더구나 유복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껄인다고 생각하며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그 스님을 구박하여 내쫓아 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무덤을 쓰고 난 얼마 후 고조할머니는 그제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아기를 지우기도 어려웠고 해서 할 수 없이 출산을 해서 유복자를 얻었는데, 그분이 곧 증조할아버지이다.

관官에서는 그렇게 유복자를 얻고 나니 양반 가문의 자손이고 또 아버지가 관을 위해 일을 하다가 돌아가신 것이니 일자리라도 줘서 먹고 살게끔 도와주려고 했다. 이렇게 증조할아버지는 성장 과정에서 관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는데, 증조부는 영특해서 남이 한 가지 하면 열 가지를 할 정도였다. 또 손이 굉장히 빨라서 별명이 ‘비행기 하르방’이라고 주위에서 불렀다. 주변에 그렇게 소문이 나니, 구좌읍 관내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유명한 큰심방들은 권세가 있었고 따르는 소미小巫들도 많았으며, 굿이 많으니 그 주변에는 먹을 것도 풍족했다. 증조부는 굿하는 일은 하지는 않았지만 궁핍한 가정환경 때문에 그런 심방집의 일을 좀 봐주곤 했었는데, 큰심방이 증조부를 보니까 얼굴도 잘 생기고 몸매도 좋고 일도 싹싹하게 잘하고 해서 남 주기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너 우리 집에 데릴사위로 와라. 그러면 모든 거 다 해주겠다. 풍족하게 살도록 보장하겠다”며 설득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때는 어머니도 재가하여 혼자 몸이 된 상태라 생활고도 있고 해서 결국 정씨 할머니와 결혼했으며, 그렇게 그때 굿을 처음 배워 심방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님이 말했듯이 증조할아버지가 이 길을 처음 걷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증조부가 심방의 길을 걷고 굿을 하게 되니까 소문이 나게 되었고, 김해 김씨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양반이 어떻게 심방질을 하냐”면서 하인들을 풀어서 그를 잡아오도록 하여 멍석말이를 했다.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았고 죽은 줄 알고 내던져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정씨 할머니에게 장가를 갔고, 아들 셋과 딸 둘 등 모두 오 남매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굿을 하게 되면서 심방 일가를 이루었다. 큰아들 가계에서는 손자인 김영철 심방까지 무업이 이어졌고, 작은 아들인 김만보가 큰심방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김영철 심방의 할아버지는 본래 구좌읍에서 본향당을 매고 있다가 그중 하나를 가지고 조천읍 함덕리로 넘어왔다. 함덕은 마을이 크니까 함덕으로 들어오면서 새롭게 단골이 형성되었다. 또 국화할머니라고 불리던 고모할머니도 후에 구좌읍에서 함덕으로 넘어와 모두
가 함덕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증조부는 구좌읍에서 굿을 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큰아들인 조부는 함덕으로 오면서 굿을 굉장히 잘하여 이름도 알리고 하면서 크게 활동을 했다. 학식도 있었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하여 지역 단골들에게 큰 신망을 얻었다. 하지만 조부 또한 안타깝게도 명줄이 짧아서 그만 스물아홉 살에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증조부, 조부, 그리고 부친까지 다 굿을 했는데, 증조부만 오래 살았고, 조부와 부친은 모두 명이 짧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대신 작은할아버지인 김만보 심방이 이름을 알려 무가계의 전통을 이어갔다.

한편 김영철 심방의 모계母系 쪽은 본래 무업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고 한다. 외가 쪽은 오히려 침술과 점술에 능했다. 외증조부는 침술에 능하여 특히 단골의 손만 만져도 기가 들어가서 몸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누가 들어왔는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다 알고 있는 등 앉아서도 멀리 내다봐서 신통하기로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그래서 ‘물터진골 하르방’이라고 하면 심방들 조차 인정하고 꼼짝을 못할 정도였다.

