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헌에 비친 제주의 이미지, 17,18,19세기 각 한권씩의 문헌이 남아있어


 국제자유도시를 추구하는 제주특별자치도.
 하지만 100여 년 전 만해도 제주섬에 외국인이 들어온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고, 재앙이라고 그 당시 제주도민들은 생각했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난 23일 중문에서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프랑스학연구센터가 주최한 ‘프랑스 문헌에 비친 제주의 이미지’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되었다.

 제주 섬에 아시아인을 제외하고 최초의 서양인은 언제 왔을까? 대부분은 알고 있겠지만 바로 ‘핸드릭 하멜’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몇 명이 외국인이 간혹 제주에 오거나 살펴보는 일을 했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기록으로 남겼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후 프랑스어로 번역된 ‘하멜표류기’,  18세기에는 프랑스 항해사 ‘라페루즈 항해기’, 그리고 19세기에는 프랑스 외교관 샤이에 롱 베가 쓴 “맑은 아침의 땅 조선” 이 그것이다.

▲ 별도봉에서 바라본 별도(화북)포구. 샤이에 롱 베가 100년전에 도착한 곳.

# 샤이에 롱 베(Chaillé Long Bey)가 기록한 제주의 이미지
 19세기 제주도에 대한 서양인의 기록은 '롱 베' 가 쓴 「맑은 아침의 땅 조선(La Corée ou Tchösen, la terre du calme matnal)」이라는 책 중 ‘De Séoul à l'île de Quelpaërt ou Tchae-Tchiou (서울에서 켈파르트 섬 또는 제주까지)’라는 장에 담겨져 있다. 저자인 롱 베는 프랑스 외교관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그는 1888년 9월 1일 서울의 외무위원회장의 중재로 제주 방문 허가를 얻어, 제물포(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9월 28일 제주에 도착하게 된다.

 그가 내린 곳은 별도(그는 ‘Pelto’라고 표기함). 지금의 화북항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서양인인 그를 보고 “당신은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왜 왔느냐”고 묻고, “외국인은 제주에 올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이어서 “외국인이 제주에 왔다. 불경스럽다. 재앙이다”라는 말이 들렸다고 하며, 많은 사람들이 백인남자를 보기위해 서로 자리를 차지 하려고 다투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별도 포구에서 내린 후, 제주성(Tchou-song 이라 표기함)으로 들어가려고 한 남문 앞에서도 벌어졌다. 그 당시 제주 목사는 외국인이 처음 제주를 방문하였기 때문에 경계태세를 갖추고 그를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몰려드는 군중들을 떼어내느라 관리들의 방망이 질은 쉴 틈이 없었다”라고 적혀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제주목사는 그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신성한 한라산에는 접근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롱 베’는 제주에서 며칠간 머물며 여러 가지 관찰을 하였고, 사진도 찍었으며 몇몇 문서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가 기록한 제주도에 대한 내용에는 1) 제주성에 대한 소개, 2)제주의 삼대 도시(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 대한 인구와 규모, 3) 제주목관아의 건축형식, 4) 밭의 모습과 작물, 5) 동물과 수렵, 어로 행위, 6) 종교와 탐라국 개국신화, 7) 역사속의 백제, 몽골과의 관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그 당시 제주의 모습에 대해 쓰고 있다.

 ‘롱 베’는 서양인으로써 우월의식을 갖고 제주도와 도민들을  하대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온갖 끔찍한 병균으로 들끓는 오두막에서 잠을 자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자신의 처소에 대한 느낌을 썼다. 또한 “중앙 아프리카에서 처럼 제주에서 잘 갖춘 약상자는 미개인의 편견을 없애는데 가장 좋은 무기이다. 불행히도 내가 가진 약의 재고는 곧 다 써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나에게 오는 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바닷물로 만든 조제약을 주면서 그들을 속이는데 힘썼다”라고 쓴 것을 보면 그의 조선인에 대한 우월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 프랑스 탐험가 라페루즈가 그린 제주도의 남단. 한라산과 오름, 용머리해안, 그리고 마을이 그려져 있다.
  # 200여 년 전에도 매우 아름다운 제주의 돌담
 롱 베가 제주를 방문하기 100년 전, 또 한명의 프랑스인이 제주의 남해안을 지나게 된다. 그는 상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제주의 남해안을 따라 동해로 올라가면서 해안을 측량하고 지도를 그려 제주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1797년 출간된 ‘라페루즈 항해기’(Atlas du Voyage de Lapérouse)이다.

 장 프랑수아 라페루즈(Jean-François de Lapérouse, 1741-1788). 프랑스 해군에서 20년을 복무하였고, 당시 미지의 지역으로 남아있던 아시아와 아메리카 해안의 남부를 탐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탐험대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1785년 8월 1일, 프랑스를 출항한 Boussole(부솔) 호와 Astrolabe(아스트롤라브)호는 1787년 5월 21일 켈파르 섬(제주도)근처를 지나게 된다. 이 두 배는 최초로 한국 근해를 지나간 서양 범선이었다.

