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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이문열의 소설은 끝 모를 허영과 욕망으로 날아오르다 동반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청춘남녀의 허무한 연애담이다. 제 분수를 모르고 너무 높게 날개짓 하여 올라간 것은 추락하기 십상이다. 추락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보통 무한 욕망의 허망함을 절감한다. 그것이 육체적인 쾌락이든 물질적인 탐닉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욕구(필요)의 수준을 넘어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내적 요인으로는 개인적 인성과 도덕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여기에 어떤 외적 요인이 결부되어 날개가 달릴 때 상승기류를 탄 욕망은 좀체 정지나 하강의 자기 절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외적 요인에는 익명의 대중들이 난세의 시류에 편승하여 결핍된 공동의 욕망을 투사시켜 특정한 인물을 상징적인 표상으로 추앙하는 대중주의, 즉 포퓰리즘이 큰 몫으로 자리한다. 구국의 영웅으로 경배되었다가 몰염치한 사기꾼으로 추락한 황우석 교수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 가상공간을 매개로 네티즌들이 주도하는 의제 설정과 여론 형성의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다. 황우석 교수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영웅 신화를 창출해 낸 일등 공신은 인터넷 포퓰리즘이다. 여기에 이른바 ‘황금박쥐’로 대변되는 정치권력까지 결탁되었으니 날개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래서 추락의 후유 장애는 개인의 비극성을 넘어 전 국민적, 국가적인 혼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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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교수에게 급조된 모조 날개를 달아주어 결국 추락의 벼랑 끝으로 내몬 막강 한국의 인터넷 포퓰리즘, 그 원인과 실체는 무엇일까. MBC 피디수첩이 처음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불법 거래된 난자와 연구원의 난자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이에 반감을 가진 네티즌들이 인터넷 포탈사이트 카페(이 카페의 운영자는 MBC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YTN 간부 출신임이 밝혀졌다)를 중심으로 무서운 결집력을 발휘해 ‘황우석 구하기’에 나섰다. 집요하고 무서운 이들의 선동은 피디수첩 12개 광고들을 모두 끌어내리는 저력을 과시했다. 외국의 언론이 경악했다. 황우석을 살리기 위해 MBC는 죽어야 했다. 담당 피디의 가족사진과 신원을 공개하며 죽여라고 아우성 쳤다. 이쯤 되면 이들의 ‘애국’에서 파시즘의 집단 광기를 떠올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들에게 황우석 교수는 국난극복의 주인공 이순신이었고, 황우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싸잡아 이순신을 곤경에 빠트린 원균으로 매도되었다. 지지자는 국익을 위하는 애국자로 칭송되었으며, 비판자는 국익을 저해하는 매국노로 편 가르기 하는 단순한 흑백논리가 횡행했다. 국론은 급속히 ‘황빠’와 ‘황까’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맹목적, 수구적 애국주의 앞에 비판적 이성은 마비되었다. 이들은 인터넷 카페에서 촛불 시위를 계획하면서 “힘을 최대한 모아야 광화문 대로를 꽉 채울 수 있습니다. 양초와 종이컵은 개인별로 꼭 지참하시고 각자 친구 한 두 명씩 꼭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자녀분들과 함께 나오셔서 역사의 현장에 동참케 하십시오”라는 선동조의 언어를 구사했다. 시위장소는 이순신 동상 앞이었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타이틀롤인, 갑옷을 입은 김명민을 포스트로 내걸었다.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라니. 이들은 ‘황우석 구하기’에 거룩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들에게 ‘황우석 구하기’는 곧 ‘나라 구하기’와 동격이다. 황 교수가 난자 공여자들에게 ‘거룩한 여성’ ‘성스러운 여성’이란 극찬의 수사를 사용했음을 상기해 보라. 나라를 구한다는 데, 그깟 난자 채취나 거래가 불법이든 비윤리적이든 그게 뭔 대수냐는 복선이 깔려 있음을 간파한다. ‘구국’이란 표현에서 황 교수와 극렬 팬들의 코드는 서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황우석은 어떻게 신화화 되었는가.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을 적용해 볼 때, ‘황우석’이란 기표는 수의학 전공의 ‘과학자’라는 일차적 의미작용의 단계를 넘어 이차적 의미화의 단계에서 ‘대한민국’과 동격의 ‘영웅 황우석’이란 내포적 의미, 곧 신화를 탄생시킨다. 신화는 한 사회에서 지배적 다수의 가치와 이익을 증진시키고 유지시키는 생각과 실천의 체계로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아메리카 제국의 신화 창출에 기여한 웨스턴 무비가 그러했듯이 신화는 우리와 너희들,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등, 세계를 서로 배타적인 양자 대립의 범주로 이원화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데올로기의 틀로 재단된 세계는 황우석을 지지하는 우리/정의/선과 비판하는 너희들/불의/악으로 간단명료하게 나누어진다.

