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크게 뜨면 ‘올바른 선택’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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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4․13총선을 앞둬 다시 ‘선거’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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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과 투표

저는 배구 경기를 보길 좋아합니다. 돌고래처럼 뛰어 올라 상대 진영에 내리꽂는 강타에 속이 다 후련합니다. 세터의 현란한 볼 배급에도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배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물로 경계를 지어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점입니다. 어쩌다 그 그물에 옷깃만 스쳐도 어김없이 반칙이 됩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몸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팀이 경기하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TV 앞에 앉습니다. 그래서 신나게 응원을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온갖 시름이 날아갑니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괜히 기분이 좋고, 어쩌다 지면 속이 상합니다. 제가 왜 이처럼 특정 팀을 응원하게 됐는지는 제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팀에 무슨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됐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선거에 의한 투표가 바로 ‘응원하는 행위’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배구장에서 특정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이익을 노리고 그러는 게 아닌 것처럼, 투표 역시 개인의 뜻이나 선호가 논리적으로 자신의 구체적 이익추구의 결과여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합니다.

선거를 통한 ‘민주적 통제’

그러나 응원과 투표 사이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유권자는 자신이 투표를 해서 얻게 되는 개인적 이익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순히 응원하는 마음으로만 투표장에 나가지 않습니다. 비록 ‘계산적 행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적 통제’의 신념입니다. 물론 혈연 학연 지연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은 예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투표행위가 유권자의 신념에 근거한 행동임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의 정책지지도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각 정당과 후보자들의 선거공약에 대한 유권자의 인식의 폭이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곧바로 선거쟁점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지는가하는 평가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집니다.

만일 이때 정책공약이 실종되어 ‘정책내용’이 주된 판단기준이 되지 못하고,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이른바 ‘정치공세’에 좌우되거나, 이른바 혈연·학연·지연 등의 감정이 개입될 경우, 우리는 ‘선거를 통한 민주적 통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게 없게 됩니다. 투표의 결과를 놓고 “무조건 최선의 사회적 선택 혹은 유권자의 뜻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그래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투표는 유권자의 이성과 양심의 표현

그러나 선거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자기 지배의 원리’가 이처럼 이념에 불과할 뿐, 현실에 있어서는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됐다고 하더라도, 선거가 유권자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민주적 통제’의 가장 중요한 형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직도 저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성과 양심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선거가 ‘다함께 하는 축제’가 되고, 더 나아가 정치발전을 이룰 수 있음을 변함없이 믿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선거를 통해 ‘우리 고장에 도사리고 있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벅찬 감정은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건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강한 정치의식이 필요합니다. 투표의 ‘합리적 규범이론’이 아니더라도, 선거는 투표결과에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혹자는 그걸 ‘투표행위 그 자체에 결부된 이익’으로 표현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게 바로 우리들의 정치의식을 충족시키는 ‘투표의 즐거움’입니다.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이 그 어떤 다른 요인보다 투표에 훨씬 큰 영향을 준다는 실증연구가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 투표에 참여하고, 선거를 잘 치르기만 하면, 민주시민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거제도에 관한 많은 이론적 실증적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투표를 열심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거제도의 결함을 이용한 정치인들의 장난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거 초장부터 ‘유권자로서의 목소리’가 절실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인-대리인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주인이고, 정치인과 관료는 그들에게 봉사할 임무를 부여받은 대리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대리인을 제대로 감시할 여력이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대리인이 주인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게 그 이론의 핵심입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겉으로는 주민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떠들면서도 안으로는 자기이익을 챙기기에 바쁘다는 것…. 그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디서 본 듯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를 좌절케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대리인을 잘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리고 막연합니다. 그 어려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제 능력의 한계 탓도 있지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그러나 막연하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정말이지, 이번에는 투표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거에 실패한 게 어디 한 두 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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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철저히 감시해야 합니다. 고질적인 혈연·학연·지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로지 지역사회를 위해 살겠다”는 그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필요할 때는 집요하게 유권자로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을 소홀히 했다가 나중에 가서 정치를 탓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 고장의 오늘의 상황에 대한 반성’은 개량적 차원에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선거제도가 운영되는 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면 ‘올바른 선택’이 보입니다. 눈이 크든 작든 ‘정치의식의 눈’은 크게 뜨는 게 좋습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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