점궤도 잘 맞췄고 침술에도 능통했으며, 요즘 철학관처럼 사주 책을 보면서 앞날을 짚어주는 데에도 신통한 재주를 가진 것은 물론, 글 읽는 능력도 있고 하니 마을 일을 도맡아 관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외증조부의 그런 성향을 아들인 외조부가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서귀포 쪽에 자리를 잡고 살았는데, 그때는 마을마다 병원이 없으니까 아픈 사람들에게 침술도 시전하고 치료도 해주고 하면서 그 일을 외삼촌이 물려받아 업으로 삼고 살았다. 어머니 또한 산신일월山神日月, 책불일월冊佛日月을 모셨고 산파 역할도 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시집와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다 일찍 돌아가시게 되자, 할수 없이 심방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단골들이 “네가 함덕 마을에 거주하고 있고 심방 조상도 있으니 심방 역할을 하라”며 어머니에게 심방 노릇을 하길 요청했다고 한다. “당신을 믿는 게 아니고 조상의 신통력을 믿는 거다”라고 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무구라도 가져다 놓으면 그 집안이 덕을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편상 어린아이를 키우기도 어려울 것이고 하니 곁에서 도와줄 테니 심방일이나 하라고 하며 단골들이 어머니에게 거듭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굿을 해본 적이 없기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입춘굿이 끝나고 난 뒤 집안 가택신한테 비념도 하고 액도 막고 하는 문전철갈이를 우연히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그래도 조상이 있으니까 단골들이 오라고 해서 그 집에 가보니 단골들이 음식을 장만해서 상차림을 다해놓고는 어머니에게는 단지 앉아서 조상을 모셔만 놓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말명(제주굿의 사설)을 못하니까 그저 울기만 했다. 단골들은 그것만 으로도 큰 위안을 삼았다고 했다. 단골이 어머니의 손을 딱 잡으면서 “이렇게 조상을 모시고 앉아서 자네가 울어주니까 우리가 일 년을 예전처럼 편안하게 지낼 것이다.”라고 하면서 고마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진짜로 굿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가 처음 굿을 배운 이가 정씨 할아버님이라고 유명했던 어르신이었다. 어머니가 굿을 못 하니까 처음에는 소미로 데리고 다니며 가르쳤다. 두 번째로 는 안사인 선생을 따라다니며 소미로 일도 하고 굿을 배우고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 어머니가 진짜로 굿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함덕을 기반으로 단골들도 그대로 이어받아 정착하게 되었고, 그러던 것이 현재 김영철 심방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입무과정]

김영철 심방은 어릴 때는 제주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심방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다닐 때는 굿 자체를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멀리서 굿하는 소리는 들어보았지만 어머니가 강단이 있으셔서 자식에게는 공부만 하게 시켰다. 그렇지만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신병이 찾아왔다.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낀 듯이 안개 속에 있는 저 먼 그림자가 보이고 내가 나 아닌 타인이 내 몸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러면서 앞에 사람이 앉아 있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 사람인데….” 하고 그 사람의 앞날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하면 맞추고 했지만 그런 생각이 계속 지나가니까 스스로가 미친 듯이 느껴졌다고 한다. 또 같이 있는 아이들의 손을 잡으면 당시 아주 왜소한 체격이었음에도 “왜 그렇게 힘이 세냐?”고 했고, 어느 날은 뜬금없이 선생에게 대드는가 하면 잘 모르는 시험문제를 척척 맞추기도 하면서 의심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행동들을 하니 어머니는 그것이 신병이라는 것을 이미 짐작했다. 그래서 정태진 심방에게 데려가 7일 동안 굿을 해었다. 그랬더니 상태가 좋아져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정상적으로 공부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그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무렵, 3학년 2학기 때쯤 음악에 깊이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통기타 치는 것이 유행했는데, 음악을 하면서 악기를 울리고 이런 것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심방의 끼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렇게 음악에 깊이 몰두하면서 눌러두었던 신병이 다시 올라왔고,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다시 시작했다. 밥을 먹지 못해 막대기처럼 몸이 야위어 가면서 체중이 38~40kg에 불과하게 되었다. 5년 정도를 음악을 하면서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우연히 음악 일로 계약을 맺고는 제주도에 내려가게 되었다. 큰 나이트클럽에서 기타를 치며 보컬을 맡게 되었는데, 돈도 아주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그 나이트클럽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봐주고 서울로 올라오기로 작정했었는데, 인기가 좋아 클럽의 사장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밤일을 하고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퇴근하곤 했는데, 어느 날 큰 사고가 났다. 택시기사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운전을 하다가 택시가 다리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생겼다. 택시는 완전히 박살이 났으나 김영철 심방은 신기하게도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검사도 할 겸 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수간호사로 일하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 무렵 신병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기는 했으나 그 부분은 아내될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고 단지 무가계巫家系임만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 될 사람도 본래 송당리 사람이어서 김영철 심방이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여자 집에서는 반대를 하였고, 그러다가 나중에 결국은 승낙해 주어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를 낳으며 잘 살았다.

