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집 마당은 '노천카페', 스트레스는 '윷가락'에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설렘과 스트레스가 교차합니다. 사실 추석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여인들에게는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지요. 우리 가족은 추석을 서울에서 지냅니다. 하지만 올해는 연휴도 짧고, 주머니 사정도 넉넉치 못해 상경을 포기하고 종가집에서 추석을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 ⓒ김강임

# 명절날 역할분담, 며느리들 룰랄라~

명절날의 종가집은 올레까지 고소한 냄새와 웃음소리가 새어나갑니다. 종가집이다 보니 음식 준비할 사람들도 많지만, 추석 음식을 먹을 입도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부엌일도 많을 수밖에요. 하지만 명절날 역할은 철저하게 분담이 되어 있습니다. 송편 빚고, 전 부치고, 허드렛일 하는 것부터 손님을 맞이까지 역할이 분담돼 있지요.

음식을 나르고, 커피를 끓이고, 과일을 깎는 일은 남자들이 맡아 합니다. 아무래도 신세대 남자 조카들은 부엌 살림에 능수능란하더군요. 과일 깎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예전 같으면 남자들이 커피 끓이고 과일 깎는다고 어르신들께서 야단을 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가집도 처음부터 역할분담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집안 행사만 돌아오면 여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엌때기였지요. '남자들이 부엌에 드나들면 체면 깎인다'하여 양반 행사도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어요. 그렇다보니 명절이라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만 지내야 하는 며느리들도 룰랄라- 조금은 숨통이 트입니다.

# 보송보송 잔디는 안락의자, 멍석 위 웰빙차

종가집은 제주시 근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가집은 잘 지은 궁궐 같은 집도 아니고, 값어치 있는 부잣집 또한 아닙니다. 그저 200여 평 되는 땅에 허름한 집 두 채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종가집에서 탐나는 것은 마당에 깔려 있는 파란 잔디입니다. 그 이유는 보송보송한 잔디는 여느 값비싼 의자보다 더 안락함을 제공하니까요.

명절날이 되면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여든 친척들만 해도 수를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나이어린 삼촌, 멀리서 달려온 조카들. 90을 넘기신 어르신들이 모여드는 종가집은 전 세대가 다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후식은 종가집 마당 잔디밭에서 펼쳐집니다. 후식이라야 뭐 변변한 것은 아니죠. 말 그대로 웰빙입니다. 형님이 손수 담근 술과 과일, 각종 차에 이르기까지 시골에서 수확한 것들입니다. 여름장마에도 잘 견뎌낸 복분자주는 빨갛게 가을 색깔을 연출합니다. 가족들을 위해 고이 간직해 놓은 참외며 수박, 오이도 무공해지요. 

계피차, 솔잎차, 둥굴레 차. 차 종류도 각양각색입니다. 차를 마시노라면 노천카페에 온 것은 같은 기분이 들지요. 고상한 음악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값나는 탁자와 안락한 소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잔디밭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찻잔을 돌리다 보면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 떠가고, 고추잠자리 맴도는 텃밭, 정원에는 갖가지 야생화와 가을꽃들이 만발해 있으니 그야말로 노천카페지요.

# 세대 간 격차 허무는 윷놀이 
  

▲ 매년 종가집 명절 절정은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세대 간 격차를 허물고 진행하는 게임입니다. 게임은 우리 조상들 대대로 내려왔던 윷놀이가 전부입니다.
 
매년 종가집 명절 절정은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세대 간 격차를 허물고 진행하는 게임입니다. 게임은 우리 조상들 대대로 내려왔던 윷놀이가 전부입니다.

종가집 아주버님께서 만든 윷가락은 윤노리나무로 만듭니다. 멍석에 그려진 윷판은 조카들이 그리지요. 게임은 무엇보다 승부지요. 편을 짤 때는 긴급회의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게임은 불공평해서는 안 되니까요. 해마다 진행되는 게임은 형님 편과 아우 편. 그런데 두편에  딸린 식구들이 많다 보니 예선전을 치르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립니다.

윷을 던지는 초등학교 조카 녀석은 신바람이 납니다. 도시 성냥갑 속에 살다 모처럼 시골바람 쐴 수 있으니 날아갈 듯하겠지요. 처음에는 어떻게 던지는 줄 몰라 멍석바깥으로 나갔으니 낙석이라 하네요.

가장 윷을 잘 던지는 종가집 아주버님 윷가락은 모 아니면 윷입니다. 그 던지는 폼도 아주 근사하구요. 윷가락을 놓는 사람, 심판을 보는 사람, 훈수를 하는 사람, 종가집 마당 잔디밭은 왁자지껄합니다. 이때 게임에서 모은 성금은 모두 집안행사 비용으로 보태기도 하죠.

# 가족들 정 알알이 묻은 윷가락에 스트레스 날려

윷가락을 잘못 던지면 어떤가요? 멍석 아래로 낙석이 되면 어떤가요? 잔디 밭 위에서 그저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면 그만인 걸요.

올해도 어김없이 윤노리나무를 깎고 계실 종가집 어르신, 삼촌을 이겨보겠다고 벼르는 조카들, 아마 지금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가위 보름달이 뜨고 있을 것입니다. 명절날 종가집에서 먹는 밥이 왜 그리도 맛있는지요. 종가집의 밥은 그냥 밥이 아닙니다. 시골의 정취와 고향 냄새, 훈훈한 가족들의 정(情)이 알알이 묻어 있지요.

멍석 위에서 날리는 윷가락은 게임이 아닙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저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리는 것이지요. 아마 올 추석에도 한가위 보름달이 종가집 마당에 둥그렇게 떠오르겠지요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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