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글로벌아카데미] 한국인 '힐러리 클린턴'을 꿈꾸는 서진규 박사의 '희망 이야기'

서진규 씨의 강연은 특별했다. 그 특별함은 강연이 끝나고난 뒤  더 분명해 졌다.

그녀가 섰던 강단 주위로 많은 청중들이 모여 인사를 전하고 싶어했고, 사인을 받고싶어 했고, 포옹하고 싶어했다. '희망 전도사'인 그녀에게서 강한 희망 에너지를 얻고 싶다는 제스처였다.

서 씨가 일본에서 지역전문가로 활동할 때 사용했던 명함에는 "하버드 대학 졸업, 미군 소위"라고 적혀 있었다. 보수적인 일본 남자들조차 "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그녀의 현재 직책은 그녀의 인생 역정 스토리를 바탕으로 해 아우라를 띈다.

▲ 희망 전도사 서진규 박사. ⓒ이미리 기자

 

지난 4일 서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한국에서의 강연을 서귀포시에서 가졌다. C형감염의 치료차 한국에 들어와 있다 '미국의 국무장관'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간다고 밝혔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서씨의 비전이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와 서귀포시가 주최하는 '서귀포시글로벌아카데미' 스물한 번째 시간에 초청돼 서귀포시평생학습센터 강단에 섰다.

서씨는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캐디, 미국 가정집 식모, 한인식당 종업원, 미군 장교, 하버드 대학 석박사. 그녀의 굴곡 많은 인생 스토리가 엿보이는 이력 전개다.

"71년 3월 9일. 22살에 미국 가정집 식모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미국으로 갔어요. 영어는 화장실을 겨우 찾아가는 실력이었고 전재산은 100불이 다였죠. 사람들은 말합디다. 그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어려운 것을 혼자 다 하고 대단하다. 말해요. 하지만 미국에서의 고통은 한국에서 받는 고통보다 덜했어요. 한국이 어떤 역경이 와도 나를 쓰러지지 않게끔 훈련을 시켜줬거든요."

 

▲ 서진규 씨의 굴곡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수강자들. ⓒ이미리 기자

 

그녀가 22살에 미국으로 떠난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서가 아니라 '가장 쉽게 죽는 방법'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시 가발공장 여공으로 일하며 삶을 비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꿈을 가져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미국 가정집 식모를 보고 미국행을 택한 한국 여자들은 현지에서 납치돼 매춘부로 전락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녀는 자살대신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부모의 만류를 제치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탔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대로 된 진짜 식모 자리였다. 삶이 기회를 한 번 더 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식모 자리는 이미 남미 출신의 다른 외국인이 일하고 있었다. 가난한 아버지가 꼬깃꼬깃 모아준 100불 중 25불을 하룻밤 여관비로 쓰자 앞 길이 막막해졌다.

"100불이 전 재산인데 하룻밤이 25불인 거예요. 그래도 서진규는 쓰러지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하도 강인하게 키워놨거든요(웃음). 미국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후 서씨 특유의 부드러운 표정과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미국 한인 최고의 식당인 아리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비싼 식당으로 소문난 곳으로 팁도 가장 많이 주는 곳이었다. 서씨는 악착같이 일해 한달에 1천불을 벌었다. 이 돈으로 빚도 갚고, 집에 용돈도 보냈다.

서씨는 비록 가발공장 여공이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만해도 꿈이 '박사'였다. 공부도 곧잘 잘해. 여자는 초등학교 졸업 후 시집이나 가야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을 접게 하고 중.고등학교를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하기도 했다.

미국생활에서 돈이 생기자 꿈에 그리던 '박사'가 되기 위한 미국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낮에는 유학생활, 저녁엔 식당에서 일했다. 돈이 많으니까 집에 용돈도 보냈다. 그러자 효녀로 소문이 났다. 일도 잘했다. 게다가 얼굴도 예쁘니 인기짱이 됐다."

