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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접어들면서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제대로 알자는 붐이 일어, 성대중의 <일본록(日本錄)>, 원중거의 <화국지(和國志)> 등 일본과 관련된 책들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독선과 아집에 빠져있던 조선 선비들이 일본에 마음을 열게 된 배경에는 정운경의 저서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이 있었다.

정운경은 1699년 생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녕을 따라 1731년 9월 제주에 건너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배와 함께 일본, 대만, 베트남 등지로 떠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탐라문견록'은 정운경이 표류에서 돌아온 14명을 인터뷰해서 이들의 흥미진진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익, 박지원, 서유구, 황윤석, 유만주, 이규경 등 18세기 쟁쟁한 지식인들이 자신의 독서목록에 이 책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탐라문견록>은 폭넓게 애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일에서였는지 이 책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다만 연암 박지원이 <삼한총서(三韓叢書)>에 포함시키기 위해 원고지에 옮겨 적은 필사본이 단국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었을 뿐이다.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휴머니스트, 2008)>은 역자 정민이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지식경영'을 연구하던 중, 단국대본 <탐라문견록>를 접하고 난 뒤,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소중한 저술이 역자를 통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탐라문견록'에 최초로 소개된 표류인은 조천관 주민 고상영이다. 그는 1687년에 글을 배우려고 김대황의 진상선에 편승해서 대둔사로 향하던 중 추자도 근해에서 풍랑에 휩쓸려 한 달 간 표류한 끝에 안남국(베트남) 회안군 명덕부에 표착했다. 고상영 일행은 조선에 도착하면 1인당 쌀 30섬씩 주는 조건으로 중국 상인의 배를 얻어 타고 제주도 대정현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운경이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 들어간 시기는 고상영이 돌아온 지 45년이 지난 뒤였다. 이런 경우 저자의 인터뷰에 응하는 표류인들은 오래전 일을 증언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4번째로 기록된 관노 '우빈' 일행은 일본에서 집성촌에서 생활하는 조선인 후손들을 만나기도 했다.

'우빈'은 1679년 10월에 관가의 무역을 위해 출항했다가 풍랑을 만나 5-6일을 표류한 끝에 일본의 취방도(翠芳島)에 도착했다. 그 나라 관리가 우빈 일행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자 그들은 "조선의 나주 사람"이라고 답을 했다.

우빈 일행은 이듬해 4월에 산천포(山川浦)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통사(통역관)는 자신들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와서 살게 된 사연을 늘어놓았다.

"내 할아버지는 본래 경상도에 거주하던 백성이었다. 임진년 난리 때 포로로 왔다. 같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아주 많아 한 곳에서 함께 살았다. 도망갈까 봐 염려하여 나가서 장사하지 못하게 하고, 도자기 빚는 것만 허락하여 먹고 살게 했다."

일본에서 조선인들끼리 해후하는 일은 이기득의 표류기에서도 소개된다. 이기득은 조천관 백성이었는데, 1723년에 상인 20여 명과 함께 출항했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 오도(五島)의 수라도(手羅島)에 표착했다.

▲ 장기도(나가사키) 전경 당시 나가사키 항을 그린 그림이다.
ⓒ 휴머니스트

이들은 그곳에서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상선의 안내를 따라 장기도에 도착했다. 장기도에 배를 대자 관원의 안내로 조선에서 온 김시위 일행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 역시 제주에서 온 표류인들이었다. 이기득과 김시위 일행의 만남으로 인해 이국땅에서 부자간에 상봉하는 눈물겨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시위는 자신을 영광사람이라 적었고, 이기득은 나주사람이라 적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제주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길 극도로 두려워하였다.

당시 장기도(나가사키)는 동아시아와 네덜란드 등 각국에서 온 상선들이 드나드는 국제항이었다. 장기도에서 이기득 일행은 아란타(네덜란드) 상선을 직접 보고는 그 웅장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 네덜란드 상선 당시 네덜란드 상선을 그린 그림이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제주인들은 네덜란드 배의 웅장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휴머니스트

김일남·부차웅의 유구국(과거 오키나와에 있었던 왕국) 표류기는 유구국의 도성에서 70-80일 동안 머물면서 체험한 이 나라 문물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들에 눈에 비친 유구국은 유토피아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들은 물건을 팔려고 배를 출항했다가 추자도를 지나면서 풍랑에 휩쓸려 표류 끝에 유구국에 표착했다. 처음에 이들은 현지 주민과 한자를 통해 의사를 교환했다. 이들은 유구국 조정의 지시에 의해 국도로 이송되었고, 그곳 관사에서 집단으로 수용생활하면서 유구국의 문물을 두루 체험할 수 있었다.

"벼와 곡식이 풍족하여 천민도 굶주리지 않는다. 풍속이 도둑질하지 않는다. 혹 작은 죄가 있으면 대나무를 쪼개서 작대기를 만든다. 형벌은 아프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하자는 데 있다."

당시는 조선에 고구마가 도입되기 이전이었다. 이들은 유구에서 생전 처음으로 맛본 고구마를 소개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덩굴로 자라는 채소가 있는데, 한 번 덩굴로 지면 무성하게 몇 이랑씩 뻗어나간다. … 맛은 달고 물러 사람이 먹기에 좋다. 반드시 껍질을 벗겨 쪄서 먹으며, 끼니를 대신한다. 여기저기 심는데, 덩굴 하나에는 몇 백 뿌리를 거둘 수 있어서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는다."

정운경이 소개하는 14명의 표류기에는 나름대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들이 일본, 유구국, 안남국, 대만 등 어디에 표류했던지 현지 관리들은 이들에게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최선의 배려를 다했다는 점이 한 가지이다. 이 대목에서 당시 동아시아 각국이 표류인을 대접하는 방식에 대해서 나름의 합의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표류인들이 다른 나라에 표착했을 때는 '제주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했다는 점이다. 이는 1612년 제주로 표착한 유구국 태자가 탄 상선을 제주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현 등이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 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당시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빠진 조선 관료 전반이 그러했지만 그중에서도 제주의 관료들은 특히나 더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눈이 어두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운경은 '탐라문견록' 외에도 '영해기문', '탐라기', '순해록', '해산잡지', '귤보' 등 5편의 글을 부록으로 덧붙여 <탐라문견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영해기문은 당시 남아있던 제주관련 기록들을 주제별로 편집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정운경의 저술은 아니다. '탐라기'는 1723년 정운경이 5박6일 일정으로 제주섬 전체를 일주한 과정을, '순해록'은 그가 다시 1732년에 4박5일 일정으로 제주 해안을 여행한 과정을 기록한 기행문들이다.

그리고 '해산잡지'는 제주의 풍물과 풍관에 대해 기록한 것이고, '귤보'는 당시 제주도에서 재배되던 귤의 15가지 품종의 색깔 맛 등을 구분하여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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