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31)

제주는 두 계절을 동시에 품고 있는 땅입니다. 겨울과 봄, 봄과 여름, 여름과 가을, 가을과 겨울이 모호하게 엇물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봄이 지난 버린 것 같을 때에 한라산을 오르면 막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확연하게 구별될 정도의 계절이 공존하기에 중산간지역이나 평지의 봄을 만끽하지 못했을 때에 발품을 팔아 한라산을 향하면 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평지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흰양지, 흰그늘용담, 세바람꽃, 좀민들레에서부터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앵초까지 야무진 형상으로 고운 빛깔로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앵초의 종류도 많아서 흰색 꽃을 피우는 흰앵초와 잎이 단풍잎을 닮은 큰앵초, 바위에 붙어 자라는 설앵초가 있습니다. 제가 한라산에서 만난 것은 진분홍색의 큰앵초와 계곡 바위에 피어있던 설앵초입니다.

   
앵초의 학명은 'Primula sieboldi'인데 영어로는 '최초의 장미'라는 뜻의 프림로즈(primrose)라고 합니다. 5월의 꽃으로 잘 알려진 장미의 선조가 되는 셈이죠. 이른봄에 피어나는 앵초는 꿀벌을 만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기에 '시집가기 전에 죽어버리는 꽃'으로도 불립니다.
이쯤이면 '젊은 날의 슬픔'이라는 꽃말이 와 닿을 것입니다. 운 좋게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수술에 앉으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곤충들의 날갯짓이 드문 이른봄에 피어난 앵초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어버린 가련한 처녀의 슬픈 운명을 간직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픈 꽃말말고도 '행운'이라는 꽃말이 있습니다. 따스한 봄날 흔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앵초의 예쁜 모습을 자생지에서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도 '행운'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꽃말이 없는 모든 꽃들에게 '행운'이라는 꽃말이나 '행복'이라는 꽃말을 달아주면 참 좋을 것도 같습니다.

앵초는 한자로 '櫻草'라고 쓰는데 분홍빛 꽃을 피우는 앵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앵초는 '풍륜초'라고도 불리는데 꽃 모양이 영락없이 풍차를 닮았습니다. 바람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차, 늘 그 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그 자리를 돎으로 인해서 방아도 찧고, 전기도 만듭니다. 바람을 품고 돌아감으로 인해 또 다른 것을 창출해내는 풍차를 닮은 꽃으로 바람개비를 만들면 풍륜초의 그윽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 들판을 감쌀 것만 같습니다.
그 외에도 취란화, 앵미, 앵채, 연앵초라고도 불리우니 아마도 앵두와 많은 연관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앵초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옛날, 독일의 작은 마을에 리스베스라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어.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몸이 아파 오랫동안 앓아 누워 계셨지. 어느 봄날 앵초꽃을 몹시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들은 꽃으로 가득하겠지? 들판으로 나가 앵초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처럼 말했어. 리스베스는 곧 앵초꽃을 구하러 산 속으로 들어갔단다. 앵초가 많이 피어있는 습지를 찾아서 부지런히 걷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리스베스, 리스베스!"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에 예쁜 앵초꽃을 꽂은 예쁜 여인이 서 있었어.
"나는 앵초의 여신이란다. 너에게 이 꽃을 줄 터이니, 저 산 너머 성으로 가서 이 꽃으로 그 성의 문을 열어라. 그 성에는 네가 갖고 싶은 보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하나만 가지도록 하여라."
리스베스는 앵초의 여신이 시키는 대로 성을 찾아가 앵초꽃으로 성문을 열었단다. 성에서는 멋지고 잘 생긴 왕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 왕자는 리스베스를 반갑게 맞이하여 성안의 보물창고로 안내했어. 착한 리스베스는 온갖 화려한 보석과 황금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는 보물을 하나만 골랐단다. 이것을 본 왕자가 말했어.
"과연 리스베스 아가씨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셨군요. 저랑 결혼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머니의 병도 고치고 멋진 왕자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앵초는 간직하고 있단다.

   
꽃이 예쁘니 꽃 이야기도 풍부합니다. 그것도 행운이겠지요.
한라산 윗세오름은 아직 봄이 멀었는지 진달래가 막 꽃몽우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앵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곡의 양지바른 꽃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앵초가 인사를 했습니다.
'그 먼 길을 올라왔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지요.'하는 듯 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눈인사를 나눈 앵초, 어쩌면 저 앵초가 한라산에 피어나는 수천 수만 송이 앵초 중에데 보물성을 여는 행운의 열쇠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라산에서 막 피어나는 앵초를 보니 아직 봄이 우리 곁에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휘파람이 절로 납니다.

제주에서 만나는 꽃들, 그러나 늘 마음 아픈 것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진다는 것입니다. 작게는 사람의 손으로 아니면 포크레인으로 이 예쁜 꽃들을 마구 짓밟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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