그 뒤 음악은 그만두고 사업을 하였다. 인조 잔디, 카인테리어 등의 사업을 했는데, 매일매일 금고가 가득 찰 정도로 엄청나게 돈을 잘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돈을 버는 만큼 직원이 사고를 쳐서 돈을 까먹곤 했다. 그래서 적자는 아니지만 거의 버는 게 없는 형편이었다.

그 무렵이 31세 때였는데, 신병으로 몸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그냥 산송장처럼 누워있는 날이 많았고,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마르냐고 묻는 것이 인사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함덕에 있는 사찰에 그가 평생 존경하며 모셨던 한석호 스님이 계셨는데, 몸도 아프고 하니 사업을 그만 두고 자기 밑에 수양아들로 들어오라고 제의했다. 네 모습이 산 사람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는 작은할아버지인 김만보 심방이 일본에서 크게 활동을 할 때였다. 몸도 아프고 하니 쉴 겸 일본에나 다녀오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김만보 심방이 잘 왔다고 하면서 3개월 동안을 못 돌아가게 했다. 신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니 데리고 있을 요량이었다.

그때 작은할아버지는 재일교포인 유미 할머니(한국명 현금석, 함덕 출신)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유미 할머니가 김만보 할아버지의 굿을 배우고 대를 이으라며 했다. “네가 심방질을 하지 않으면 5년도 살지 못한다”고 하면서 일본에서 쓸 용돈도 주고 하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서 연물도 배우게 되었고 기메 제작도 앉혀놓고 해보라고 시키면서 하나씩 만드는 법을 설명도 해주고 해서 31세까지 그곳에서 머물며 연물과 기메 제작의 기초를 어느 정도 닦게 되었다. 그곳에서 약 1년 6개월 정도를 김만보 할아버지에게 굿 관련 일을 배우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만보 심방은 일본 오사카 인근에서 대흥사(大興寺)라는 굿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일본 카가와(香天) 현 미토요시(三豊市)에 소재하고 있다. 다쿠미 촬영 사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김만보 심방은 일본 오사카 인근에서 대흥사(大興寺)라는 굿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일본 카가와(香天) 현 미토요시(三豊市)에 소재하고 있다. 다쿠미 촬영 사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그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가슴이 많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심방의 길을 걸어라. 그래야만 네가 산다고 하니….” 하고는 소미로 그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제주에서 그래도 크게 되려면 자기 밑에 있지 말고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로 들어가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런데 굿하러 가보면 신성한 자리임에도 사람들이 술도 먹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해서 그런 부분이 좀 못마땅했다고 한다. 김만보 할아버지에게 배울 때에는 잔 하나 놓는 것, 음식 하나 진열하는 것도 엄격하고 경건했다고 느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심방질 안한다고 하면서 뛰쳐나와 버렸다.

