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로마나의 추석이야기] “올 추석엔 다들 마음이 불렀으면…”

▲ 추석을 맞아 한복매장을 찾아온 아이들 미소가 '보름달' 마냥 행복합니다. ⓒ제주의소리 김 로마나 시민기자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나서, 내내 병든 닭처럼  맥을 못 추고 골골거렸습니다. 열 아홉의 추석과 스물의 추석이 이렇게나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절에 대한 기대감이나 설렘은 원래부터 그다지 없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온 명절은 처음입니다. 어쩌면 이번 명절이 주말을 끼고 있어서 그럴 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면 생전 처음 해 보는 단기 아르바이트에 혼이 쏙 빠져서 그럴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요 며칠간 마트에서 저는 선물세트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PC니, EE니, AP니 하는 브랜드의 양말 선물 세트를 간이매대에 진열해 놓고, 손님이 오시면 '이 제품은', '저 제품은' 해 가며 설명하고 판매하는 것이 제 일이지요. 오후 두 시 부터 열 한시까지 매장에 서 있자면 온갖 양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제가 무슨 양말을 판매하고 있는 지 도통 알 수가 없어집니다. 그럴 때면 친구들과 농담삼아 하던 온갖 말들이 허공을 맴돌곤 합니다. '아, 빌어먹을 한탕주의.' 한번 거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고 그 이후 한참이나 잉여한 나날을 보내는 '한 탕 족'의 선구자이다 보니 아르바이트 계의 비인외도라는 단기 아르바이트 언저리까지 서성이게 된 것이지요.

단기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계의 비인외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고작해야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일에 적응이 되면 얼마나 되고 파악이 되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요. 일반적인 아르바이트에서 주어지는 적응기도, 단기아르바이트에서는 꿈만 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명절 아르바이트에서는요. 명절에 할 일이 어디 일이 한둘이던가요. 결국 스스로가 무얼 하는 지도 모른 채 시간은 흐르고, 마지막 날까지 눈치와 몸으로 때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단기 아르바이트생에게 바라는 것 역시 그 정도 뿐이기는 합니다. 작게는 호칭부터 크게는 사고 발생시의 대처방식까지 교육도 받지 못한 채 투입되어 어떻게든 눈치로 해나가고 있다 보면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스스로가 온 세상 천지에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모자란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 온통 새로운 것 뿐이지만, 사실 가장 새로운 것은 끈기도 근성도 바닥을 치는 제가 벌써 마지막날까지 (비교적)성실하게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익숙치 못한 일에 몸살이 나기도 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적도 몇 차례인가 있지만,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비교적)성실하게 해내는 중이니까요.

물론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해 봤을 때 저는 그다지 성실하지도 않고, 근성이 있지도 않고, 끈기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해서 이 괴로운 아르바이트를 버텨내고 있는가 살펴보자면, 사람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 따뜻하고 다정한, 혹은 냉랭한, 저마다의 이야기를 잔뜩 가지고 있는 사람들.

▲ 연세 지긋하신 할머님 한 분도 추석 차례상에 올릴 제수용품 고르기에 정성이십니다. ⓒ제주의소리 김 로마나 시민기자
추석을 맞아 대형마트를 찾는 사람이 정말,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하루종일 이리로 저리로 종종대며 뛰어다니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 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가족단위로 쇼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서 저마다 '누군가의' '무엇을' 고르느라 바쁩니다. 부모님의 속옷, 막내딸의 추석빔, 큰 딸을 위한 와인과, 둘째 아들을 위한 양말. 그렇게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니 만났다기보다는, 보았습니다. 수줍게 웃으며 선물 추천을 부탁하는 사람들과, 피로가 겹겹이 쌓인 얼굴을 하고 '무엇이든 좋으니 쇼핑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들, 마음보다 격식(으로 대변되는 상품의 가격)에 계산이 바쁜 사람들, 혹은 적은 용돈을 모아 부모님 선물을 사러 온 아이들. 타국의 명절이 멋쩍은 외국인들. 사실 보았다기보다는 엿보았다는 게 더 어울릴법한 이야기들이지만요.

제가 가장 엿보기 좋아하는 곳은 아동한복을 판매하는 매장입니다. 퉁퉁 부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니다 우연히 아동한복 매대 앞에서 한복을 시착해보고 있는 어린이의 얼굴을 만나게 된 이후부터였지요. 오른 쪽에는 펀자비드레스를 입은 엄마를, 왼 쪽에는 개량한복을 입은 아빠를 두고 드레스라도 입은 양 팽그르르 돌아보이는 모양새가 가슴이 찡할 만큼 사랑스러웠습니다. 그제서야 추석이구나, 하는 실감이 들더라고요.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며 떡도, 전도 돕지 않았는데, 그래서 추석이 오는 줄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스물이 되어,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읽게 되어서, 그래서 이번 추석은 달라졌던 모양입니다. 가슴 한편에서부터 간질간질하게 피어오르는 마음은, 기대감일지도 모르고 그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해 내내 구직활동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언니도 제주도로 온다 했고, 못 본 새 성큼 자라버렸을 동생들도 만나게 되겠지요. 강의를 들으면서 친해진 중국인 유학생은 올 해 추석이 외롭지 않답니다. 룸메이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네요. 제주도를 떠나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친구는, 옆방 친구가 명절음식을 싸 들고 오기로 했다며 기대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직접 만들지만 않는다면 명절음식이 더할나위 없이 맛 좋은 음식이라는 말이 꼭 진위판단불가적망발성농후기담인것만은 아니니까요.

장을 보며 '명절은 애들이나 즐겁지, 원.' 하며 투덜거리시던 주부님도 제수용품을 고르는 시선이며 손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조심스럽습니다.

또, 명절이 돌아왔습니다. 올 추석엔 다들 마음이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송편으로 빵빵해진 배보다 더 부른 마음요.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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