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소리]'사계리 청년 경찰관 생매장 사건'의 이대춘씨 가족 비화

<4.3은 말한다>(1)(제민일보 1994년 3월 25일 발행, pp. 542~546)에서 '사계 청년들 경찰관 린치'란 소제목으로 상당히 소상하게 밝혀진 사건(1982년 '제주도지' 상권에서는 일명 경찰관 생매장 사건으로 잘못 기재된 것)으로 그 주인공중 한 사람인 이양호(당시 23세)의 장녀 이대춘(안덕면 사계리 송죽동 15번지, 대정중학교 15회졸, 현재 미국 뉴져지 주에서 개인사업)씨를 여러 차례 만났다.

필자와는 중학교 동기이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셋째 딸이 뉴욕대학 재학중(2000년)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겠다면서 제주4.3에 관심을 보이고 자료조사를 한다고 해서 내가 발굴한 자료도 제공해 주었고, 제주4.3연구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또 사계리 공동묘지에 있는 백조일손 공동묘역을 찾기도 했기 때문에 각별한 인연이 맺어졌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다고 할까...

오늘은 전화인터뷰를 통해서 그 가족이 당한 비화를 비교적 소상하게 정리할 수가 있었다.

먼저 <4.3은 말한다>에 기록된 이양호 관련 사건을 요약한다.

1948년 2월 9일(섣달 그뭄날)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2.7 총파업'으로 전날 성산포에서 벌어진 시위의 영향으로 안덕면 사계리(산방산 앞 농어촌 마을)에서도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그날 우연하게도 안덕지서 주임과 순경 2명이 사계리 민가 송죽마을 '고망술집'에서 밤새 술파티를 열고 있었다.

마을 청년들은 이날 향사에 모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반대 집회를 가질 예정으로 가가호호 방문을 아침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순경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이양호, 임창범, 박경선 등 마을 청년들은 그 술집을 덮치고 경찰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향사로 끌고 가서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향사에서 린치는 여러 시간 지속되었다. 한 주민의 신고로 안덕지서에서 비상출동을 하게 되었고 마침 제주경찰학교 생도들이 졸업여행차 안덕을 지나 중문으로 향하고 있던 차 연락을 받고 급선회하여 사건 관련자 색출에 나섰다.

청년들은 피신해 버리고 대신 그 부모나 아내들이 붙들려가서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임창범의 어머니는 고문에 견디다 못해 자살해 버렸다.

마을 유지들이 마을 전체가 큰 변을 당할 것이 우려되어서 경찰당국에 호소하여 관련 주동자들을 책임지고 자수시키겠다고 하였다. 그후 6∼7명의 청년들이 자수하였고 잃어버린 총기도 찾아내었다.

이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 되지 않았다. 이양호와 임창범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대구 형무소 정치범 처형에 휘말려 불귀의 객이 되었다. 고향에 살아남았던 박경선(박동심의 부친)은 1950년 8월 20일(음 7월 칠석) 예비검속자 처형(모슬포 섯알오름, 모슬포 비행장 동쪽)에 희생되었다.

다음은 이양호씨의 장녀 이대춘씨(1946년 2월생)의 증언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어머니 우순화(모슬포 이교동 출신, 당시 21세, 1997년 9월 70세로 임종)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얘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일본 오사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안덕면 사계리에서 종가 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혼자 살고 있었다. 장남인 이양호씨를 불러들여 종손노릇을 시킬 목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

아버지는 귀향하자마자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었는데 그만 두고 말았다. 경찰로 입문하려 했지만 할머니가 "경찰 자손 잘 되는 집안 못 봤다"고 말리는 바람에 그것도 할 수 없었고, 군인이 되려고 군입대를 원했는데도 "내가 죽거든 가라"며 또 말렸다.

연년생으로 두 딸을 두었다. 동생은 이영춘(1947년 9월생, 현재 사계리 본가에 거주)이다.

아버지가 피신해 버리자 어머니는 경찰에 불려가서(사계리 향사에 임시주둔) 수일 동안 온갖 고문을 다 당하였다. 전신에 피멍이 너무 많이 들어서 마치 뱀 같았다고 했다. 너무 혹독하게 얻어맞아서 속옷에 변을 쌌다.