김만보 심방의 일본 활동 시기 모습. 다쿠미 촬영 사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김만보 심방의 일본 활동 시기 모습. 다쿠미 촬영 사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술집을 하나 인수해서 한 6년 정도 운영을 했는데, 사업은 아주 번창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다시 신병이 심하게 찾아왔다. 술집을 접어야 할 정도였다. 밤마다 저승차사가 찾아와서 창문 밖에 서있었고, 그러면 꼼짝도 못하고 가위에 눌려 고통을 받곤 했다. 그렇게 앓게 되자 몸무게가 33kg까지 떨어졌고, 부인은 매일 울면서 안타까워만 했다. 돈은 있었지만 병원에 가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다고만 했다. 어머니가 신병이라며 굿을 다닐 것을 권했지만 거부했다. 그렇게 계속 3년을 버티니 가정이 제대로 꾸려지지가 않았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하필 찾아가는 곳이 공동묘지였다. 거기서 하룻밤씩 자고 오면 몸이 좀 괜찮아졌다가 다시 집에 머물게 되면 열이 나고 헛것이 보이고 해서 다시 또 공동묘지를 찾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면 새소리도 들리고 하면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고 한다. 공동묘지에 누워 잠을 자면 잠도 잘 왔는데,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자살한 사람인 줄 알고는 놀라거나 의심하곤 했다. 그렇게 3년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자 부인이 울면서 다시 심방의 길을 걸으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어머니에게 “이제 어머니가 걷는 길, 아버지가 갔던 심방일을 다시 해보겠다”며 다짐을 하였다. 그때 나이가 41세였다.

뒤늦게 심방일을 했으나 눈썰미가 있고 본성이 성실하여 그것이 금방 소문이 났다. 그러니 여러 군데서 함께 일하자고 찾았고,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의 김윤수 회장이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여 보존회 일도 맡으면서 굿을 함께 하러 다녔다. 김만보 할아버지에게 배운것, 어머니가 굿할 때 따라다닌 것, 안사인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에 김윤수 심방에게 배운 것, 정태진 심방에게 배운 것까지 바탕이 되어 훌륭한 재주를 지닌 제주도 심방으로 자리매김했고, 칠머리당영등굿 보존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또 2014년에는 자신이 제작한 기메를 위주로 하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제주의 무구>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현재는 조천읍 와흘리의 본향당을 맡아 당멘심방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는 제주돌문화공원 내에 새로 설립된 당인 설문대할망당의 당멘심방의 일을 맡고 있기도 하다.

제주돌문화공원 내에 설립된 설문대할망당.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제주돌문화공원 내에 설립된 설문대할망당.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2. 기메 제작 전수과정

굿판에서 기메는 굿을 책임지는 수심방이 아니라 굿을 보조하는 소미가 주로 만든다. 소미들이 서로 도와 굿에 쓰일 기메를 함께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소미 중의 한 명, 특히 남자 소미가 굿하는 동안 필요한 기메를 도맡아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소미 일을 하는 심방 중에서도 기메를 특히 잘 만드는 소미가 있는데, 이런 심방을 ‘기메선생’이라고 부르면서 특별히 대우를 해주기도 한다.(위의 책, 34쪽.) 김영철 심방도 현재 이런 기메선생 소리를 듣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육지와 다르게 제주에서는 무업에 들어선 소미가 반드시 어느 특정 스승에게만 기메 제작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스승 심방에게서 기메 제작법을 익힌다. 하지만 여러 심방들과 함께 무업 경력을 쌓게 되면서는 점점 솜씨가 늘어 나중에는 여러 심방들의 기메 제작기술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풍부하고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위의 책, 33쪽.) 같은 종류의 기메라도 심방에 따라, 또 굿하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갖고 있기에 이런 사정도 잘 감안해 기메 제작법을 습득하기도 한다.

