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없는 평화포럼

과대포장된 평화포럼의 성과

제2회 평화포럼이 끝났다. 평화포럼이 끝난 후 제주도와 조직위는 물론 지역언론 또한 이구동성으로 이번 포럼의 '성과'가 매우 크다며 흡족해 하고 있다.

포럼의 제 일의 성과로 드는 노무현대통령의 4·3에 대한 사과는 물론, 6자 회담 당사국간 ‘동북아 평화 정상회의’의 제주 개최 제안 등을 예로 들며 북핵문제의 해결과 동북아 평화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에서부터, 정몽구회장의 ‘동북아 경제 와이즈맨 라운드 테이블’ 개최 제의로 제주가 동북아의 경제 번영을 주도하는 아시아의 ‘다보스’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찬양 일색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동북아 평화정상회의’나 ‘동북아 경제포럼’ 모두 한국 측이 '제안'한 것에 불과하며, 이 제안의 성사여부는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물론 향후 정부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제기하는 것은 이 '제안'이 확정된 것인 양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과찬은 삼가는 게 좋다는 말이다.

4.3관련 사과가 평화포럼의 최대의 성과라고?

또한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4·3사건에 대한 정부차원의 사과도 구분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평화포럼 참석을 계기로 가진 제주도민과의 대화에서 도민들의 가슴속에 응어린 져 한(恨)으로 남아있는 4.3사건에 대해 국가차원의 사과를 한 것은 분명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것도 엄밀히 보면, 평화포럼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4·3유족과 도민에게 사과를 한 것은 "4·3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국가권력의 잘못한 점이 드러날 경우 사과하겠다"는 그간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는 점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의 확정이 이 사과를 이끌어 낸 제일의 공신이라 할 수 있다. 즉 평화포럼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의 사과는 예정돼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말 그대로 포럼 참석의 '계기'로 평가해야 할 뿐 포럼 자체의 성과로 과대포장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또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포럼 참석자들이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조만간 있을 제2차 6자회담에서도 성공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는 일부 언론의 평가는 주관적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 객관적 분석기사로 보기 힘들다.

외교관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한 일부 현직 대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포럼 참석자들이 각각의 나라를 대표하는 현직 장관이나 고위 외교관들이 아니라 전직이기에 그렇다. 러시아의 프리마코프도 전 총리이며, 윌리암 페리 또한 미국의 전 국방장관이다. 일본에서 온 아카시 야스시 또한 전 UN사무차장 자격으로 참여했고, 메이 자오롱 또한 중국 전 인민외교학회장으로, 도널드 그레그 또한 전 주한 미국대사이다.

페리든 그레그든 과거 미국의 클린턴 정부 시절의 고위 관료들이며 프리마코프 또한 옐친 시절의 인사가 아니던가? 물론 이들이 아직까지도 그들 나라에서 갖는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분명 현재의 외교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권한은 없다고 보기에 하는 말이다.

페리와 그레그가 평화를 말한다?

또한 윌리엄 페리가 누구던가? 그가 평화를 얘기할 자격이 있는가?
보스턴의 재벌 페리 가문의 자손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는 1994년 1월부터 클린턴 정권의 국방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즉시 북한 핵 의혹 위기를 부추기며 미·일 신 가이드라인 성립을 위한 군사적 긴장을 조장했고, 1994년 한반도 핵위기 당시 전쟁불사론을 외쳤던 강경파의 대부이기도 하다. 1997년 1월 장관 퇴임뒤에도 1999년까지 북한 핵 의혹 문제를 둘러싼 정책조정관으로서 한국·북한·일본·중국을 정력적으로 오갔다.

페리는 군수 기업인 GTE 실베니아(GTE Sylvania) 임원을 맡은 뒤 스스로 ESL이라는 군수 기업을 창업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7년부터 국방부 기술 자문을 10년간 수행하여 1977년부터 카터 정권에서 국방 차관이 되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북한 문제와 관련된 외교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재벌이 배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페리 자신은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보이지 않는 전투기 스텔스'의 기술 개발로 스텔스를 만든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는 스탠퍼드대학교 국제안전보장군비관리센터의 소장을 맡아, 표면상의 직함은 고리타분한 수학자였다. 하지만 이면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투자은행 함브레히트 & 퀴스트(Hambrecht & Quist)의 경영자로서, 또 군수기업인 '기술전략연합사(Technical Strategies & Alliances)' 회장으로서 거대한 사재를 축적하였다. 이라크 군사 분쟁과 아시아의 긴장, 그리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공격이 부의 축적을 가능케했다.(이상은 '미국의 경제 지배자들'에서 인용)

그레그는 또 어떤 인물인가?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고 최종길교수가 사망한 73년 당시 한국주재 미 중앙정보부의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는, 카터 미행정부시절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20사단이 광주지역으로 재진입하기 전인 5월 22일 백악관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당시 미국무장관 주재의 고위관계 대책회의에 참석(당시 백악관 안보비서관 자격), 한국군 부대 이동을 승인、이를 전두환씨등 당시 신군부측에 전달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진 바 있다(이같은 사실은 미경제일간지 저널 오브 커머스지가 입수한 79-80년 당시의 미국무부 및 국방부의 비밀 문서에 따른 것) .

이러한 페리와 그레그가 이번 평화포럼의 대표적인 초청인사로 거론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말이다. 코미디가 아닌가?

8억원이 투입된 행사 비용

이러한 것은 평화포럼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무관심에서 두드러진다. 국내 주요언론들은 이 평화포럼과 관련한 기사를 다루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개막연설 내용의 일부를 짧게 다룬 반면, 오히려 재계로는 유일하게 참석 동북아판 다보스포럼 창설을 제안한 정몽구회장의 행보를 주목하는 기사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지역언론들이 얘기하고 있는 이번 포럼의 성과를 동의하거나 보도하는 기사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적인(?) 평화포럼과 관련한 외신 보도가 비중있게 다뤄졌다는 얘기도 들은 바 없다.

이번 포럼을 개최하는데 물경 8억원이 투입됐다고 한다. 그 중 2∼3억원이 정부(외교통상부)에서 지원했을 뿐, 도민의 혈세인 5억원(올해 7월에 편성된 추경예산)이 단 이틀 간의 행사를 치르는데 사용됐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른바 해외 유명인사들을 초청하는데 엄청난 개런티가 지불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이번 행사가 5억원의 가치를 지닐 만큼 성과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평화 개념의 희화화를 우려한다

가장 유감인 것은 평화를 주제로 한 포럼이면서 국제적인 평화운동가들은 단 한 명도 초청되지 않았으며, 현 시대의 평화와 관련한 주요한 화두인 이라크전쟁에 대한 어떠한 입장표명이나 논의도 없었다는 점이다.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논하면서 북한측 인사를 초청하는데 실패했고, 또한 제주에서 열리는 평화포럼이면서도 4·3이나 동북아지역의 유사한 제노사이드에 대한 인권과 평화 측면의 접근 프로그램도 없었다. 행사준비 막판에 서중석 교수 등을 토론자로 끼워 넣은 것으로 면피하려 했는지 모르지만...

개념의 회화화 현상을 종종 목격하지만, '환경'에 이어 '평화' 또한 그 짝이 날 판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평화포럼은 '그들만의 평화'를 논하는 자리였을 뿐, 진정으로 '평화'를 고민하는 장이 되지 못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지훈의 쓴소리 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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