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5)

▲ 강요배·발포 68.0×52.5cm,종이·콩테, 1991년

발포

"네가 서 있던 곳은 칠성통 입구 쪽이었습니다. 당시 시위 행렬은 빠져나간 상태였고 광장 주변에는 150명쯤 관람 군중이 있었습니다. 기마경찰대가 북국민학교와 교통대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때 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가 칠성통에서 관덕정 쪽으로 달려 나가다 기마경찰의 말 아래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말에 차였는지 길옆 고랑창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도 기마경관은 그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구경꾼들이 욕을 하며 쫓아갔습니다. 몇몇 사람은 돌멩이질을 했습니다. 그때는 길바닥에 돌멩이가 천지 시절이라 돌멩이를 던지는 일이 쉬웠습니다. 기마경찰이 급히 경찰서 쪽으로 달려간 다음에 총소리가 터졌습니다."

고효생高孝生, 1994년 75세, 애월읍 하귀1리

 

"나는 그때 관덕정 북쪽 길 건너편인 경찰관사 앞길에 있었습니다. 시위대들이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였구요. 시위 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통과할 때 중간 대열에서 S자형으로 굽이치듯 위세를 부리니까 리더급의 사람이 소리치면서 그러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고 하더군요. 시위행렬이 지나 때에는 경찰측과 아무런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기마경관이 달여오고 총성이 났지요. 경찰서 관사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팍팍 쓰러졌습니다. 무의식중에 경찰서 쪽을 보니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발포하고 있는 경찰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요. 와락 겁이 나서 서문통 쪽으로 피신했지요."

김기용金容沂, 1994년 73세,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섬 제주, 정부가 지정한 평화의 섬 제주에 1948년에 피의 참극이 벌어졌다. 현대사 최대 비극인 제주4.3.마을은 불타 폐허가 되고, 곳곳에서 사람이 죽어갔다. 제주도는 어둠에 싸인 죽음의 섬이 됐다. 제주에 신혼여행 온 부부나 수학여행 온 학생들, 관광객 가운데 제주4.3의 비극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동백꽃지다>는 강요배 화백이 제주4.3의 전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화집이다. 여기에 제주4.3지원단 김종민 위원이 ‘증언’을 덧붙였다. <제주의소리>는 4.3 60주년을 맞아 <동백꽃지다>를 펴낸 강요배 화백과 김종민 위원, 그리고 ‘보리출판사’의 협조를 얻어 이중 일부를 연재한다. <동백꽃지다>는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1일부터 6월 말 까지 전시되고 있다. / 편집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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