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렬- 김달삼 '평화협상'…" 4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지정하자"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자동차를 몰고 가더라도 무작정 정면만을 주시하며 돌진할 수는 없다. 가끔씩 백미러를 보고 주변상황을 판단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이미 엎질러진 역사를 ‘만약 이랬다면’식으로 되돌릴 순 없지만 한 번쯤 되새김해보고 거기서 지혜를 깨달아 보는 것도 중요할 성 싶다. 그 역사가 바로 4․3당시의 4.28평화협상이다.
 
 1948년 4․3 발발과 함께 비롯된 사회적 혼란을 치안상황으로 여기며 제주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는 토벌에 적극 나서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조속한 진압을 머리 속에 그려 넣고 있었다. 그래서 9연대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부산 5연대 소속의 1개 대대(대대장 오일균)를 차출하여 제주에 파병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미군정의 고문을 보내 김익렬 연대장에게 초토화 작전을 실행할 것을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선선무 후토벌’ 정책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래서 협상 내용을 담은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무장대와의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과정에서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 4월 28일, 구억초등학교.

“내가 김달삼이다. 찾아와 줘서 고맙다.”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인가?”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하도 젊고 미남배우 같아서 살인을 하는 무지무지한 사람같이 안 보여 물은 것이다.”


서로간에 탐색전이 벌어지지만 이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김익렬 : 왜 이렇게 우리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김달삼 : 우리도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 자고 나면 경찰이나 서청이 와서    다     빼앗아가고 해서 못사니까, 자위권을 발동하여 산에 올라온 것이다.
김익렬 : 경비대가 아직까지 당신들을 토벌하지 않는 이유를 아는가?
김달삼 : 우리의 궐기 동기를 이해하여 동정과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토벌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김익렬 :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한다.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에는 당신과 전투장에서 만나게 된다.

입장차이에 따른 가시 돋힌 발언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목적은 하나였다.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 평화로운 삶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없애자는 데는 공감하고 있었다. 물론 방법상의 차이는 있었다. “당장 전투행위 중지”와 “연락 관계상 5일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

이러한 입장 차이를 극복하려고 “72시간 내”로 합의 하는 과정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 외에도 무장해제와 주모자 신병 보장 등의 요구조건들도 원만히 타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협상과정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후로 이어지는 오라리 방화사건, 귀순방해공작, 수뇌부회담 등으로 아름다운 평화협상은 물거품이 되고 이 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제주 섬은 내몰리면서 미군정의 양동작전에 놀아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날을 세운 양측이 허심탄회하게 마주 앉아 현안문제를 고심하고 풀어내기 위한 모습(그것은 목숨까지도 담보로 해야 했다)에는 평화를 갈망하는 역사 속의 지혜가 그려진다.

 ‘평화의 섬’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4․3이 주는 교훈도 바로 이런 것이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숨까지도 담보로 하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이어야 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고 해도 제주 섬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침입환경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가령 도민들 삶의 질을 강압적으로 조정하려 들거나 파괴하려는 세력들에 너끈히 대처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나가는 것일 터이다. 평화의 섬과 관련하여 4월 28일, 이 날을 평화의 날로 정하는 것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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