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동아시아 전쟁기억의 국제정치

▲ 표지 여문환의 <동아시아 전쟁기억의 국제정치> 표지 ⓒ 한국학술정보
20세기는 전쟁의 시대라고 한다. 전쟁은 개인과 사회에 가장 잔인하며 잊을 수 없는 상처, 즉 트라우마(Trauma)를 남긴다. 그리고 전쟁에 관한 각종 기억은 사건의 종결과 함께 정지 혹은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생성과 변형을 반복한다. 즉 어떤 기억들은 수용되고 어떤 기억들은 배제되고, 또 어떤 기억들은 가공되면서 사회의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편입되거나 배제된다.

전쟁에 대한 집단기억은 상호 경합을 통해 기억의 정치로 작동

이 집단기억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지배기억(dominant memory)과 지배기억에 대항하는 성격을 내포하는 대항기억(counter memory)으로 분류되는데, 지배기억과 대항기억 사이에는 늘 경합과 갈등이 재현된다.

이렇게 갈등하는 가운데 집단기억은 정치와 만나 '기억의 정치'로 작동하기 때문에 국가는 기념일 혹은 기념행사, 보훈과 상훈정책, 묘역·기념비·박물관·기념관 등의 다양한 기념을 통해 기억을 강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과 동화를 창조한다.

<동아시아 전쟁기억의 국제정치>(한국학술정보주식회사)의 저자 여문환은 한중일 3국이 전쟁기념관을 통해 전쟁의 기억을 어떻게 재현하고 이를 정치에 활용하는지 분석하였다.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전쟁기억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남북한 분단 및 개별정부의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근간으로 하는데, 해방 이후 정부는 정권창출과 국민통합을 위해 이전의 식민경험과 한국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적극 활용해왔다.

한국의 식민경험과 전쟁에 대한 기억은 정권의 성격에 따라 상호 경합

이승만 정부 이래로 권위주의 정부는 8월 15일을 광복절로, 6월 6일을 현충일, 6월을 호국보훈의 달 등으로 지정하여, 기억을 재현하며 본인들의 지배에 대해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는 역사에서 망각되었던 5.18 민중항쟁, 부마항쟁, 3.15의거, 거창양민학살사건, 대구 2.28의거, 제주4.3항쟁, 일제 위안부 문제, 노근리 사건 등 그동안 가려져 있던 각종 기억들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민주화과정이 전쟁기억의 변화에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독립기념관(1987년 개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년 개관)이 강한 반일감정에 기초한 적대패턴을 생산하며 국민통합과 정권의 정당성을 강요하고 있지만, 좌익 독립투사들의 명단이 독립기념관에서 빠진 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진보당 조봉암이나 인혁당 인사들의 이름은 최근에야 거론된 점등을 미루어 보면, 이 기념관들은 정권에 필요한 배타적 기억만을 재생산하는 공간으로서 활용되어온 측면을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기념관(1994년 개관) 역시도 한국전쟁의 공식기억인 '반공안보 가치관'에 선별된 기억에 중점을 두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재현하는 공간이자, 미국에 대한 우호적 패턴을 창출하여 국민들 사이에 지배기억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어왔다.

반면에,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1998년 개관)은 남성 중심의 지배기억에 대항하여 민간 그리고 여성의 입장에서 기억을 재현한 '대항적 공간'이자, 가해국가로서 일본의 시민단체 및 양심 있는 지식인과 기업인들이 박물관 건립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탈민족적 기억을 생산하는 공간'으로 규정할 수 있다.

또, 거창사건기념관(1996년)과 제주4.3평화기념관(2008년)은 진보와 보수 세력간 견해차로 충돌을 빚고 있어 국가 내에서도 기억의 경합이 불가피한 단계에 있지만, (민주화 이후)국가가 주도적으로 '대항기억을 재현'한 점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1848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중국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경험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은 타이완에 대한 적대감, 계급중심의 세계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자 의식'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일전쟁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정부에 의해 억제되어왔다.

그러다가 1982년에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가 불거지자 중국정부는 이를 계기로 일본을 비도덕국가로 묘사함으로써 중국 내부의 민족단합을 도모하였다. 중국은 '애국주의'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국가적 신화창조 작업에 몰입했다. 마오쩌둥 사후에 닥친 사회정치적 난관을 중국정부는 반일사상에 입각한 기억의 정치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전쟁 기념의 담론은 정부가 독점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의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건립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1987년 개관), 중일전쟁이 시작한 해 12월에 일본군이 난징(南京)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기억을 복원한 난징대학살기념관(1987년 개관), 1931년 9월 18일에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에 관동군을 주둔시킨 치욕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건립한 9.18역사박물관(1991년 건립) 등은  중국정부가 '기억의 정치'를 위해 세운 기념관들이다.

중국의 경우는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국가가 전쟁기념의 담론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와 인권문제, 여성문제, 소수인종문제 등의 재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정부의 지배기억에 반하는 대항기억을 재생산하는 공간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국제사회로부터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최초의 동양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를 경험한 이후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은 미국 연합군사령부의 맥아더 사령관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리고 전쟁책임자들은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관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런데 당시 기소된 A급 전범용의자는 28명에 불과했고, 그중에서 병사자 3명을 제외한 25명의 피고에게 유죄판결(교수형 7명, 종신금고형 16명, 금고 20면 1명, 금고 7년 1명)이 내려졌다. 천황은 기소에서 제외되었으며 냉전 초기에 공산 세력의 확산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와 일본 지배세력 사이 상호 이해관계가 맞물려 제대로 된 전범처리는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1952년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전범으로 처리된 자들은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미흡한 전후 처리가 전쟁 가해자 일본을 피해자로 둔갑시켜

그러다가 1982년에 이르자 문부성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검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대외침략을 '진출'로, 3.1독립운동을 '폭동'으로 고치게 했다. 그리고 1985년에 나카소네 수상은 일본 수상으로는 최초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기에 이르렀다. 반성하는 가해자의 모습은 오랜 기간 일본 정부 내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일본에는 지배집단의 입장에서 전쟁의 기억을 재생산하는 수많은 공간들이 있다. 전몰자에 대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도쿄에 쇼곤사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야스쿠니신사와 그 내부에 위치한 전쟁박물관인 유슈칸(1869년 개관), 1945년 8월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최초의 핵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여 26만 명의 피해자를 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한 히로시마 평화자료관(1949년 개관)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공간들은 전쟁에 참여한 일본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거나 일본을 태평양전쟁의 피하자로 인식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반면에 지배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공간도 있다.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치러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쟁에 강제로 동원하였고, 그 결과 무고한 주민 12만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오키나와평화사료관(1979년 개관)이 그것인데, 오키나와평화사료관은 정부가 주도하는 지배기억에 반해 대항기억을 생산해내고 있다.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3개국 사이의 국제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기억의 정치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들 3개국 개별국가차원에서의 전쟁기억은 전쟁기념관을 통해 우호패턴과 적대패턴을 불규칙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 우호와 적대의 불규칙한 패턴은 국가 간에도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어 표출된다. 한국의 경우 한미일 안보동맹을 이유로 일본에 대해 '우호'적 공식기억을 갖고 있는 반면에, 역사적 이유로 강화된 반일감정 등으로 인해 비공식기억 속에는 '적대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전쟁의 기억은 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 지역기억복합체 내에서 '기억의 정치'를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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