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6) 봄눈

 

봄눈 – 일회용 날개를 달고

길 위에 눈이 와도 소실점은 따뜻했다
아득히 점선을 따라온 기러기의 행렬처럼
양순한 눈송이들이 
줄을 지어 내리고

일회용 날개를 달고 참 멀리도 날아온 저들
저들은 저들대로 오르내리는 길 있었네
하반신 천상에 두고
그리움만 품고서

착지점 서성이던 한 점 눈송이가 
해안도로 차창 틈을 조심조심 비집고 와서
따뜻한 종이컵 속에 
가만 눈을 감던 날

/ 2010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시 쓰는 것 말고 또 하나, 필자의 취미생활이 겨울철새를 카메라에 담아두는 데 있습니다. 도요새를 비롯, 겨울철새들은 주로 제주 해안가나 물  웅덩이가 있는 갈대밭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낮 눈 내리던 날, 길가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한 잔을 뽑고, 북제주 서쪽 해안도로를 갔습니다. 

애월 해안도로에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도로변에 차 창문을 내리고, 눈 오는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새는 보이지 않고, 함박눈 송이송이가 새떼처럼 나를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멀리서 날아온 기러기가 착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 주위를 한 바퀴 비잉 도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함박눈도 착지 직전해서 일순 침착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아니나 다를까, 함박눈 한 송이가 차창 밖을 서성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창문 안으로 들어와 멈칫하더니, 내가 쥐고 있는 믹스커피 종이컵 속에 그 고단한 일회용 날개를 접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저물 무렵에, 이번엔 싸락눈 한 무더기가 한길로 쏟아져 나와 “우르르 우르르!” 대량해고 근로자들의 발목형상처럼 튀어 오르면서, 시대의 한 면모를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저들 어딘가에 
반항아의 기질이 있어

하늘을 성토하던 
대량해고 근로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발목들을 
튕긴다. (2012)

동서남북 겨울철새 사진 한 컷 건지려다, 오늘은 하반신 천상에 두고, 일회용 날개를 달고 내려온 따뜻한 그리움의 언어 ‘봄눈’ 이라는 철새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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