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양도 기행 ②] 비양봉을 둘러싼 독특한 자연 환경
비양봉은 한림항 서쪽 4.5km 지점에서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오름인데, 그 오름이 인근 육지와 떨어져 바다 위에 있으니 사람들은 비양도라 부른다. 그리고 그 비양봉에 의지해서 오름 자락에 형성된 마을이 비양리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중국 송나라 호종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비양도 인근에서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한라산신의 아우가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 때에 송나라 호종단이 와서 이 땅(제주 섬)을 제어하고 바다에 떠서 돌아가는 데, 신(神)이 송골매로 변하여 돛대 머리에 날아올랐다.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서 호종단의 배를 쳐부수니 서쪽 지경 비양도 바위 사이에 침몰되었다. 조정에서 그 영험함을 포상하여 식읍을 내리고 광양왕으로 봉하여 해마다 향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본 읍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비양도에는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콘크리트 해안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그 둘레가 약 3.5km에 달한다. 섬에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이 해안도로를 돌기 위해서는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야 한다. 걸어서 섬을 한 바퀴 둘러볼 경우 성인의 걸음으로 1시간이면 족하다.
이 연못 안에는 황근, 갯잔디, 갯질경이, 해녀콩 등의 식물과 갯고동, 기수갈고동, 댕가리, 소금쟁이, 방개 등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연못의 주변 오름 능선에는 해송, 대나무, 억새, 띠, 돌가시나무, 구기자나무, 순비기나무, 갯하늘지기 등이 왕성하게 자생하고 있다.
펄랑못은 갯뻘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이 마을 주민들은 이 연못의 뻘을 퍼다가 마당을 다지거나 벽을 쌓을 때 시멘트 대신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 연못과 바닷물이 직접 소통할 때는 이곳에 장어, 새우, 망둥이 등 물고기들도 많이 서식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은 어릴 때 이 연못에서 수영을 배우고 나서야 바다에서 수영을 할 수 있었다.
펄랑못 주변으로는 갈색 나무를 재료로 한 산책로 964m가 정비되어 있다. 휴식을 취하면서 연못 주변의 식생을 관찰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설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섬은 목종 10년(1007년)에 '산이 바다에서 솟아나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화산활동은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로인해 이 섬에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은 특이한 화산분출물들이 발견된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섬의 북쪽 해변에 이르면 현무암 대지 위에 형성된 독특한 화산암괴들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돌공원이라 한다.
이 주변에는 '애기업은돌' 외에도 이와 외형이 이렇게 단조롭지 못한 돌들이 많은데, 이는 이 바위가 생성될 당시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점성이 높은 용암이 분출되는 과정에서 겉면에서는 용암이 계속 흘러내리며 냉각되고, 가운데서는 내부압력에 의해 계속 위로 분출되면서 길쭉하고 표면 구조가 독특한 바위가 형성된 것이다.
좁은 틈으로 용암을 분출시키는 것은 마치 산모가 난산의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 출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의 과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돌공원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작은 섬이 보인다. 그 모양이 마치 코끼리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코끼리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조간대 하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만조 시에는 작은 섬이지만 간조가 되면 걸어서 닿을 수 있게 된다.
비양도 해안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을회관 앞에 이른다. 마을회관 뒤로 좁은 돌담길이 있는데, 비양봉에 오르는 산책로가 시작되는 길이다. 해안 산책로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서 운치가 반감되는 반면, 비양봉 산책로는 흙을 드러내고 주변 띠풀이 그대로 자라고 있어서 자연의 멋이 한결 더 피부에 와 닿는다.
비양봉 중턱에 오를 무렵 바다 건너 협재해수욕장과 금릉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비양봉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양봉 정상에는 오래된 등대가 있어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오래 전 제주 사람들을 수탈했던 외세가 끊임없이 이곳을 들락거렸지만 그래도 등대는 말없이 지나는 배를 향해 비양도의 존재를 드러낸다.
한편 비양도에는 2차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파놓은 수많은 진지동굴이 있었다. 하지만 비양봉의 지층이 형성된 지 오래되지 않아 계속해서 압축과 고결 등의 안정화과정을 진행하면서 대부분 진지동굴이 저절로 메워져 그 자취가 없어졌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에는 비양도 주민들의 생활을 소개하겠습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