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강창보 선생 투쟁사(3)

▲ 제주 야체이카 조직원의 검거 사실을 보도한 1933년 2월 8일 동아일보 신문 기사.
당 핵심이 조직되면서 세화리, 하도리, 연평리, 종달리에서 세칭 해녀사건이라고 불리는 반일투쟁이 일어나서 일제 경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동원된 인원수가 천여 명 이상에 달하였으며 제주도 역사에서는 처음 보는 해녀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무장봉기였다.

이에 대해 일제 경찰은 공포를 느끼며 구좌면 일대의 사회주의자 연평리의 신재홍, 하도리의 오문규(吳文奎), 세화리의 문도배(文道培, 주 : 2003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서훈됨) 등을 검거하였고, 드디어 검거 선풍은 전도를 석권하였는 바 마침내 강창보 선생을 위시하여 이익우, 오대진 등 수십 명에 달하는 피검자를 내었다.

이로 인해 당 세포 조직이 탄로되었고 피검된 당 세포 책임자인 강 선생은 성내(주 : 제주읍) 유치장에서 탈출하는 기극(奇劇)을 연출하였다. 강 선생의 탈출 경로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 성내 유치장은 이 사건 피검자로 초만원이 되어 분리 수용할 감방이 없었기 때문에 임기응변책으로 목욕탕을 조급히 개조한 독방에 수용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이 선생의 탈출을 용이하게 하여 밤에 간수가 잠자는 틈을 타서 드디어 탈옥에 성공하였다. 탈출과 즉시 산길을 횡단하여 산간부락에 거주하는 사돈집에 들려 옷을 빌어 갈아입고 목장에 다니는 농부로 변장하여 서귀포로 향하였다.

 
▲ 제주시 용강동에 모셔진 강창보 선생의 무덤
서귀포에 이르러 이원삼(李元三·李道伯의 부친)의 헌신적 동지애의 원호를 받아 마루방 밑에 지하방호를 파서 잠복하여 그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제주도를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제주도통항조합(金文準)을 중심으로 하는 재대판(大阪) 사회주의운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운영하는 제주-대판 간 운항하는 복목환(伏木丸) 선장 강병희<姜炳喜>와 연락이 되어 강 선생을 죽농(竹籠· 대구덕)에 넣어서 한 개의 짐짝으로 만들어서 그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복목환 선창까지 옮기는 데 성공, 탈출에 성공하였다.

선생의 탈출은 복목환 선장 강병희의 대담성과 용기와 동지애의 산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애에 불타는 선원들의 협조정신과 연대감이 없었다면 실패하였을 것이다. 대판항까지 무사히 도착한 선생은 일본 옷 소위 「유가다」를 입고 「게다」(일본인이 신는 신)를 신고 무사히 대판항을 빠져나와 대판의 여러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동경까지 잠행하였으니 일생일대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동경에 도착한 선생은 송성철(宋性徹, 주 : 제주시 출신으로 훗날 몽양 여운형의 사위가 됨), 김여환(金汝煥)의 비호 밑에 안주의 거처를 얻은 셈이다. 공병 수집 등을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는 한편 또다시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당시의 동료로서는 조선신문 책임자인 이철(李哲), 해방 후 일본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한 김천해(金天海), 박사철(朴思哲)들이었다.

이 시기는 일본 군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하기 위하여 인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조선인에 대하여서는 단말마적 탄압을 자행하던 때였다. 위에 언급한 이철의 아들이 1942년에 경계가 삼엄한 국경선 열차 속에서 피검되어 자기 부친 이철이와 서울의 김(金)상과의 친밀한 관계가 탄로되었다(선생은 동경으로 망명한 후에 주위의 동료들은 ‘서울의 김상’이라는 통명으로 불렀다).

이 사실을 탐지한 함경북도 경찰부는 즉시 동경으로 경찰관을 급파하여 서울의 김상(강창보 선생)을 체포해서 함경북도 경성으로 압송하였다. 선생은 몇 년 동안 전국 수배를 당하고 있었는데 서울 김상이 다름 아닌 강창보라는 사실은 당시 함경남도 경찰 특고로 근무하고 있던 제주도 출신 김석묵(金錫黙, 주 : 제주도 출신 중 대표적인 친일 특고형사)의 입증에 의해서 확인되어 버렸다.

이로써 10여 년 간의 망명 생활도 드디어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과거의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꼬리를 물고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고 있던 시기에 선생은 단호히 전향을 거부하였으므로 7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영양실조로 1945년 1월 3일 43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험난한 일생을 옥중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전쟁 말기인 그때의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일제는 수인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데 조금도 서슴지 않았다.

 

▲ 추모기념비 앞에 선 고성화 선생과 강창거 선생의 딸 강영원 씨
불운한 선생에게는 사후에도 불행이 뒤를 이었다. 일제하의 군부는 모든 교통과 운송수단을 박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체를 운반할 수가 없어 고육지책으로 볏짚을 만재(滿載)하고 그 속에 시체를 숨겨서 눈이 쌓인 만경평야를 지나 험난한 장성 고개를 넘어서 비로소 제주도에 안장되었다.

시기가 시기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신념을 같이하고 죽음을 맹서한 옛 동지들이 불참한 가운데 쓸쓸하게 거행되었다.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고 민족의 번영과 겨레의 행복을 위하여 일신의 부귀영화를 돌보지 않고 오직 혁명전선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다가 희생당한 공산주의자의 말로는 당시의 사정으로도 아프다.

1986년 강창거

(끝)

※ 이 글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강창보 선생의 민족운동 일대기를 그의 동생 강창거 선생이 기록한 것이다. 강창거(姜昌擧) 선생은 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재학 때 동맹휴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최근 제주를 방문한 딸 강영원 씨에 의하면 작년 11월 17일 타계하였다고 한다. 이 육필 자료를 소장 중이던 고성화 선생(강창보 선생의 후배)이 공적서를 제출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올해 강창보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음을 밝혀둔다. (주석 : 박찬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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