그런 서씨에게 프로포즈가 끊이지 않았다. 외교관, 재벌아들 등 멋진 남자들의 고백이 이어졌지만 서씨는 사랑을 택했다.

"다들 '니가 아깝다'며 말리는 사람이었어요. 합기도 시합차 잠시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었고, 영어도 몰라, 다른 기술도 없어, 결혼도 안 한 사람이 딸까지 있었죠. 사랑에 빠지니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결국 결혼을 해서 지금의 딸이 태어났어요."

또 다른 시련은 이때부터 찾아왔다. 남편의 폭력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남녀의 사랑은 언젠가 식는다는 거더라고요. 마누라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지금 있는 금니도 당시 남편의 폭력으로 없어진 이빨에 만든 것입니다."

 

▲ 열정적인 서진규 씨의 강연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이미리 기자

 

이런 심각한 얘기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서씨였다.

"아무튼 엄청 매를 맞았어요. 그런데 저는 창의력과 혁신적인 생각이 뛰어나서 매를 맞으면서도 이왕 맞을 바에 덜 아프게 맞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자세를 바꿔 맞아봤어요. 실제로 안 아픈 자세가 있더군요. 상대방의 주먹이 내 피부에 닿기 0.1초 전에 온 몸의 힘을 빼는 거예요. 그럼 오른쪽에서 치면 왼쪽으로 밀려가고 왼쪽에서 치면 오른쪽에서 밀려나고 정말 아프지 않아요. 안 믿기시면 여기계신 두사람씩 짝지어서 한 번 해볼까요?"

뼈아픈 기억도 밝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서씨는 당시 남편에 대한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와 증오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 남편에게 맞는 것보다 자신이 더 두려워 졌다고 한다.

"그렇게 아프지 않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몸은 안 아픈데 자존심은 많이 다쳤죠. 복수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꾸 죽이는 장면이 떠올랐어요. 상상력이 비전이예요. 박사가 되는 꿈을 꾸다보면 박사가 되는 것처럼 살인 장면도 자꾸 머릿속에서 보다보면 이뤄져요. 내가 두려웠어요. 이 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은 모성애였어요. 스스로에게 '아기의 미래, 니가 보여주려는 아이의 미래를 맞바꿀 정도로 그 남자가 위대한 사람이냐'라고 다그쳤죠. 결론은 물론 '아니다'였죠."

그녀는 살인마가 되지 않기 위해 미군에 자원 입대했다. 군대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 ⓒ이미리 기자
"10살이나 어린 사람들 사이에서 군대 전체에서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고 키도 제일 작았죠. 가장 외소했고요. 미군은 자원이어서 실력 없는 자들은 솎아서 쫓아내요. 제가 체력이 약해서 군인 자질도 없고 약하다고 쫓아내려 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여러번 왔지만 서진규는 자기 암시를 했죠. '너는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기획도 없이 쓰러져 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내가 일으켜 세울 것이다'"

 

결국 서씨는 200명 중 1등으로 졸업을 했다. 장교로 졸업해 32살에는 소위로 임관했다. 이때도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했다. 미군생활 중에서는 항상 인정받는 상관들이 저를 뺏어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시킨 일만 한게 아니고 저에게 주어진 일은 연구하고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냈거든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나와 이 일이 어떤 관련이 있나 생각을 하면서 창의력과 혁신적인 생각을 포함해 일을 해냈죠."

항상 도전할 곳을 찾는 서씨는 미군의 '지역전문가' 프로그램 지원을 준비했다. 지역전문가 프로그램은 지역으로 4년간 파견 나가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군인 외교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원 자격에 문제가 생겼다. 서씨가 지원하려는 일본은 보수적인 사회여서 그 나라의 식민지였던 한국 출신의 여자는 지원할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지역 전문가로 여자를 뽑아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는 '미국 아닙니까'. 돌아오는 답이 '미국은 평등하지만 상대방은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있는 한국과 일본이다. 협상 당사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여자를 뽑겠나. 일본 남자들이 당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나. 개인의 꿈이 미군에 나라에 손해를 가지고 올 수 있다.'였다."