이데올로기는 우상이다. 이데올로기의 기재가 작동되는 한 우상의 그늘에 덮여 모든 진실의 빛은 질식한다. 진실보다 황우석=국익이 우선한다. 국민의 알권리도 국익 앞에선 침묵해야 한다. 태극기를 쳐다보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듯이, 국익이란 이데올로기의 허깨비 앞에서 건강한 비판론은 열중쉬어 자세로 숨 죽여야 한다. 도대체 국익이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인가? 다양한 계층과 이해집단의 이익을 초월하는 하나의 국가이익이 있을 수 있는가도 회의적이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한 나라의 개별 이익이 자유와 인권, 평등, 평화 등 인류보편의 가치에 우선할 수 없는 것이다.

황 교수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거나 “미 생명공학 고지에 태극기를 꽂고 왔다”고 말했다. 마지막 기자회견에선 국가 또는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8번이나 사용했다. 그는 스스로를 국가(대한민국)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대중들도 그렇게 봐 주기를 감성에 호소한다. 그만큼 그는 감성적인 대중조작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이런 황우석과 대중들의 감성은 ‘기술민족주의’에서 자연스럽게 합일한다. BT 산업을 유력한 성장동력으로 꼽은 국가로부터 황 교수에게 ‘최고 과학자’의 명예가 헌사 되고, 줄기세포 연구가 ‘세계 최고’의 국가경쟁력으로 부상하면서 애국주의의 외피를 둘러쓴 기술민족주의가 황우석 신화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과학사회학자 김환석 교수는 “황우석 교수의 행동이나 발언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기술민족주의라는 한 단어로 수렴된다. 마치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화신처럼 보일 정도다”라고 한다.

애국은 국민 각자의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내면화 되어야 할 가치 덕목이지, 어떠한 형태로든 외부로부터 주입된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한 애국은 독일 제3제국이 그러했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러했듯이 다분히 파시즘의 논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연구원과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난자 체취 과정이나 난자 기증의사 전달식의 ‘무궁화꽃 이벤트’에서 드러났듯이 개인의 인권이나 존엄성, 윤리는 아랑곳없고,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몸 기꺼이 내던져야 한다는 전체주의의 폭력성이 애국심이란 당의정으로 교묘히 포장되어 발호한다. 국가는 일종의 의사 사교집단이 되고, 국민의 대다수는 이에 맹종하는 광신도가 된다. 광신도들에겐 맹목적으로 신앙해야 할 의무만 강제될 뿐, 합리적으로 비판해야 할 자유는 기대할 수 없다.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최종 조사결과, 2004년, 2005년 두 차례 <사이언스 designtimesp=6166> 논문은 완전히 조작되었으며,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도 없고, 이에 대한 원천 기술도 인정할 수 없다는 발표에도 이들은 진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인터넷에선 “황우석 교수를 죽이려는 음모다. 믿을 수 없다”는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고, ‘아이러브 황우석 카페’에선 “우린 황 박사의 광신도가 아니다.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조국 대한민국의 광신도다. 대한민국의 이익(국익)을 가로채는 매국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광신도들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종하는 개인 황우석과 대한민국, ‘황우석 구하기’와 대한민국의 이익은 결국 다른 얼굴을 한 한 몸이므로 그 둘을 분리시켜 보려는 그들의 주장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의 광신적인 집착에 더욱 무게가 실릴 뿐이다. 황 교수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는 대중지배의 한 유형인 카리스마가 관철되고 있는 듯 하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보통 초인적인,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과학적인 검증을 거친 명백한 진실에도 음모론으로 맞서고 있는 네티즌들의 행태는 권위적 지배에 대한 비합리적 복종으로 보인다. 여기엔 또 절대적 신앙에 대한 흔들리는 불안감을 자기 합리화를 통해 보상하려고 하는 심리가 투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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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사이언스 designtimesp=6173>에 ‘인간체세포복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게재된 이후 1년이 넘게 지속된 ‘황우석 부흥회’에는 전 국가적으로 계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동원된 권력과 언론, 그리고 대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부흥사의 현란한 말솜씨와 몸짓에 덩달아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환호했다. 이 가운데 뭐니 뭐니 해도 대중동원력에서 단연 압권은 인터넷 포퓰리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폭발적인 영향력은 과연 어디서, 어떻게 해서 나올 수 있는가.

