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 믿고 먹을 수 있는 '양심사회'를 희망한다

▲ 새우깡 불사르다 새우깡 마니아, 추억까지 불사르다 ⓒ 김강임

달짝지근하지만 고소한, 씹는 소리가 나지만 입 안에서 녹아버리는 새우깡. 사람들은 새우깡을 '국민스낵'이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봉지를 불룩하게 채운 새우깡은 왠지 용량이 많은 것 같고, 가격도 저렴하여 서민들이 간식거리로 많이 애용했기 때문이다.

난 새우깡 중독인가?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뽀빠이' 만큼이나 새우깡을 즐겨 먹었다. 내가 새우깡을 즐겨먹었던 때는 열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을 때부터다. 그때 퇴근 무렵이면 역 앞 가게에서 어김없이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

새우깡은 퇴근시간 우리의 허기진 몸을 채워주는 엑기스같은 존재였다. 덜커덩거리는 열차에 앉아 봉지 속에 손을 넣고 하나씩 빼먹는 재미는 퇴근길 이야기를 버무리는 양념처럼 고소했다. 더욱이 바삭바삭 씹는 소리는 늦가을 낙엽 밟는 소리처럼 구수했다. 마지막으로 손에 묻은 새우 맛을 핥아먹을 때면 다 먹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새우깡 추억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나이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 새우깡은 중독처럼 내 입맛을 유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책상 앞에는 늘 새우깡 봉지가 너저분하게 자리한다. 새우깡 부스러기가 의자에 떨어지고 새우깡 찌꺼기가 컴퓨터 자판기에 떨어져도 나는 늘 매콤함과 달콤함에 취한다. 때문에 늘 남편으로부터 핀잔을 받았다.

"당신, 꼭 애들 같아, 날마다 새우깡이니. 쯧쯧, 새우깡 중독 같다."

정말 중독이었나? 대행 마트에 장을 보러가도 제일 먼저 수레를 채우는 것은 새우깡이다. 어디 그뿐인가? 노래방 가서 캔맥주 시키면 접시에 수북이 담아오는 것이 새우깡. 제일 먼저 새우깡을 집어먹는 사람도 역시 나다. 그만큼 가격도 저렴하고 배를 채우는 포만감도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 새우깡 새우깡을 사서 다 먹지 못했다.  ⓒ 김강임 

아뿔싸! 그런데 중독의 유혹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며칠 전, 퇴근하면서 마트에 들러 또 새우깡을 샀다. 그리고 얼마 전, 매스컴을 통해 알게된 새우깡은 '생쥐깡'으로 변해 있었다. 

앗! 난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그 구역질은 열차 안에서 먹었던 추억까지도 토해 낼 뻔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의.식.주'는 필수조건이다. 그 중에서도 먹는 것 만큼은 인간의 생명과도 연관된다. 

더욱이 산업이 발달하면서 모든 식품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때문에 그 과정 또한 늘 위험의 요소가 뒤따른다. 재료 조달에서부터 조리, 유통과정까지 말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늘 생산자를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나는 생쥐머리를 몇 마리나 먹었을까?"

처음 매스컴을 접하고 나서 배 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부글부글 끌었다. " 난 새우깡 속에 든 생쥐머리를 몇 마리나 먹었을까?"라고 반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새우깡 생쥐머리 출현 사태는 식품업체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사람이 먹는 것을 비위생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책상 앞에서는 5일 동안 새우깡 봉지가 뒹굴었다. 그런데 남편의 한 마디는 정곡을 찌른다.   

"당신 참 무던하군. 아직도 새우깡을 버리지 않았어? 도대체 생쥐머리를 얼마나 더 먹으려고." 

식품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먹는 것만큼은 장난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먹는 것과 관련해서는 심사숙고했으면 한다. 재료조달에서 가공, 유통까지 소비자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양심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남편의 비수에 비로소 먹다 남은 새우깡을 꼬깃꼬깃 구부려 휴지통에 넣었다. 그리고 불 살랐다. 참 아쉬웠다. 행여 내 소중한 추억까지 날아갈까 조바심이 생겼지만 까맣게 불타는 새우깡은 이 중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제주의소리>

<김강임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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