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칼럼] 유배 4년만에 비참한 최후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무능력하고 질투심에 불타는 선조와는 달리 총명한 왕재(王才)로 그리고 있는 ‘광해군’이 있다.

그런데,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선조의 대표적 ‘폭군’으로 일컬어져 왔다. 아니 우리 세대는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시도되고 있다. 오히려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다른 해석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왔다 죽었다고?

그런데 이 광해군이 제주도에 유배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제주도의 대표적 유배인이라면 추사 김정희나 오현(五賢)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을 떠올린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게 무슨 죄가 있길래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노라.”

1618년 10월 4일, 인목대비를 폐위하라고 요구하는 대북파 신료들의 끈질긴 요청에 진저리치며 독백처럼 내뱉었던 광해군은, 자신의 이 말이 씨가 됐는지 바닷가(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국의 왕이었던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왔었다면, 제주에 유배온 인사들의 지위로는 최고위층인 셈인데 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일까? 추사의 경우 ‘적거지’를 문화재로 지정하면서까지 보호하고 있는데 반해 광해군의 적거지(유배지)는 어느 곳인지조차 확실히 알려져 있지도 않다.

아마도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으로 표상되는 조선시대 기득권층의 정사를 그대로 답습해온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제주시가 시제실시 5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제주목사(牧使)’라는 사료집을 출간했다. 이 사료집 168~170쪽에는 이시방(李時昉) 목사 편으로 인조19년 7월 10일(갑신)자 기록에 ‘67세의 나이로 광해군이 죽은’ 사실을 묘사하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광해군이 죽자 당시 조정에서 이를 어떤 예를 갖춰 장사지낼 것인지 논쟁을 벌이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광해군과 관련한 스토리를 먼저 살펴 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광해군 폐위의 주요한 명분은 첫째,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설. 둘째,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는 것. 셋째는 중국(明)에 대해 사대를 하지 않고 청(淸)나라에 부화했다는 것이었다. 그 폐위 명분은 적절했는가?

#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恭嬪 金氏)에게서 난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는데 임해군은 무지하고 난폭한 면이 많았으며, 왕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는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공작을 펼치는 등, 선조는 후계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서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가는 몸이 되고 평양에서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광해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아 의병 모집 등의 소임을 난중에 훌륭히 전개하여 조야의 명망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 및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36년(1606) 중전 인목왕후에게서 뒤늦게 왕자(永昌大君)가 태어나는데 선조는 영창을 매우 총애하게 되고, 영창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세력(소북파)들이 모여들게 된다.

이런 속에서 병이 위독한 선조가 1608년 광해군에게 선위(禪位)의 교서를 내리지만, 소북파였던 영의정 유영경이 선위교서를 감추고 내놓지 않다가,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호하고 있던 정인홍․이이첨(대북파)에 의해 발각되어 논란을 빚게 된다. 유영경을 탄핵하라는 대북파의 주장을 결말짓지 못한 상태에서 선조가 죽자 인목대비가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은 즉위하게 된다.

▲ 광해군 묘 전경.
# 광해군의 왕권강화 정책과 개혁정책

참으로 절명의 순간에 조선 제 15대 왕위에 겨우 오른 광해군은 등국 후 일련의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는데, 왕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유영경 등의 세력들을 대거 제거함은 물론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하였다. 1613년 영창대군 추대 역모설이 불거져 나와,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그의 외조부 김제남등이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된다.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영창대군은 증살(蒸殺)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인목대비의 원망과 헐뜯음이 심해지자 권신들이 이를 처리할 것을 강권했으나 5년 동안 끌다가 결국 1618년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조치를 내리게 된다.

이는 광해군 집권을 도왔던 이이첨 등 대북파가 왕권강화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던 과정에서 나온 무리수로서, 이후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이용된다. 이런 점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문제가 있는 조치라는 평가를 받는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초기에 조정의 기풍을 일신하기 위해 당파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조세를 고루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특히 즉위 원년인 1608년에 경기도일원에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은 소유토지를 기준으로 한 누진세법으로, 이전에는 가난한 농민들은 많은 공납(貢納)을 부담하는 반면 부유한 사대부는 적은 액수만을 납부하는 불공평과세였는데 이런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는 획기적 조치였다. 당연히 전주(田主)인 양반들의 반발을 초래했음은 물론이다(대동법은 이후 100년이 지난 숙종 34년인 1708년에 황해도에 실시됨으로써 비로소 전국적인 시행을 보게 된다).

또한 문화사업으로 그 유명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의 간행을 이룩하였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간행하여 흐트러진 민심과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다. 또한 진보(鎭堡)의 확충 등으로 외침에 대비했다.

한편 1611년에는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을 확보하였으며, 난중에 불타버린 궁궐을 창건.중수하여(창덕궁 준공, 1619년 경덕궁(경희궁).1621년 인경궁 중건) 왕실의 위엄을 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인경궁(경복궁의 10배 규모)의 건설은 끝내지 못하고 인조반정을 맞이했고, 인조반정 후 인경궁의 거대한 전각들은 해체되어버리고 말았다.

왕권강화 차원에서 집착했던 궁궐영건 사업은 사회경제적으로 큰 후유증을 가져와 농민들을 병들게 하고 궁극에는 광해군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궁궐영건 사업은 분명 ‘과(過)’한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광해군의 자주적 외교정책

한편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후금(後金)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칭한 후 다음해 명(明)의 국경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하나, 광해군은 “남쪽에 변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거나 “우리의 군사는 훈련이 안돼 쓸모가 없고 무기도 갖추지 못했다”는 따위의 핑계를 대며 거절을 거듭했다.

