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학자 정약용, '국민 약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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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바다] (1) 신동원 소장 "평생 옴·치통·두통·폐병·중풍 앓아, 누워서도 저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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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사람’,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 ‘조선 최고의 개혁가’. 다산 정약용(1762~1836)에 붙는 수식어다. 조선 통틀어 최고의 학자로 일컬어 질만큼 방대한 저서를 남긴 그는 거의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평생 옴, 치통, 두통, 폐병, 중풍 등 온갖 질병을 달고 살았다.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APOCC, 원장 주강현)과 [제주의소리]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인문의 바다’가 27일 개강했다.

주강현 APOCC 원장은 “‘인문의 바다’의 방식을 좀 바꿨다. 제주의소리와 함께 진행하면서 좋은 강연을 많은 분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산귤재도 넓혀서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려고 한다. 제주 사회에 해양의 인문학의 뿌리를 내리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홍철 대표는 “제주는 그 동안 넘실대는 바다와 한라대간을 갖고 있음에도 인문적으로 외로운 섬이었다.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이 ‘인문의 바다’를 열어주셔서 제주가 지닌 3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는 신동원 한국과학문명사연구소 소장이 나서 ‘인문의 바다에서 생노병사를 말하다-병과 의약생활로 본 다산 선생의 일생’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신 소장은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 많이 알지만 생로병사와 인간적 고뇌를 아는 분은 많이 계시지 않다”며 “다산의 저서는 몸이 아파서 나온 책이다. 그의 저서에 담긴 내용은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로병사와 고뇌 속에서 이뤄진 성과물”이라고 말했다.

여태까지 정약용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성역화 돼 왔다. 그러다보니 인간적인 면은 사라져버리고 그의 도덕적, 사유적인 덩어리만 남게 됐다. 최근에 많은 연구들은 인간으로 역사적 실존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의 제자 양성, 소실과 딸 등 연구 주제가 확대됐다.

신 소장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유배가기 전인 40세까지 천연두(2세), 홍역(14세), 피를 토하는 중병(15세), 심한 투통(30세), 심한 독감(36세) 등을 앓았다. 당시 천연두는 치사율이 어마어마한 병이었다. 7세에 자신의 호를 삼미자(三眉子)로 삼았는데, 오른쪽 눈썹 위에 천연두를 앓은 흔적 때문이었다. 홍역도 17세기까지 맹위를 떨치던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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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간 이후는 저술과 병의 나날이다. 계속 풍을 앓았다. 그럼에도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았다.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폐인의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안력이 어두워져서 안경에만 의지하게 됐다. 흑산도에 있던 그의 형 정약전이 글 좀 그만 쓰라고 조언했지만 글을 쓰는 것이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신 소장은 “누워 지내며 다산학단의 제자들이 번갈아 받아 적는 작업으로 방대한 저서가 나왔다. 아픈 몸이 아니었다면 저서를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픈 몸을 잊게 한 것이 오로지 저술 활동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자식들도 기구했다. 6남3녀 중 2남1녀만 남았다. 첫 애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었다. 장녀는 나흘 만에 사망, 3남도 두옹으로 사망, 2녀는 천연두로 사망, 4남과 5남은 천연두로 사망, 6남이 두진으로 사망해 셋만 남았다.

신 소장은 “오죽하면 작은 아이가 말을 배우지 않아도 기쁘고 큰 아이가 글을 배우지 않아도 아니 믿었다고 할 정도였다. 애통한 마음에 죽은 자식에게는 광명을 써주었다.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라며 “그가 종두법 도입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뛰어난 의원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하도 병에 시달리다보니 자가 치료를 시도하며 자신에게 맞는 처방을 찾기도 했다. 46세에 옴으로 갖은 고생을 겪다 의서를 뒤적여 신이고를 만들어 병을 고쳤다. 평생 한이었던 탕척서용이 이뤄진 것도 세자 치료를 위해 민간에서 이름난 의원으로 뽑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와도 투병 생활은 계속됐다. 게다가 강진에서 올라온 딸과 그 어미에 대한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말년엔 ‘노인일쾌사’라는 시를 쓸 만큼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회혼날 친척들과 제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운명했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시대에 떠밀려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살기 위해서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정약전이 세상을 뜨고 나서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쉼이 없었다. 500 여 권에 달하는 책을 냈지만 생전에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호가 다산으로 잘 알려졌지만 사암(俟菴)이다. 후대의 평가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해양인문학을 다루는 ‘인문의 바다’는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오후 6시30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 위치한 산귤재에서 열린다. 강좌는 전화 접수만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오는 12월까지 이상수 전 한겨레 기자, 이찬우 데이쿄대 교수, 송하경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어 김대호 (사)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최재선 해양수산개발원 연구기획본부장, 변창흠 SH공사 사장, 이영권 제주영주고 교사, 허남춘 제주대 교수 등이 강사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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