이른바 황우석 사태에서 두 달 이상 황우석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온 국민이 감내해야 했던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생각하면 기실 줄기세포나 그 원천기술의 존재 유무는 곁가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여성 몸의 실험 도구화나 배아복제의 생명윤리 문제는 보수언론과 인터넷 포퓰리즘의 애국 열풍에 묻혀버렸다. 노성일 이사장의 폭로 기자회견이 있기 전까지 초반 98대 2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IT강국’ 대한민국에서 동시다발적인 전파력을 가진 인터넷의 매체 장악력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개진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중우주의(衆愚主義)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띠고 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동의와 지배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질적 가치가 담보되지 않은 양적 다수는 이번의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건강한 분별력이 마비된 우매한 군중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는 것이다. 폭력성을 띤 어리석은 다수의 횡포는 현명한 소수의 의견을 유린하는 흉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만으론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인터넷 포퓰리즘을 설명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를 기억하는가. 전국에 걸쳐 수백 만 명, 서울에서만도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어깨를 걸고 한 목소리로 ‘오~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을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기막힌 감동의 드라마였다. 세계가 경악했다. 이들은 한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번의 황우석 지지자들도 이렇게 말한다. “황우석 박사가 있는 한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자랑스럽게 하는가. 이들의 목소리에서 나는 하나의 공분모를 발견한다. 혈통주의적 자긍심과 굽힐 수 없는 애국 열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자긍심과 애국주의에 불을 지른 것은 우리의 불안한 사회경제적 현실이다.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한번 수렁으로 빠져든 경제는 좀체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리해고와 도산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노숙자와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넘치는 암울한 사회에서 삶의 의지와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되는 일이라곤 없고, 나아갈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서 월드컵 4강은 모든 울분과 짜증을 일거에 날려버린 한줄기 빛이었고, 청량제였다. 그래서 열광했다. 히딩크와 박지성, 안정환, 이영표 등 월드컵 영웅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물론 이 열광의 중심에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치우천황 깃발을 들고 연일 거리를 누빈 붉은 악마들이 있었다. 모습만 달리 했지 붉은 악마 군단과 황우석 구하기에 발 벗고 나선, 누리꾼들이 보인 놀라운 연대감과 집단적 신명의 본질은 일맥상통한다.

아직도 불황의 늪은 깊고, 500만을 웃도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15세에서 29세까지의 청년 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어 전체 실업율의 두 배(7%)를 차지하고 있다. ‘사오정’ ‘이태백’ 등의 신조어가 우스개 거리로 회자되는 우울한 세태에, 만성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한방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황우석은 줄기세포 치료로 수십 조 원에 이르는 경제적 부를 가져오고, 앉은뱅이라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예수의 ‘기적’을 행할(이러한 이야기는 대부분 황 교수 자신의 말과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불확실한 정보, 즉 ‘환상’이었다) 구세주 영웅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월드컵에서 그랬듯이 이들에게 황우석은 불안한 생존의 그늘에서 흔들리는 실존에 대한 결핍된 욕망의 대리충족물이었고, 심리적 보상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영웅의 퇴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들은 또 어디서 새로운 욕망의 투사물을 찾을 것인가. 2006년 독일 월드컵, ‘아드보카트의 신화’(?)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요란한 스캔들과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영웅은 과학의 무대를 떠났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고, 단기간에 최고가 되겠다는 천박한 업적제일주의와 경쟁력지상주의, 빗나간 국익론(애국주의)에 매몰된 인터넷 포퓰리즘, 참을 수 없는 윤리의 가벼움, 곧 철학의 부재, 그리고 과학권력이 낳은 한 폴리페서(정치교수)의 비극적 운명을 목격했다. 비전이 있는 건실한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이들을 충실한 반면교사로 삼는 시민사회의 성숙함을 우리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상의 황혼이 짙으면 언젠가 이성의 새벽은 밝아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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