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은 지금 ⑮] 한-아세안 정상회담에 가린 제주 해군기지 건설

지난 5월말을 전후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김태환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운동이 마치 '국책사업 발목잡기'를 위한 활동인 것처럼 보도했다. 두 신문은 현재의 주민소환운동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것으로 규정하며, 김태환 지사 구하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 6월 1, 2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한-아세안 정상회담이 열렸다. 아세안 각국 정상들이 제주로 모여들면서 회의 준비를 진두지휘한 김태환 지사는 자연스레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라는 거대 신문의 지원을 받기도 했고, 정부와 협조해 거대행사도 잘 마무리했기 때문에 최근 며칠이 김태환 지사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부풀어 오른 김 지사의 마음을 더 추켜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청와대는 지원사격까지 아끼지 않았다.

지난 6월 2일 한-아세안 정상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청와대 대변인실에서 발표한 브리핑 내용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일 한-아세안 제주 특별정상회의를 마무리하면서 "제주도민이 힘을 모아준 덕분에 한-아세안 제주 특별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제주도는 이번 국제행사를 통해 세계적 명승지가 될 기회를 얻었다"며 "제주도 발전을 정부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2014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들어설 예정인 '민(民)·군(軍) 복합형 해군항'(해군기지)을 거론하면서 "국가안보에 중요한 사업일 뿐 아니라 제주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복합시설"이라며 "범정부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해군항은 정부 국책 사업으로 제주 관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므로 제주 도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관광미항 기능을 갖춘 제주 해군항은 53만㎡(16만평) 규모이며 15만t급 크루즈 선박 2척이 접안할 수 있는 해양공원 및 휴양지로 개발될 예정입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발췌

발표시점이 한-아세안 정상회담을 마무리하는 날임을 감안하면, 청와대에서 내놓은 브리핑은 국제회의를 성공리에 개최할 수 있게 협조해준 제주도민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브리핑 전문 중에 도민들의 협조에 대해 고맙다는 뜻을 전하는 내용은 첫 문단 일부에 국한되어 있다. 그 나머지는 모두 해군기지 건설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궁지에 내몰린 김태환 지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발표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브리핑에서 필자의 주목을 끄는 것은 '민(民)·군(軍) 복합형 해군항(해군기지)'이라는 명칭이다. 정부와 제주특별자치도는 지난 4월 27일 제주도에 건설 예정인 해군기지 사업과 관련하여 기본 협약서를 작성하면서, 그 공식 명칭을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 정했다.

그런데 협약서가 체결된 지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청와대는 대변인 브리핑에서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대신에 '민(民)·군(軍) 복합형 해군항(해군기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 개념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해군기지로 인해 해당 마을 주민들이 2년째 생업을 포기한 채 울부짖어 왔는데, 청와대는 관심도 제대로 기울지 않고 대충 정책을 발표하고 넘어가려 하고 있다. 정상회담을 전후로 대통령이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던 강정마을 주민들에겐 대변인 브리핑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다.

한- 아세안 정상회담이 열렸던 제주국제컨벤션센터는 강정마을에서 거리가 5Km 정도다. 서귀포 경찰서는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정마을 주민들이 혹시 회의장 주변에서 돌출 행동을 자행하지나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실제로 강정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도 각국 정상들이 지나가게 될 '평화로' 변에서 피켓시위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을회는 내부논의를 거쳐 지난 5월 24일 '정상회의 기간 내에 해군기지와 관련한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자제하겠다'고 천명했다. 강정마을회의의 이런 결정에 대해 서귀포경찰서가 반색한 것은 물론이고 제주 지역 언론들도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주민들은 국제회의가 끝날 때까지 회의에 방해가 될 일체의 행위를 자제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주민들이 2년간 줄기차게 요구해온 문제점의 재검토에 대해서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김태환 지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대변인 브리핑만 남기고 떠났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강정마을회는 "해군기지 추진과정의 문제점, 해당 마을주민의 반대, 주민갈등문제, 최악의 장소, 도민들의 여론 등을 청와대에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함을 재차 확인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 1인 시위 강정마을 주민이 제주도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다. 지난 2007년 제주도가 강정마을 해안을 해군기지 예정지로 결정한 이후, 마을 주민들이 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며 2년 넘게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 장태욱
 

김태환 지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선 사람들이 또 있다. 전직 제주도지사, 제주대 총장, 교육감, 법조인, 의사회, 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모여 만든 '곰솔회'라는 단체다.

곰솔회 회원들은 지난 6월 5일 오전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도지사 소환 서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회견문을 발표했다.

최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과 관련해 강정마을 주민과 일부 시민단체의 도지사 소환서명운동을 지켜보면서 … 말을 아껴왔습니다. 섣불리 얘기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왜 강정에 들어서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해군기지 입지가 화순에서 위미- 강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봐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썩 매끄럽지 않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점 제주도에서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문제가 도지사 소환서명까지 해야 할  문제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도지사 소환 서명은 갈등을 확산시킬 뿐입니다. 주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갈등은 봉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민투표로 누가 이기든 패자에게는 영원한 아픔을 남길 것입니다. 제주도 또한 지금이라도 진지한 자세로 반대 주민과 대화를 나누길 바랍니다. 대화를 하면 해결책이 보일 것입니다.

'곰솔회'의 주장을 요약하면, 해군기지 부지 선정과정에서 보여준 도정의 행보를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에 불복해 김 지사를 소환하겠다는 움직임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강정마을회 강동균 회장은 곰솔회가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지켜본 후, "저 양반들은 우리 마을이 이 지경에 올 때까지 뭐하다가 이제야 우려를 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진짜 민초들이 필요로 할 때는 숨죽이고 있다가 궁지에 몰린 권력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니까 나서서 부패한 권력을 두둔하는 것이라"며 섭섭함을 표시했다.

한편, 지난 4일에 이만의 환경부 장관은 "해군기지를 짓는다고 산호가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는다"며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 강정마을 해안에 있는 연산호 군락지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우려를 일축하고 나섰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주민소환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친 직후, 중립적인 자세로 가치판단을 해야 할 정부, 혹은 비정부 주체들이 두 신문에 부응하는 행보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안보', '국익' 혹은 '경제발전' 등을 명분으로 수많은 단체들이 이 두 신문의 요구에 화답할 것으로 예상된다. 거대신문의 가세로 주민소환운동이 정말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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