김영철 심방의 기메 제작법 전수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심방은 작은할아버지인 김만보 심방이라고 할 수 있다. 김만보 심방은 할아버지의 친동생으로 한 집안 친척이었기에 어릴 적 자라면서부터 밀접하게 왕래하고 지내면서 굿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영향을 받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31세에 신병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던 시기에 일본에 건너가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만보 할아버지 밑에서 2년 정도를 기거하면서 제주굿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으며, 특히 기메 제작과 연물 치는 방식 등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비자 문제 때문에 왔다갔다 하면서 지내긴 했지만, 그때 작은할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그의 기메 제작 세계에 바탕을 이룬다고 언급하고 있어, 김만보 심방이 누구보다도 김영철 심방의 기메 제작법에 깊이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처음 기메를 배웠던 스승이 김만보 심방이라고 할 수 있고, 때문에 그가 지금 만드는 기메의 대부분은 김만보 심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김만보 심방이 일본 대흥사 굿당 안에서 굿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다쿠미 촬영 사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김만보 심방이 일본 대흥사 굿당 안에서 굿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다쿠미 촬영 사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당시 김만보 심방이 제주의 일반적인 기메 제작 방식을 알려주었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주로 일본 오사카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제주도식의 굿법 및 기메 제작 방식도 아울러 익힌 측면도 있음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 김영철 심방 또한 지금도 오사카에 주요 단골들이 있어서 1년에 적어도 두세 차례는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김만보 심방이 이미 제주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기에 그가 이미 제주도의 기메 제작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김영철 심방의 경우는 김만보 심방뿐만 아니라 안사인 심방의 영향을 받은 어머니 김순아 심방을 비롯해 김윤수 심방, 정태진 심방, 양정순 심방 등 여러 심방들의 기메 제작법을 함께 전수받은 부분이 있기에 제주도의 정통적인 기메 제작술을 지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제주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에서 함께 하였던 김윤수 심방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조사 시 김영철 심방은 ‘돌레지’나 ‘발지전’을 비롯해 몇몇 기메를 대상으로는 김만보 심방과 김윤수 심방의 기메 제작법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시연을 통해 설명하기도 하여 이들 심방의 기메 제작 방식을 두루 익혔다는 점과 그에 따른 실제 제작 능력이 자유자재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김윤수 심방도 김영철 심방에게는 고모부였기에 김만보 심방 못지않게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한동안 그를 보좌하여 굿을 다니고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부회장으로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일에도 깊이 간여하기도 했기에 그에게서 받은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음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보존회와 같이 준비하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된 제주 무구 관련 전시는 그 주된 전시 내용이 기메였기 때문에, 김윤수 심방의 기메 제작법을 다소 반영하여 제작 및 전시로 공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김영철 심방이 기메 제작을 익히는 데 있어 영향을 준 심방으로는 정태진과 양정순 등을 들 수 있다. 정태진 심방은 그가 어렸을 때 신병을 다스려주기도 했고,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굿법을 알려주기도 했기에 그에게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구술하고 있다.

정태진 심방은 별세하기 전에 송당리의 당멘심방이었는데, 김영철 심방은 어릴 적부터 정태진 심방을 삼촌처럼 여기고 따르고 해서 둘은 삼촌 조카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그런 정태진 심방이 작은 할아버지였던 김만보 심방과는 실질적으로 스승과 제자 관계에 가까웠다고 한다. 김만보 할아버지 스스로는 제자라는 말을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고 했지만, 김영철 심방이 그 길을 들어서기 전부터도 “김만보 심방이 나에게는 스승 같은 분이다”라고 정태진 심방이 말하는 것을 종종 듣곤 했다고 한다. 또 정태진 심방도 일본을 왔다갔다 하면서 김만보 심방과 같이 오사카 쪽에서 함께 굿을 하기도 하는 등 돈독한 관계였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기메 제작법을 비롯해 굿법 등에 있어 정태진 심방은 김만보 심방의 굿법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정태진 심방이 그가 중학교 때 처음 신병을 앓았을 때부터 그를 챙겼고, 특히 그가 심방이 되고 난 뒤로는 굿이 날 때면 으레 소미로 불러 기메 제작을 맡겼다. 그러면서 제작과정상 세밀한 부분까지도 잘 잡아주곤 했다고 한다. 곧 김만보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부분에 좀 더 체계 있게 잡아준 역할을 한 심방이 바로 정태진 심방인 셈이다.한편 신양리의 양정순 심방도 지역은 다르지만 함께 굿을 다니면서 기메 제작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굿법을 익히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양정순 심방은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의 당멘심방이다. 제주 목안에서 처음 굿을 배웠다고는 하나 정의 지역의 굿을 하는 심방인 셈이다. 따라서 목안 이외에 정의 지역의 굿법과 기메 제작법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신양리는 옛 정의 지역에 속하지만 양정순 심방은 제주 목안에서 배운 굿을 그 지역으로 가져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심방일을 처음 시작하고 배웠던 곳은 구좌 지역이며, 그 뒤에 신양리로 넘어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곧 양정순 심방은 제주 목안과 정의 지역의 것을 두루 꿰고 있는 심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2023년 6월7일 김영철 심방 구술 내용])

