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의 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제주의 4월은 4·3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는 상처를 치유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아픈 곳을 자꾸 짓눌러 분통터지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딸 진주를 데리고 조천읍 북촌리로 답사를 갔다.
북촌리는 제주시청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동쪽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서쪽에 서우봉이라는 오름이 있는데, 이 오름을 경계로 함덕리와 맞닿아 있다.
이 바위그늘은 용암동굴의 천장부위가 함몰되어 생긴 것인데, 정면에서 보면 폭이 11m. 놓이가 2.5m, 깊이가 3m 정도에 이른다. 이 30평방미터에 이르는 공간에서 선사인들이 생활했던 것이다.
이 바위그늘이 발견된 것은 1973년의 일이다. 1986년에 이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 갈판, 갈돌, 공이, 숫들, 돌도끼 등의 석기유물과, 점렬문토기, 겹아가리토기, 어골문토기 등의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북촌리 지경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4·3당시 마을에 보관중인 모든 기록물들이 소각되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마을 해안에는 옛 성토의 흔적이 500m 정도 남아 있다. 삼별초군이 제주로 들어오기 전후로 쌓은 환해장성이다. 이 성은 처음에는 삼별초의 탐라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관군이 쌓았는데, 나중에 탐라를 장악한 삼별초군이 계속 쌓았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서우봉을 '서산'이라고, 서우봉에 있는 봉수를 '서산봉수'라고 표기되어 있다. 서우봉은 북촌리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이므로, '서산'이란 지명은 북촌리의 입장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산'이란 지명이 만들어질 당시 북촌리 일대에 사람이 모여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문헌에는 이 마을의 포구를 '북포(北浦)'라고, 마을의 이름을 '북포리(北浦理)'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북촌리(北村理)'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참극은 세화에 주둔하던 제2연대 3대대 일부병력이 함덕으로 이동하던 중 북촌 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기습으로 군인 두 명이 사망하자 흥분한 군인들이 하루아침에 북촌리를 유령의 마을로 만든 것이다. 북촌리 참극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에 잘 그려져 있다.
북촌리 서쪽 너븐숭이 지역에는 당시 참극으로 목숨을 잃은 주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위령비와 기념관 등이 세워져 있다.
"우리 마을을 지금 이만큼이라도 살만 하게 만든 것은 모두 어머니들의 노고 덕택입니다. 우리 북촌리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들입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면 우리 어머니들의 업적을 기리는 '어머니 상(像)'을 마을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바다에 기대에 어업으로 종사하기도 하고, 귤과 마늘 등 농업에 종사하기도 하면서 삶을 지탱한다. <계속>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