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368) 가리가 커도 주젱이가 으뜸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 편집자 글 


- 눌 : 가리, 노적(露積)가리
- 주젱이 : 가리에 빗물이 새어들지 않도록 덮씌워 놓은 갓 모양의 덮개. 짚이나 띠 또는 억새 같은 질긴 것으로 만들었다. ‘주지’라고도 한다. 옛날 곡식을 거둬 탈곡하기 전에 밭이나 마당에 그냥 뒀다 여러 날 비라도 오면 젖어 썩는 걸 막기 위해 층층이 쌓아 놓은 걸 ‘가리’라 했고, 그 맨 꼭대기에 씌우던 것이 주젱이(주지)다. 요즘엔 베자마자 기계로 탈곡까지 하니, 밭이나 집마당에 높고 큼직하게 쌓아 올리던 ‘눌’의 풍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주젱이를 안 씌우면 빗물이 스며 곡식 다 썩으니 ‘주젱이가 최고’라는 얘기다. / 사진=픽사베이<br>
주젱이를 안 씌우면 빗물이 스며 곡식 다 썩으니 ‘주젱이가 최고’라는 얘기다. / 사진=픽사베이

낫으로 벤 곡식을 밭에 방치해 두었다가는 어쩌다 큰비라도 만나 여러 날 맞게 되면, 비에 젖어 엉망이 된다. 장마에 베어놓은 곡식이 싹을 틔우는 경우도 흔하다. 땀 흘려 거둔 곡식인데 이런 낭패가 없다. 

그래서 빗물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밭이나 마당 한구석에다 쌓아놓는 게 ‘가리’다. 그런다고 안심이 안된다. 빗물에 강한 주젱이를 촘촘히 짜서 씌워야만 한다. 눌만 눌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젱이를 안 씌우면 빗물이 스며 곡식 다 썩으니 ‘주젱이가 최고’라는 얘기다.

모든 일에는 형식이나 과정도 빼어 놓을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이다. 가리의 존재 가치는 그 크기에 있지 않고 바로 주젱이에 있다 함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사한 것으로 ‘구슬이 닷 말이라도 고망이 엇으민 못 꿴다’가 있다. 딱히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닌가.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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