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아는 것’이 많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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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무엇보다도 그 지적 수준 만큼 지혜로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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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죄악

역시 사람은 많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지식사회입니다.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만 이 험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무지야말로 ‘근원적 죄악’이라 했습니다. 불교 승려 ‘나가세나’는 박트리아 왕 메난드로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몰라서 짓는 잘못이 더 나쁩니다. 불에 단 쇳덩이를 어느 한 사람은 모르고 붙잡았고, 또 한 사람은 알고 붙잡았다면, 누가 더 많이 데겠습니까?”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데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죄가 더 큽니다.”(밀린다팡하)

불행의 궁극적 기원은 무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무지에 대해선 불교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원전 100년 무렵 이야기지만, ‘우리의 삶의 불행과 비참을 추동하는 연쇄 고리의 메커니즘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불행과 비참의 근원이라는 사실에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적 성숙’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이 ‘선한 목적’ 그 자체일 때 그만큼 선하고, 지식과 선함이 조화롭기 때문에 그만큼 아름답습니다. 여기서의 ‘선한 목적’이란 모든 사람들에 의해 동의되고 승인된 목적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은 모두의 공감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도달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타자를 지배하는 힘’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지식은 드디어 ‘모두를 위한 힘’이 됩니다.

지식과 지혜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지식의 문제’는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체의 문제입니다. 똑똑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어쩐 일인지 ‘싸가지 없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요즘 그런 세상입니다. 무조건 성공하고 보자는 게 삶의 당연한 목표가 되는 사회에선, 지식을 배우는 ‘배움’까지도 스펙의 도구가 됩니다. 그런 사회에선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가방끈이 길다’고 하여 모두가 지혜로운 건 아닙니다. ‘똑똑하다’고 하여 다 ‘성숙한 사람’도 아닙니다. 역시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체화되지 않은 지식을 ‘알음알이’라고 하여 불완전하게 여깁니다. 그런 지식은 사람들의 자만을 부풀리게 하는 심각한 해독을 끼칩니다. 심지어 범죄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은 ‘아는 것이 독’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안다는 사람’은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올바른 삶과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지적능력은 우월성이 검증되는 범주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범주입니다.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만 지식을 구사하는 사람은 그저 ‘머리가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곡사(曲士)의 지평

‘어리석은 사람’보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은 자기 이해와 편견 앞에선 거의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끊임없이 수다를 떨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현실은 늘 즉물적인 차원을 지닌 ‘머린 좋으나 편협한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는 비극이 연출됩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매미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으며, 곡사(曲士)는 진정한 길을 말할 수 없다. 매미는 시간에 잡혀있고, 개구리는 공간에 잡혀있으며, 곡사는 자신이 배운 바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니…”

누구나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논의는 ‘자신의 배운 바에 고착되어 있는 곡사(曲士)’에 중점이 둬져야 합니다. ‘얼음을 모르는 매미’도, ‘우물 안 개구리’도 정작 근본적 원리나 정신에 소홀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곡사의 지평은 한정적입니다.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공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논리와 언변을 동원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까지 동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문제가 이로부터 생겼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대지(大知)를 품은 ‘어리석음’

정말 똑똑해지려면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만큼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울 때, 이해의 폭도 넓어집니다. 좀 우직하지만, 그만큼 관용적이 됩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머리 좋은 줄만 알고, 주변을 무시하는 사람 옆엔 그저 ‘패거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진실입니다. 옛사람의 말대로 “진실은 언제나 상식과 어긋나는 법(正言若反)”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大巧若拙)”입니다. 그래서 어리석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신영복 교수는 그의 책 ‘나무야 나무야’의 한 기행(紀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 맞추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그는 그의 또 다른 책 ‘강의’에서 “이 경우의 어리석음은 그 속에 대지(大知)를 품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진정한 지(知)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知)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머리 좋고 약삭빠르게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함’ 때문입니다.

한 없이 자기를 낮추려는 지혜

진정 똑똑한 사람은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먼저 듣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그런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현실인식에 있어 어느 정도 평등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다 나름대로 현실태를 구성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안다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은 한마디로 주제넘습니다. 자기 머리만 믿고, ‘상대방의 의도를 거꾸로 재며’, 그리하여 건성으로 듣는 건 오만입니다. 원효대사의 ‘진역 화엄경소 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날개 짧은 작은 새는 산림에 의지해서 크고 있고, 송사리처럼 작은 물고기는 여울에 살면서도 편안한 법이니, 낮은 가르침이라 하여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

저는 이 대목이 참으로 좋습니다. 진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낮은 곳의 소리를 듣는 것, 그게 지도자들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리고 지혜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知)는 곧 지인(知人)”이라는 말이 있듯, 근본적으로 지(知)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건 타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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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아는 것’의 과시를 문득 멈출 때, 현실이 제대로 보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없이, 자기 머리만 믿는 건, 현실을 명료케 하기는커녕, 어둠에 어둠을 더할 뿐입니다. 자칫 ‘헛 똑똑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역시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는 ‘지혜’로 풀어야 합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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