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C대학생아카데미] (10) 쓰레기통 '희망 장미' 지승룡 민토 대표

“수많은 지식을 갖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슴에 꽉 잡히는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국내에 새로운 카페 문화를 선도한 ‘민들레 영토’로 화제를 모았던 지승룡 대표가 24일 제주대학교 국제교류회관에서 열린 JDC대학생아카데미 강단에 섰다.

1994년 서울 신촌 33㎡(10평) 남짓 공간에 처음 문을 연 민들레 영토는 카페 이상의 문화공간으로 입지를 다지며 큰 사랑을 받아왔다. 2009년 8월엔 전국 35개 지점이 설립됐을 정도다.

이번 강연에서도 민토의 ‘성공과 마케팅 전략’ 이야기를 듣게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지 대표의 이야기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그는 “돈이 없어도 행복할 줄 아는 ‘깊은 영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지승룡 민들레영토 대표.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지 대표는 “경쟁에 빠지기 쉽고 사회의 분위기만을 쫓아 ‘스펙’을 쌓기 위해 살게 된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건드리는 영혼, 진정성의 깊이를 얼마나 내재화 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회사가 대한민국이 사회가 원하는 것이란 걸 시간 속에서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토의 성공도 “이런 고민으로 비즈니스 현장에서 깨지고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났기에 이곳에 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 대표는 자신의 직업을 ‘마담’이라고 소개했지만 그는 ‘목회자’에 가깝다. 그는 전직 목사기도 하다.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그는 교회에서 부목사를 하다 그만두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서울 삼양동에 어렵게 사는 신자들이 많이 찾던 교회다. 막노동 같은 힘든 일을 한 뒤 철야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졸기 십상이다. 교회는 노래와 재미있는 목회로 이들을 잠에서 깨워 기도에 참여하게 했다. 나는 여기서 충격을 받았다. 한 택시운전기사가 한두 시간 후면 생계에 나서야 하는데 잠도 자지 않고 ‘여기서 은혜 받고 주님과 함께 운전하겠다’면서 철야기도에 참여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몸이 그의 마음처럼 움직일 것은 뻔했다. 목사가 신도들을 좋은 길로 인도해야 하는데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았다. 고뇌가 시작됐다. 이런 목회를 해야 하는가. 내가 집회를 인도하게 됐을 때 철야기도에서 나는 모두 주무시라고 했다. 이 이야기가 담임목사 귀에 들어가게 됐고 이후 나는 목사를 그만두게 됐다.”

지 대표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박정희 정부에서 유신헌법을 선포할 때 국무총리가 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걸 기다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데 반발해 집 앞에 있던 쓰레기통에 흙을 채우고 장미꽃을 심기도 했다. 그는 “쓰레기통에서도 꽃이 핀다는 것을 알았고 그게 나의 인품이 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쓰레기통 장미꽃’은 특유의 낙천적이고 희망적인 그의 성격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생트집을 잡아 약점을 만들고 거래를 트기 위해 닥쳐들었던 건달을 동생으로 삼은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건달들이 민들레 영토에 와서 오렌지 주스를 시키더니 손톱이 들어있다며 멱살을 잡았다. 약점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물건을 지속적으로 넣기 위한 거였다. 무작정 그들을 끌어안았다. 그들이 당황할 때까지 안았다. 그러고는 도와주겠다고, 밥을 먹자고 했다. 건달들이 밥을 먹는 동안에 우리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배추를 배달하던 트럭에서 옮기다 떨어진 겉포기로 배춧국을 끓여먹은 이야기였다. 그것을 주운 어머니의 손이 내 생명이다, 라는 얘기였다. 건달들이 90도로 인사하며 ‘형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그의 낙천성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국세청 고위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어느 날 공장 사장님이 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묵묵히 그를 따랐다. 이후 참혹하게 망한 후 8년간 빚을 갚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묵묵했다. 파산 뒤 동네에 ‘이 집은 끝났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나는 오늘부터 기쁘게 살 것이다. 지금부터 빚을 갚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해 자식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했다. 그로부터 8년 후 빚을 모두 갚은 뒷날 세상을 떠났다고 지 대표는 말했다.

지 대표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서울 삼청동에 있는 정독도서관에서 극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지냈다. 그는 “나에게 이들을 위로할 지식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무식한데다 그들을 도울 용기마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그는 2000권에 가까운 책들을 독파해 나갔다.

그는 이후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워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인생의 미션으로 삼고 지내왔다.

인재를 채용할 때도 성적과 자격증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게 글로벌 한 것이다. 대학 이력서는 작은 부분이다. ‘스펙’만 갖고 취업하려는 것은 쪼잔 한 것”이라고 했다.

이 기준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거다. 그는 “나는 대학 때 ‘논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슬로건으로 미친듯이 놀았다. 대학 졸업 뒤 대학원에 가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기대도 못했다. 고생이 이력이 나 체질화된 어느날 'IMF‘가 터졌다. 잘 나가던 친구들이 회사에서 잘리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로 IMF였기에 그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여유를 갖고 상황을 헤쳐 나갔고 승승장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시간이 그에겐 깊은 ‘자기 성찰’의 기회였다.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그는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이 무엇이고 자신이 누군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 때까지 졸업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글로벌 마인드’가 스펙에 한정되는 것을 우려했다. 지 대표는 “더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를 알기 위해 몸부림 치고 깨닫는 것이 학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을 보면 ‘흑인’이란 생각을 제일 먼저 떠올린 다. 색에 대한 우열이 있는데 어떻게 세계적인 디자인이 나오겠나. 가늘고 긴걸 보면 징그러워하고, 바퀴벌레를 보면 무조건 소리 지른다. 편견을 갖고 어떻게 세계적인 것을 만들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직위와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닌 미션과 비전이 더 중요하다”면서 “봉급을 많이 주고 해외 연수를 많이 다녀도 사람의 질은 바뀌지 않는다. 직책과 직위만이 남은 기성세대가 아닌 어떤 장애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헤쳐 나가는 창조적인 생각으로 젊은 세대의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