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24)] 제7대 도지사 길성운⑨

1958년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초부터 선거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때를 맞춰 자유당 정부에서는 그 동안 별 진전이 없던 제주도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58년 2월말 부흥부 산하에 부흥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여 국방부장관·상공부장관·교통부장관 등 각 부처장관을 위원으로 하는 「제주도개발위원회」가 설치됐다.

이는 제주도개발계획이 부처별로 나뉘어져 너무 산만한데다 관계 부처간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요하고 제주개발을 조속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두 달 여를 앞두고 있는 국회의원 선거를 다분히 겨냥한 의도적인 「형식적 위원회」라고 보기도 했다.

아무튼 지지부진 하던 제주개발에 그나마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 길 지사에게 부흥부장관의 상경지시가 떨어진 것은 대한항공의 전신인 민간항공사 대한항공공사(KNA)의 비행기 DC-3기(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일명 「晩松號)라고 붙였다)가 승객 28명을 태우고 서울~제주간을 처녀 비행한지 이틀이 지난 그 해 3월17일이었다. 총선을 꼭 한달 보름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길 지사는 3월21일 KNA편으로 상경했다. 길 지사는 상경하기 앞서 제주도개발위원회에 건의할 내용들을 도청간부들과 숙의하고 우선 제주개발의 선결문제로서 제주~부산, 제주~목포간 연륙교통수단의 확대와 일주도로확장, 한라산횡단도로복구, 특용작물생산지원, 한라산공원지정 등을 건의하기로 했다.

상경 보름만에 서울 출장을 끝내고 돌아온 길 지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3월중에 제주도개발위원회가 제주시찰을 위해 방문할 예정이며 상경 전에 준비했던 건의자료는 위원회측에 모두 개진했다. 각 부처에서는 제주도에 대한 종합계획을 수립 중에 있으며, 불원간 발표될 것으로 안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제주도의회에서도 각 부락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산간 목장에 대해서도 집중 개발해줄 것과 영세어민을 위한 소규모 어항축조 및 소형어선건조시설 설치 등을 개발위원회에 건의했다.

그러나 각 부처 장관급으로 구성되는 등 거창하게 출발했던 제주도개발위원회는 그해 5월3일로 예정된 총선으로 제주방문이 취소되는 등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해 도민들은 "또 속았다"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유세과정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만과 4.3 문제 집중 제기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등록과 함께 합동유세가 치러지면서 자유당 정부에 대한 도민들의 불만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때까지만 금기처럼 여겨왔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인 비방은 물론 4.3 사건에 대한 문제까지 제기돼 길 지사를 비롯한 관계당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제주시 합동유세에서 김주태(金珠泰) 후보는 "지금의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趙炳玉)이 치안최고책임자로 있을 때 4.3 사건의 비극이 일어났음을 상기해야 하며, 나는 이승만 대통령을 좋아하지만 맹목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자유당과 민주당을 좌충우돌식으로 공격했다.

또 고담용(高湛龍) 후보는 "국회의장 李起鵬은 국회를 행정부에 예속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내가 제주도에 야당인 민주당을 만들려고 할 때 협박장을 여섯장이나 보낸 적이 있다"며 자유당을 맹공했다.

안정립(安正立) 후보는 "자유당의 구호도, 민주당의 구호도 모두 좋으나 국민은 날이 갈수록 헐벗고 있으며 4.3 사건때 어부이던 나의 육촌 형은 재산 무장대에게 한 마리의 생선을 주었다는 이유로 총살 당했고, 내 동생은 경찰을 위해 일하다가 공비에게 사살됐다. 나를 국회에 보내준다면 국가배상법을 통해서 4.3 사건의 피해를 보상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고정협(高晶協)은 "高湛龍이가 자유당을 욕하고 있지만 그는 1954년 자유당위원장에 당선됐을 때 민주당을 위선적이라고 해놓고 지금은 민주당으로 출마하고 있다"며 상대후보에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선거는 날이 갈수록 과열됐으나 5월3일 예정대로 치러졌다. 투표결과 제주시와 남제주군에서는 자유당 공천자이자 현역의원인 강경옥이 낙선되고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소속의 현오봉(玄梧鳳)이 당선됐는가 하면 야당출신 高湛龍이 의정에 첫 진출하는 이변을 낳았다.

무소속 현오봉 의원, 야당출신 고담용, 자유당 김두진 후보 당선

자유당 후보의 낙선은 3대에 이어 4대에도 계속됐으며 김두진 의원만이 북제주군에서 겨우 당선됐다.
 