그 경찰들 가운데 모슬포 이교동 출신(과거 우씨의 야학선생)이 있어서 상관들에게 통사정해서 "집에 젖먹이가 있는데 젖이라도 먹이게 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해서 임시 풀어주도록 허락을 받아 주었다. 젖먹이를 보는 순간 부둥켜 앉고 피범벅이 되고 변냄새가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성담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통로를 통해서 사계리를 탈출, 친정인 이교동으로 숨어들었다. 거기에 남편 이양호가 피신해 있었다.

경찰들은 아버지가 입산했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그렇게 죽도록 고문했다. 이교동으로 피신하기 전에 아버지는 산이수동(송악산 동쪽 어항)에서 배를 몰래 빌려 타고 일본으로 밀항할 계획이었는데, 약속한 선박이 나타나질 않아서 식량을 담은 룩색을 집에 두고 피신해 버리는 바람에 그 룩색을 집안에서 발견한 경찰들은 어머니가 그 식량을 산으로 보내려고 한 것으로 의심하고 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경찰들의 추적이 두려운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보고, "가족들이 모두 죽게 생겼으니 알아서 하라. 나는 오늘 부로 발길 닿는 데로 멀리 떠나간다"면서 영락리 근방 먼 친족 집으로 어린 동생을 데리고 피신해 버렸다. 이대춘은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야 했다.

이교동에 있는 외할아버지가 "가족이 전멸하게 생겼다"면서 사위를 설득해서 자수할 것을 권유했다. 장인의 권유에 못 이겨 이양호는 경찰에 자수를 했고, 제주도 경찰국에 넘겨졌다가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어머니 얘기로는 대구 형무소에서 한 두 차례 엽서가 왔었다고 한다. 엽서 내용은 "밝은 새날이 곧 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나서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10년 형을 받았다고 하지만 한국전쟁통에 처형되었다고 본다.

할아버지(오사카에 거주하다가 작고)와 작은아버지(이문호, 현재 가와사키에 거주, 73세 가량)는 "한국은 사람을 죽이는 곳이다"라면서 한 번도 고향을 찾아오질 않았다.

어머니는 있는 재산을 팔아서 아버지 목숨을 구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재산만 탕진하고 허사로 끝났다. 평생동안 젊었을 적 당한 몹쓸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과 악몽에 시달렸다. "우리 어머니는 기상청보다도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했다"고 이대춘씨는 회고했다.

어머니는 두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마지막 과업으로 여겼던지 1973년과 그 이듬해 모두 출가시키고 나서 몸을 더 이상 가누지 못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1997년 9월 당뇨 합병증으로 70세에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일본에 사는 작은 아버지의 장남을 양자로 데렸지만 평생에 얼굴한 번 대화한 번 해 보지 못했다. 한 번은 동경 올림픽을 핑계 삼아 양자와 시동생을 만나려 여권신청을 했지만, 연좌제로 좌절되었다.

양자는 어머니가 돌아가고 장례식 전날 하루 와서 상제노릇 하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이대춘씨는 한 맺힌 과거를 이렇게 회고했다. "군대에 가서 죽은 사람의 자녀들은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으면서 고등교육도 무료로 받고 잘 사는데, 우린 폭도가족으로 죄인취급을 받으면서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 죽음은 다 매한가지인데 우리 유가족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필자가 "대통령이 지난 10월에 제주에 직접 와서 유가족들에게 사과하고 갔다"고 전해 주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반문을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질 못했다.

이대춘씨는 남편(문태병)을 따라 1979년 3월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문태병씨의 형(문태수)이 유도사범으로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 와서 동생 가족을 초청했다.

이민 와서 지금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왔다. "우리 아버지가 시국에 학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어머니와 내 동생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딸 영숙이는 제주에까지 가서 논문자료를 구해와서 졸업논문을 완성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사립)을 졸업하고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다. 내년이면 법과대학원(Law School)에 입학하게 되는데 변호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다.

현재 3녀 1남을 슬하에 두고 있다. 장한 제주 어머니의 상을 그녀에게서 또한 바라보면서 필자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도영의 뉴욕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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