1618년 7월 조정에서는 명의 거듭된 강요로 인해 결국 군대 파병을 결정하는데, 1619년 2월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하여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출정에 나서 조․명연합군에 편성된다.

광해군은 3만 명의 병사로 국경을 지키게 하고는 강홍립에게는 그 유명한 ‘관형향배(觀形向背)’를 취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이에 강홍립은 앞으로 나가 싸우는 채 하다가 거짓 투항하였고 “우리 군대는 마지못해 출정했다”는 광해군의 뜻을 후금에 은밀하게 전했다.

이렇듯 광해군은 이후 대제국 청을 건설한 후금과 적당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회유를 거듭하면서 명나라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다.

광해군이 쫓겨난 후 조정은 배청(排淸)으로 일관했으며 심지어 후금의 사신을 쫓아보내고 국서를 찢기도 하면서 적대감을 보이다가, 광해군이 물러난 지 5년 만인 1627년에 ‘정묘호란’을 불러일으켜 강제로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굴복한다.

이 때 왕은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도망친다. 이런 뒤에도 도망온 명의 장수를 돕고 청의 사신을 죽이려 하면서 청황제를 인정하지 않다가, 끝내 1636년 청의 전면적 침략을 받는다.

이 때 왕은 남한 산성에 들어가 아무런 방비책도 세우지 못하다가 끝내 삼전도에서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복(三跪九伏)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며 용서를 빌었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 굴복인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만다. 그리고 소현․봉림세자와 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황자와 대신들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인조반정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는 안될 ‘반동쿠테타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장기집권, 경제사회적으로는 양반사대부의 특권유지, 사상적으로는 반동적인 예론(禮論)의 고착화 등 조선후기 사회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교해 보면 광해군은 한때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재정을 회복하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뛰어난 현실적(실리적) 외교정책을 펼쳐 화의를 조성하는 등 임금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인조반정-반동쿠테타'로 숙청된 광해군

그의 재위 15년간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던 세력들이 일으킨 무력정변이 1623년의 인조반정이다. 이 반정으로 이조 16대 임금으로 등극한 인조는 그 동안 득세했던 대북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데, 이를 계기로 광해군은 유배되게 된다.

처음에 강화도에 유배됐던 광해군은 폐세자 및 세자빈, 폐비 윤씨를 1년 반만에 모두 잃고 혼자가 된다(폐세자는 탈출을 시도하다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스스로 목을 매 죽었으며 부인 역시 쇼크로 눈을 감음). 그 이듬해 이괄의 난 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도로 안치된다.

이후 10여 년이 지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감시가 용이한 ‘교동(喬棟)’으로 안치되었다가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6월 6일 제주도에 유배된다.

이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나와 청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그 해로서, 후금과 사단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광해군이니만큼, 인조나 서인들로서는 그가 자신들과 가까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광해군은 어등포(魚登浦: 현 구좌읍 행원리)로 상륙하여 6월 7일 주성 망경루(望京樓 = 구 제주세무서) 서쪽에 위리안치되었다고 한다.

# 제주도로 유배된 광해...‘위리안치' 4년만에 죽어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강화에서 태안으로 옮길 때 그를 호송하던 별장들이 윗방을 차지하고 그 아래채에서 재우는 모욕을 주어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제주도에서는 심부름하는 계집종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앙탈을 해도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 말도 안했다 한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에는 광해가 교동에서 제주로 유배지를 옮겨 갈 때 지은 비감에 찬 시가 기록되어 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에 따르면 제주에 유배온 광해군은 제주 서성(西城)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는데,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죽자 당시 목사 이시방(李時昉)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禮)로 염빈(殮殯)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외부의 출입과는 엄격히 통제된 유배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전직 임금이었지만 가장 가혹한 최고의 유배형인 엄격한 위리안치(圍籬安置) 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제주환경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죽어간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귀양살이 총 19년, 제주 땅에 유배된 지 4년 만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예순일곱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공빈 김씨)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광해군이 죽자 인조는 7일간의 소찬으로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어 초상치르는 것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각 도의 감사에게는 같이 따라가 초상치르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였고 그의 유언대로 경기도 양주 적석동에 있는 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었다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인조는 예조의 건의대로 ‘연산의 경우와 같이 왕자의 예로서, 그의 외손이 제사를 주관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죽자 “7월 3일 소렴(小斂)하고 4일에 입관(庶人의 예를 따라)하여 7월 27일 관덕정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한 후 제주 삼읍을 윤회하고서 8월 5일에 배를 띄웠는데 되돌아와서 정박하다가 8월 18일 제주를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제주3읍 목민관 총람, 판관 편 / 이형상의 남환박물).

아이러니하게도 공빈 김씨의 무덤 옆에는 임해군이 묻혀 있는 바, 이곳을 찾는 임해군의 후손들은 광해군의 묘소를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한다.

4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므로 그에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안타깝게도 그와 관련된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도 복권이 안된 그이기에, 언급.기록 자체를 회피하게 했음은 물론 설사 그와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하더라도 후환이 두려워 공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4년 동안 제주에서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운의 왕이었던 광해군. 제주에서부터 광해군의 복권운동(?)을 하는 건 어떤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자취를 찾고 조선왕조 역사에서 그를 재평가하고 회복시키는작업부터 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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