  라페루즈의 손으로 하멜표류기가 들려 있었고, 1653년 이 섬의 남쪽 해안에 표착했던 스패로호크 선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해안에 접근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라페루즈는 제주의 남단을 5일동안 지나면서, 육안을 통해 제주의 농경지와 오름, 한라산, 그리고 주거지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리고 지도로 그려놓는다. 
  그가 묘사한 제주를 살펴보자.

 "이 토록 아름다운 모습의 섬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약 18~20리에 사이를 보면 약 1000토아즈(Toise, 1토아즈는 약 2미터)의 봉우리가 섬 한가운데에 솟아있는데, 그곳이 섬의 저수지 인것 같다(한라산을 지칭). 대지는 완만하게 바다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그곳에는 집들이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다. 땅은 매우 높은 지대까지도 경작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망원경으로 밭의 구획을 볼 수 있었다. 작게 나뉘어 있는 것을 보면 인구가 많은 듯 했다. 경작기에 따라 모양이 달랐고, 이는 이 섬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위에 적힌 것처럼, 제주의 돌담은 200여 년 전 서양인에게 매우 아름다움 모습을 비쳐진것 같다. 또한 18세기 초부터 어렴풋이 알려져 있던 한반도를 이처럼 매우 가까이서 본 것은 유럽인으로서 그가 처음이었다.

▲ 핸드릭 하멜

# 하멜이 본 제주도
 하멜은 모두가 알다시피,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 연안에 표착한 후,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일본으로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1668년 하멜은 ‘난선제주도난파기(Relation du Naufrage d'un un Vaisseau Holladois)’ 및 부록 ‘조선국기(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하멜표류기’이다.

 "그들이 제주라 부르고 우리가 켈파르트(Quelpaert) 섬이라고 부르는 이 섬은 앞서 말한 위도 33도 32분에 위치해 있고, 조선 본토의 남단으로부터 85~95km 떨어진 곳에 있다. 북쪽해안에는 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배가 들락날락하고 본토와의 왕래가 이루어졌다. 그 해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섬에 접근하기란 매운 어려운데,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암초가 있어서, 만약 날씨가 나빠 그 만을 놓쳐 버리면 닻을 내리고 안전하게 정박할 다른 곳이 없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섬을 빙 둘러서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절벽과 암초들이 많이 있다. (중략)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높은 산이 하나 있고, 나머지 산들은 민둥산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하멜이 표류한 장면을 보여주는 미니어처. 하멜기념관에서 촬영.

하멜은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고, 그후 대정현을 거쳐, 제주목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다음해 5월이 되어서야 서울로 이송된다. 약 10개월 간 제주에 머물면서 그가 경험하고 본 것을 자세히 기록한다.

 위에 적힌 것처럼, 제주도의 바다가 현무암으로 둘러싸여 있어 배가 정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또한 북쪽에 있는 만은 조천이나 화북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중앙에 한라산은 하멜 이외에도 라페루즈나 롱 베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이미지인 듯하다. 또한 하멜은 표기한 ‘민둥산’은 오름이며, 그 당시에 오름에는 인위적으로 조림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내기도 한다.

# 켈파르트섬과 역사문화 컨텐츠로의 활용
 위에 제시한 세 가지 문헌은 17, 18, 19세기의 제주도에 대한 서양인의 기록이다. 특히 이 것 이외에 서양인이 기록한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도 기록자 자신의 시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혹은 그에게 안내해준 사람의 잘못된 설명으로 인해 올바르지 않게 기록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 하멜이 타고온 스페르베르 호를 재연한 하멜기념관

 또한 이 세 문헌에는 제주도를 모두 ‘켈파르트’(Quelpaert) 라고 표기하고 있다. 필자도 처음에는 프랑스어의 Quleque Part(어딘가, somewhere)가 어원인 줄 착각하였지만, 실은 하멜이 표류하기 이전에 제주도를 슬쩍 지나친 영국인 선장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명이 있었다.
 한 가지 덧붙여, 제주도와 유럽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자료들은 학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컨텐츠로서 활용할 수 있다. 현재 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에는 하멜기념비와 하멜상선 기념관이 있다. 하멜 뿐 만 아니라, 라페루즈와 롱베 에 대한 내용 까지 덧붙여 ‘서양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기행코스 개발’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다.

 참고로 필자는 이번 세미나를 연 경북대학교 프랑스학연구센터 연구원들과 함께 라페루즈가 본 제주의 남단을 따라 가보았으며, 샤이에 롱 베가 내린 별도 포구, 그리고 그가 제주성으로 들어간 남문성터를 방문하였다. 그러는 동안 300여 년 동안 서양과 제주의 만남에 대한 사색에 잠기기도 하였다.

▲ 산방산 아래에 있는 하멜 기념비
▲ 제주성을 지나가는 프랑스학 연구센터 연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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