선거 3일후 남제주군에서 자유당후보로 출마했던 강경옥 의원이 "나는 경찰의 공포선거로 떨어졌다"고 폭탄선언 함으로써 제주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강 후보는 "경찰이 모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나를 노골적으로 협박과 공갈, 불법가택수색, 연설방해로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4월30일에는 길성은 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치안확보를 못하면 군대라도 동원해 공안을 확보해달라고 요구까지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선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길 지사는 "강 후보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경찰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토록 하겠다. 그리고 나의 기억으로는 4월30일이 아니라 5월1일 오후1시30분께 강 후보의 전화를 받고 즉시 경찰에 연락했다"면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자유당은 선거패배로 주류계가 몰락했고 무소속의 玄梧鳳 의원이 자유당에 입당함으로써 정계개편을 가속화 시켰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모처럼 평온을 되찾아 가는가 싶던 제주도에 또다시 도제폐지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고담용 의원, 제주도제 폐지문제 제기…제주사회 파문

1958년 9월 중순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누적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긴축재정이 불가피하자 정부기구의 축소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자유당 정책위원회는 이를 위해 전매청·해무청·외자청을 관계부처에 흡수하고 제주도제를 폐지하여 전라남도에 통합하며 충청남·북도를 충청도로 단일화 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했다.

이와 같은 정부 방침을 전해들은 도민들은 다시 되살아난 「도제폐지 악령」에 크게 불안을 느꼈다. 전인홍(全仁洪) 제주도의회 의장은 "의장직을 벗어 던지는 일이 있더라도 도제폐지반대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는 각오를 천명했다. 9월13일에는 김도준 부의장이 소집한 긴급회의에서 폐도안을 결사반대한다는 결의안을 각계에 진정키로 하는 등 도민들의 저항은 이전보다 더 심했다. 다음날 강성건을 단장으로 하는 제주도제폐지반대투쟁위원회가 상경하여 도제폐지의 부당성을 관계기관에 주장했다.

서울에 있는 제주출신 김두진·현오봉 국회의원도 이런 소식을 듣고 "폐도는 절대 안된다"면서 현오봉 의원은 9월16일에 중앙청 회의실에서 개최된 자유당연설회의에 참석하고 폐도를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도제폐지안은 야당출신의 高湛龍 국회의원이 내무부장관에게 "제주도를 폐도하여 전라남도로 통합할 용의가 없느냐"는 국회 對 정부질의에서 불거져 나온 것으로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더구나 高 의원은 당선직후 제주도경찰국 폐지를 거론하는 등 도민들과 행정당국으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받아온 터 여서 이번 도제폐지마저 高 의원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전해지자 도민들은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1958년 9월20일 관덕정에서는 제주도내 애국단체연합회 주최로 「도제폐지반대 도민총궐기대회」가 열려 자유당정부와 폐도거론자인 高湛龍 의원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고담용 의원 "자유당이 나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음모다"

궐기대회에는 당사자인 高湛龍 의원도 참석했다. 도제폐지반대투쟁위원회 박치순(朴致順) 위원장은 궐기사에서 단상 바로 앞에 있는 高 의원을 가리키며 "高 의원의 머리가 돌았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高 의원이 제의한 경찰국폐지도 도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예로 든다면 한쪽 눈이나 코를 없애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몰지각한 행동이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박 위원장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高 의원은 궐기사가 끝나자마자 단상에 올라가 "남을 욕했으면 해명할 기회를 줘야 될 것이 아니냐"면서 주최측에 강력히 항의하자 식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평소 야당의원인 高 의원에 대한 곱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여당측 인사들의 감정의 도화선을 당겨 버린 것이었다. 고 의원은 졸지에 마이크를 빼앗기자 연단 옆에 선 채 육성으로 "이것은 자유당과 경찰이 나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적인 음모이며, 자유당의 일을 고담용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모략이다"고 주장했다.

  고 의원은 궐기대회가 끝난 뒤 즉각 기자회견을 가지고 폐도에 따른 자신의 입장을 해명했다.
 
"1958년 7월16일 치안국 별관 3층에서 내무부장관과 차관을 비롯해서 각 국과장 등 100여명이 참석한 추경예산안 심의에 따른 대정부 질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제주대학장을 겸임하고 있는 도지사를 경질하여 제주출신 인사로 기용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은 데 이어 치안국장에게는 역시 경찰국장을 제주출신으로 기용할 용의가 없느냐고 질의한 바 있다. 그러나 모두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경찰국을 과(課)로 축소해서 제주출신 경찰과장을 임명하면 보통 3년은 유임하게 될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 그런 과정에서 충청북도 자유당 출신의 유순식(柳順植) 의원이 '고 의원, 그러지 말고 우리 道에서는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통합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제주도를 전라남도로 통합하는 지방자치법개정안을 공동명의로 제출하자'는 얘기를 했지만 나는 묵살한 것 뿐으로서, 이는 나를 모략하기 위한 계획적인 음모이다"
 
  그 후 제주도제 폐지는 도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정부와 여당이 또 유보함으로써 일단락됐으나 제주도내 여당과 야당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앙금을 남겨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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