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의 인문고전 전문도서관인 제주치과의사신협 부설 불기도서관(관장 신용래)이 2018년 새해를 맞아 2월 중순부터 ‘자본주의와 인간’ 특강을 마련했다. 중상주의에서 현대 행동경제학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이 바라본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방향을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다. <제주의소리>가 창간 14주년을 맞아 불기도서관과 공동기획으로 <인문강좌 톺아보기> 코너를 마련했다. ‘자본주의와 인간’ 특강을 시작으로 불기도서관이 연중 진행하는 인문고전 강좌를 곱씹어 뜯어보는 ‘다시 읽기’ 시간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말> 

[불기 인문강좌 톺아보기-자본주의와 인간](2)자본주의 고도화와 다변화된 인간론 /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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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에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맹위를 떨치면서 자본주의가 삶의 모든 단면에 파고드는 세계화와 국제 분업화는 더 가속화되어 왔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과 빠른 기술변화로 21세기 들어 상당수 국가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 증대됨과 동시에 소득 불균형과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문재인 정부도 일자리 중심경제를 내걸고,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리가 경제학 고전을 다시 들추어보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미래의 대안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오늘날 시도되는 각종 경제정책은 과거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고민과 통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번 애덤 스미스에 이어 이번에는 마르크스, 케인스, 하이에크, 폴라니 이렇게 4명의 사상가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마르크스, 자본주의 너머에 진짜 인간이 있다
낙관이 가득했던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대와 다르게 1825년 대공황을 분수령으로 주기적인 경기변동과 불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제도는 여전히 매우 취약했으며, 기계제 생산이 고도화될수록 노동자들은 오히려 더 기계 부속품처럼 다루어지고 착취당했다. 이로 인한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 간 대립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웬, 생시몽, 푸리에 등 반자본주의 사상이 대중에 파급되면서 노동문제, 사회개혁, 사회주의 문제가 주요 이슈로 대두되었다.
  
이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마르크스(1818-1883)는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고 다가올 세상을 예언했다. 기존의 고전경제학은 ‘시장’이라는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이익추구에 기반한 인간심성을 전제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집합적 세력(‘계급’)간의 이해관계와 대립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추가했다. ‘이기적 개인’이라는 인간본성은 자본주의적 계급사회 안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심성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개발하고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다. 계급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계급사회에서는 착취와 대립이 일상화되어 있지만, 만일 계급이 사라지는 사회주의 안에서 순수 본연의 노동을 해나가게 되면 인간은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의 도래는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바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착취의 모순구조 가운데 반드시 전개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에게 지불임금을 넘는 노동을 착취하고, 이렇게 발생한 잉여가치를 이윤으로 남겨 자본을 축적한다. 특히 사회 발전의 긍정적인 요소로 기대했던 ‘기술 진보’는 필요 노동자 수를 줄여서 실업자를 양산하고, 노동자를 경쟁상태로 내몰아 궁핍한 생활수준에 머무르게 한다. 이때의 노동은 자아실현과는 관계없는 ‘소외’된 노동에 불과하다. 마침내 계급정체성을 자각한 빈곤해진 노동자들이 집단적 힘을 갖게 되면, 자본가들과의 계급투쟁에서 승리해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 체제로 대체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예견했다. 다만 이렇게 도래할 앞날에 대해서는 막연한 서술에 그쳤다.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피케티(Piketty)가 과거 통계를 통해 보여준 대로,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또한 세습자본주의에 의한 신계급사회가 도래했다는 우려가 깊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런 소득 불평등이 점차 더 확대될 것으로 보았고, 그것의 원천으로 생산수단 유무에 따른 ‘생산력’의 차이를 들었다. 역사적으로 제한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1차 산업혁명부터 오늘날 4차 산업혁명 도래의 시기까지 재산에 기초한 그 차이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특히 AI(인공지능)과 같은 빠른 기술진보의 속도를 인간이 따라가지 못해 마르크스가 예견했던바 기술적 실업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오늘날 마르크스가 재조명받는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다. 

케인스, 불확실성에 대한 고려로 자본주의 구원
20세기 초반 사회주의국가에서 성취된 빠른 성장과 함께 1929년 세계대공황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을 선언한 마르크스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이때, 자본주의의 부분적인 개량과 부분적인 사회화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 구원에 나섰던 학자가 바로 케인스(1883-1946)다. 케인스에 따르면, 대공황과 실업자의 증가는 ‘불확실성’에 기반한 인간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며, 자본주의를 원활하게 굴러가게 하려면 불확실성 하의 인간의 심리와 동기를 철저하게 다뤄야 한다.