문제에 봉착하면 서씨는 창의력과 혁신적인 생각을 총 동원한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창의력과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같은 문제를 봤을 때 지금까지의 최고의 생각보다 더 뛰어난 생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만약 대처 수상이 한국에 왔다 일본에 왔다. 대처에게 당신 여자니까 같이 일할 수 없소라고 말하는 줄 아나. 거기 남자들이 그렇게 멍청한 줄 아냐. 그들에게도 애국심이 있다. 그까짓 상대가 여자, 흑인이라면 어떻겟나. 그게 문제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지요. 그 나라가 그 사람의 장난감이 아닌가."

"영국 대처 수상은 대단해. 한국의 대통령이 그 여자 대우하는 그 이유는 그 여자가 위대함이 아닌 그 여자 뒤에서 밀어주는 막강한 영국의 힘이다. 영국보다 더 대단한 미국은 무엇이 두렵습니까. 왜 주저합니까. 해봐씨습니다. 미국이 더도 덜도 말고, 남자 장교들 밀 듯이 독같이 해봐라"

바로 뒷날 미군이 자기 결정을 번복시킨다. 이로서 서박사 미래의 확실한 전환기를 맞는다. 앞으로의 군인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하버드 학위가 필요해 하버드 석사에 도전했다. 하버드 도전에 대해서도 그녀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얘기한다.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버드가 필요했을 뿐이었어요. 하버드가 마지막 목표였다면 히말라야 산처럼 보여서 도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는 엄청난 사명을 띄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지역전문가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제 뒤의 우수한 여군장교의 길이 막힌다고 생각했죠. 이를 완성하는 데 하버드는 하나의 필요한 도구였죠. 내 마음가짐이 바뀌니 하버드가 안 두렵더군요."

 

▲ ⓒ이미리 기자

 

그녀는 결국 하버드 석사학위를 따고, 2006년도에는 박사학위도 땄다. 그녀의 딸이 하버드에 입학 ROTC로 활동한 것도 미국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제가 하버드를 졸업하니까 딸도 하버드에 마음을 두고 하버드를 졸업했어요. 당시 클린턴 대통령에게 상을 받기도 했죠. 20년전 없던 문과 길로 만든 그 길로 딸이 시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가난한 '가발공장 여공'의 경력이 축복이라고 강조한다.

"서진규가 대한민국이 길을 열어주려고 하지 않던 가난한 딸이었다. 그 장면에서 쓰러졌다면 하버드, 딸이 미국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것 그것을 따는 게 가능하겠냐. 나의 다음 목표는 국무장관이다. 지역 전문가는 군대 외교일을 보는 것이다. 국무장관 되는 데 경력이 되기도 한다. 이때 딸을 참모장, 보좌관으로 할 것. 작전하는 데 직접 투입시켜 경력을 쌓을 기회 줄 것. 나중에 미국 국무장관 되는 것은 쉽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시대 20년 후 우리 딸이 대통령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

 

▲ 기립박수로 강연이 마무리됐다. 수강생들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이미리 기자

 

그녀의 꿈은 거창한듯 보이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가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나'에서 온다고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를 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이 가여운 나를 모두 짓밟게 하나. 자기를 구제할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내가 잘 되니까 자식도 잘된다. 세계 평화가 온다. 자기 자신을 아끼라. 사랑하라. 존경하라. 남들이 나를 짓밟을 때 나라도 나를 지킨다 용기를 줘라. 이왕 사는 삶, 죽을 때 무서워요 안돼요 보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죽음의 기회도 한번 뿐이다. 당당하게 멋있게 떠나라. 나는 죽음 전까지 살아있다. 삶의 기회도 단 한번 뿐이다. 다시는 오지 않는 기회다. 이왕이면 보람있게 멋지게 살다가라."

서씨는 그녀의 희망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르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객석은 기립박수로 그에 호응했고, 많은 이들이 그 자리를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 ⓒ이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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