정의나 대정 지역의 기메 제작법은 목안보다는 좀 간단한 편이다. 양정순 심방은 여성 심방으로는 특이하게 난이도 있는 기메를 잘 만들었다고 한다. 양정순 심방은 특별히 김영철 심방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를 아껴서 굿이 있을 때면 소미로 자주 불러 함께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연물도 잘 치고 기메도 잘 만들고 해서 신양리로 일을 오라고 했고, 특히 기메 제작은 그를 믿고 일임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중간중간에 “너 만드는 게 하나 빠졌다”고 한다거나 “너울지는 이렇게도 만든다”고 하면서 그 지역에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물론 양정순 심방은 여자 심방임에도 불구하고 전 과정의 기메 제작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의 지역에서 기메 제작으로는 양정순 심방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지역의 여러 기메 제작법을 익혔고, 그 지역으로 굿을 가면 그 방식에 맞춰 기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성주꼿.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일반적인 형태의 성주꼿.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신양리 양정순 심방에게 배운 발지전 제작 방식을 선보이는 김영철 심방. 탑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신양리 양정순 심방에게 배운 발지전 제작 방식을 선보이는 김영철 심방. 탑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이외에 그는 제주 목안, 정의, 대정 등 제주 지역별로 기메 제작상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도 대체로 잘 파악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성주꼿을 사례로 든다면 목안에서는 속지 한 장을 반으로 접어 꽃 모양을 만든 뒤 반달 모양이 되도록 펼치는 반면, 정의와 대정 지역에서는 속지 한 장을 아래로 깔고 그 위에 두 장의 속지로 꽃 봉우리 모양을 만들어 아래로 내려서 전체적으로 펼치는 형태가 되게 한다. 이렇듯 지역별 차이가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또 영가기나 체섯기의 경우에 있어서도 목안은 사람 모양의 다리 부분이 첵지 밖으로 나오게 하면서 긴 반면 정의나 대정의 것은 다리가 짧아서 사람 모양을 한 부분이 작게 보인다고 하는 등 지역별 형태의 차이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김영철 심방은 굿을 다니면서 통상적으로 제작,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양정순 심방에게서 배운 탑 모양을 한 발지전 제작 방식을 실연하여 보여주기도 하는 등 실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용준 선생의 『제주도무속자료사전』의 주제보자이기도 했고 칠머리당영등굿 초대 보유자였던 안사인 심방이 어머니에게는 아주버님(큰시누이 남편) 관계이므로 어머니가 심방일을 하도록 하는 데 많은 뒷받침을 하였는데, 안사인 심방의 기메 제작법도 주로 어머니를 통해 전수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김영철 심방은 여러 이름 있는 심방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메 제작법을 두루 배웠으며, 제주의 지역별 편차 및 제작 방식도 익히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료 구입]

제주도 심방들이 굿을 하면서 사용하는 기메 제작용품의 구입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소간의 변화가 있어왔다. 크고 작은 굿이 많았던 이른 시기에는 마을마다 잡동사니 물건을 파는 구멍가게 같은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굿에서 쓰는 영가옷이라든가 기메를 만드는 종이 같은 것을 갖춰놓고 있어 그것을 구입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뒤에는 제주시 일도1동 동문로터리 시장 쪽에 있던 포목점들에서 기메 제작 종이를 비롯한 굿 재료들을 구입하여 활용했고, 근래에 들어서는 주로 불교용품점에서 재료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김영철 심방의 경우는 제주시 오라동에 위치한 불교용품 전문점인 대광불교사에서 기메 제작을 위한 용품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김영철 심방이 주로 기메 제작을 위해 재료를 구입하는 대광불교사.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김영철 심방이 주로 기메 제작을 위해 재료를 구입하는 대광불교사.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기메 제작을 위한 구입 품목은 대체로 한지와 창호지, 삼색 전지, 삼색천 등이며, 이들 재료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굿 절차에 알맞은 다양한 모양과 색상의 기메를 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굿에서 쓰이는 기메를 지탱하거나 기메에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대나무도 일정량이 필요한데, 그것은 특정한 곳에서 구입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니며, 굿하는 곳 인근에서 적절히 대나무를 찾아 그것을 다듬어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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