인간은 장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맥락에서 소비자의 소비성향, 기업가의 투자의 한계효율, 자산보유자의 유동성 선호라는 3대 심리법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미래투자에 대한 수익률을 예측했을 때 대출금리가 5%이고 투자기대(투자의 한계효율)가 10%이면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서 투자한다. 한편 불확실성이 만연하면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껴 투자와 소비 대신 화폐를 비축하고자 한다(유동성 선호). 이때 저축 과다는 디플레이션, 유효수요(투자 및 소비)의 부족, 나아가 과소 고용을 야기하며, 경제는 침체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시경제의 메커니즘 하에서 시장은 자유방임 상태로 유지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고, 정부는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정자본주의를 주장한 케인스는 경제순환의 조율을 위해 재정정책이나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권고했다. 정부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서 투자의 사회화를 통한 고용증대와 사회복지 등에 지출한다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경제가 다시 활성화될 것이다. 정부는 불경기 때에는 재정적자를 동원해 유효수요를 증진시키고, 호경기 때에는 재정흑자로서 과거 재정적자 부분을 보전해야 한다. 한편 중앙은행은 통화량을 변화시킴으로써 이자율과 유효수요 및 소득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케인스의 주장은 오늘날 소득주도 성장과 같은 국가정책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오늘날 문재인 정부에서 강조하는 치매국가책임제, 최저임금제 등과 같은 정책 역시 이러한 케인스식 발상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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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마르크스, 케인스, 하이에크, 폴라니.
하이에크, 정부개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20세기 케인스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등장에 맞서,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를 부흥시키려는 현대 경제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시장우위론을 지지하는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이후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 정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하이에크(1899-1992)는 그 철학의 토대를 제공한 핵심 사상가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서구 사회가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수정자본주의 그리고 복지국가 같은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로 나아가게 된 원천은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에 있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시도들이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실상 현상과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소위 ‘무지의 상태’가 사회와 사람 사이에 일반적이다. 아무리 탁월한 개인이라도 이성의 발휘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 지식은 파편화되어 있고 불완전하다.

한편 이처럼 인간의 지식이 완전하지 않은 현실에서 정치 사회질서(행동규범과 제도적 장치)는 의도적인 집단의 목표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행동의 결과로 형성된다. 특히 시장질서는 집단 차원의 어떤 인위적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무지한 상태의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자생적 질서’다. 이러한 자생적 질서를 국가 차원의 인위적인 질서로 대처하는 것은 위험하다.

대표적인 자생적 질서인 시장세계 안에서 인간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고 훌륭한 성과를 창출해낸다. 다양한 개인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가격메커니즘은 인간의 욕구와 기대를 가장 적절히 충족시켜주는 최고의 방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라는 권력집단이 인위적으로 사회계획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시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근대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모든 국민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이상가가 아니라 특수 이익집단의 논리를 대변하는 권력가에 머문다. 국가의 사회계획은 국민 전체의 보편적인 공익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계획을 실행하는 데 머무를 것이다. 아울러, 앞서 보았듯 인간은 총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통합적이고 공학적인 사회계획 자체가 공상에 불과하며 무용하다. 케인스식의 정부계획이나 사회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와 달리 시장경제를 우위로 하고, 법치주의 하에서 최소한의 제한된 권력을 갖는 정부만이 부패 방지와 질서, 정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이에크의 사상은, 앞서 보았던 대로, ‘이성이 발휘된 동감’을 주장한 스미스의 사상과 비교된다. 스미스가 생각한 세계는 사회적 가치에 포섭된 시장질서인 반면, 하이에크가 상정한 세계는 철저한 ‘시장 지배하의 국가’다. 하이에크는 신자유주의를 제창하면서 특정 목적(국영기업, 가격수량조절, 복지제도 등)을 위해 정부가 경제적 행위를 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시장경제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방, 사법, 도로항만, 통화제도, 도량형 규준, 공적 정보 제공 등 최소한의 역할은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시장우위를 신봉했음에도 하이에크는 제한적인 선별적 복지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소득 또는 복지 안전망의 정당성은 인정했다.

폴라니, 시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귀한 가치
19세기 이후 20세기 초까지 시장경제사회의 팽창과 부작용의 확대, 그리고 그 사회적 반작용을 지켜본 칼 폴라니(1886-1964)는 인간과 사회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촉구했다. 폴라니가 보기에 인간은 오직 경제적 이익 추구에만 함몰된 ‘시장형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다양한 욕구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 동물이며 ‘총체적 존재’의 속성을 지닌다.

시장경제가 중심이 된 근대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는 시장의 부속물로 전락했다. 시장경제로의 대전환은 사회 전반이 경제적 욕망과 시장거래 관계에 매몰되고, 노동, 화폐뿐만 아니라 생명의 기반인 자연마저 상품화되도록 만들어놓았다. 인간적 삶의 모든 측면은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환원된 것이다. 경제가 사회공동체 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경제 속으로 빨려들어 일종의 주객전도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토지, 노동, 화폐)이 상품화된다면,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한 저항(소위 ‘이중운동’)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폴라니에 따르면, 사회는 스스로 자기를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 뉴딜, 사회주의 등 20세기 세 가지 역사적 현상이 보여주듯, 사회의 자기보호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시장의 그릇된 환상에서 벗어나 사회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인간의 본질의 차원에서, 자연을 본래적인 속성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호혜성과 재분배의 가치에 입각해 사회가 재구성되며, 경제는 사회공동체의 적정한 규제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시민사회, 경제, 자연의 본래적 기능이 적절히 융합된 복합사회에서는 자유와 평화 등의 목표가 설정된 후, 국가의 권력과 규제가 이에 맞게 제도화되며 경제도 사회친화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폴라니가 주창한 민주적 사회주의(시민공동체 사회주의)는 시민사회가 주체가 되어 호혜성이 발휘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최종 정리를 해보면, ‘시장경제의 틀’ 속에서 마르크스는 이를 완전히 부정했고, 하이에크는 완전히 긍정한 편에 속한다. 반면 케인스는 중간적 입장에서 보완책을 강구했다. 한편 폴라니는 스미스와 유사한 복합다층적 틀 속에서 사회우위론적 관점에서 과도한 경제(지상)주의를 경계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제학자들은 행복한 삶,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고, 미래의 비전과 정책에 대해 고민했다. 이들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가 빠른 속도로 바뀌고 파편화되는 와중에, 이들 사회경제사상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삶의 지표의 설정과 대안의 검토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강연=김광수 성균관대 교수, 정리=김소영 불기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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