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5) 마라도

 

마라도

까맣게 한 세월을 수평 끝만 적시면서
사무친 회귀의 꿈에 저 홀로 야위는 섬
하늘도 이곳에 와선 
뭍으로만 기우네

뭍 소식 섭섭한 날은 바다마저 돌아눕고
파랑도 가는 뱃길에 잠겨버린 무적소리
마파람 보채는 이 밤도 
불을 끄지 못하는가

차라리 외로운 날은 마라도에 가 앉으리
한 점 피붙이로 빈 해역만 떠돌다가
남단 끝 선명히 찍히는 
낙관落款으로 앉으리

/ 1978년 고정국 詩

고정국 사진
고정국 사진

#시작노트

신이 수평선을 그을 때 그 끝부분에 붓놀림이 멈칫하여, 한 점 섬으로 생겨난 것 같은, 지귀섬, 섭섬, 문섬, 범섬, 새섬, 형제섬 그리고 가파도와 마라도! 1100도로 내리막길 급커브에 있는 ‘거린사슴’에서 차를 세우고 동에서 서쪽으로 찬찬히 바다를 내려다보면, 이 섬들이 어쩌면 타성바지 형제처럼 다른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맨 끝에 언제나 간절한 눈길을 보내던 마라도는 이미 1980년대 지치도록 떠돌던 개인적, 시대적 암울함의 대명사였습니다. 또한 더 멀리 잠겨 잇는 환상속의 섬 파랑도(이어도)야말로 오랜 세월 절망 속에 갇혀 사는 제주사람들의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혹시나 기대했던 시대적 민주화의 갈망은 “섭섭한 뭍소식”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파랑도 가는 뱃길의 무적霧笛소리”조차 안개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마라도는 그 허무를 받아 마시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방황과 무기력의 상태에서 마파람에 시달리고 있던 나를 마라도는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낙관落款이라는 시어詩語를 나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등단 전에야말로 한 편의 작품에도 치열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 한 편을 가지고, 오백 회 또는 일천 회의 퇴고를 거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등단 전에 썼던 일백 편에 가까운 작품들을 대부분 암기할 수 있는 것을 보며, 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섬 끝 물굽이에 
깎일 것 다 깎이고

돌아서면 가슴에 안겨
흐느끼는 신양리 바다

흐름도 낙일落日에 맡기랴,
정을 두지 못하네. (1988)

「일출봉을 내려오며」 전문

1988년, 어쩌면 이때가 생의 유턴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섬 끝 물굽이에  깎일 것 다 깎”여 버린 일출봉 절벽을 내려오면서 남루했던 나의 중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서귀포시 동편 끝에서, 또는 서쪽 끝에서 절망의 뉘앙스를 풍기는 일출봉과 마라도의 그 절망적 몸짓이야말로, 최후의 오기로 사람을 무장시켜주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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