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참회록 : 사랑과 용서만이(1)] "내가 치유받기 위해"

오늘부터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이도영선생의 회고록을 연재합니다. 제목은 '이도영의 참회록:사랑과 용서만이' 입니다.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이도영선생이 늘 품고 다닌 화두가 '사랑과 용서'라고 합니다. 그는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기는 아주 쉽다고. 어찌 보면 그것은 자신의 '욕심'(=욕구)를 채우는 일(욕구충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어찌 보면 사랑보다 몇 배의 힘이 든다고 합니다. 왜냐면, 내가 싫어하거나 미워해서 또 어떤 경우에는 저주하거나 죽이고 싶기까지도 한 그런 사람의 행동을 용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선생은 자기 자신이 '치유'받기 위해서 '회고록'이 아닌 '참회록'을 쓰게 됐다고 합니다. 아래 등장 하는 인물 중 일부는 익명으로 바꾸었습니다.(편집자, 주)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를 언제 졸업할꼬 손꼽아 기다리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그리고 졸업식을 하면서 왜 그렇게도 슬피 울었던고...마치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처럼...

왜 당시 선생님들은 모두 훈육주임 같았었는지, 엄청 많이 얻어 맞은 기억밖에 별로 좋은 추억들이 없거든. 국민학교 2학년때 나의 집 앞에 삼촌벌 되는 애가 1학년으로 막 입학했다. 그 반 담임 선생이 일렬로 줄을 세우고 있었는데, 내 반 친구랑 그 반에 찾아가서 "제가 내 앞집에 사는 동네 애다" 라고 하면서 손으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발로 가르쳤다. 그러니 그 담임 선생이 내가 그 애에게 발길질하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나에게 달려 오더니만 다짜고짜 나를 때려......졸지에 멍하게 얻어 맞았다.

공부를 못한다고 또는 주의집중을 안한다고 해서 담임 선생이 나를 불러내어서 교실벽에다 발을 올리고 머리를 땅으로 향하게 해서 물구나무 서기를 안 시키나...정말 학교 가기가 지옥가는 것 같아서 집에서는 학교에 가는데, 풍치림 속에 들어가서 수업을 많이 빼먹었다. 한 3년은 방황한 것 같다.

5학년 때인가,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그네와 시이소오 놀이터가 있었는데, 시이소오는 일제때부터 내려오는 아주 낡은 것... 널판지 중간에 금이 가서 금방 부러지게 생겼다. 교장 선생이 우리 고학년은 그것을 타지 말라고 훈시를 아침 조회시간에 몇 차례인가 했다. 그러나 어린 우리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탔다. 놀이기구라곤 별로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시이소오 한 편에 걸터 앉으니까 다른 두 친구들이 다른 끝에 매달렸다. 내가 그땐 상당히 체중이 나갔었는지, 내가 안 들어 올려지니까 또 한 녀석이 달라 붙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시이소오가 중간에서 그만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담임 선생이 우릴 교무실 복도로 끌고 가서 대나무로 종아리를 얼마나 때리는지...종아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얻어 맞았다...

선생님들은 모두 무식한 '폭군'들 같았다. 말로 가르치거나 훈시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줘 패는 식이었다. 정말로 학교가 싫었다. 아니 선생님들이 모두 모두 싫었다. 죽이고 싶도록...그리고 저주도 속으로 많이 했다....그런데 그 시이소오 사건의 선생님은 얼마 안가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내가 저주해서 죽었나 싶어서...한동안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찾아온 1년 선배(중2)...

"너, 윤희를 좋아하지?" 그러면서 다짜고짜 교실뒤로 끌고 가서는 나를 때리더군.

"왜? 윤희를 좋아하는 게 죄가 되나요?"

"더 이상 좋아하면 안되!"

'???'

그 녀석은 고아원 원장의 아들...좀 텃세를 하고 싶었던 모양. 윤희는 내 국민학교 때 짝궁, 결코 사랑한다, 아니, 좋아한다 말 한마디 못해보고 헤어졌는데...

그리고 한 10년이 흐른 뒤 우린(남4 + 여4 모슬포 동창들) 산방산에 절벽타기를 했다....그녀가 먼저 오르면 내가 바짝 뒤를 따라 오르고...혹시나 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마! 알았지!"

"왜?"

"뒤돌아보면 캄캄 절벽 시퍼런 바닷물이 보여, 겁나거든..."

"이제 다 올라왔어, 안심해도 돼"

그녀는 그만 뒤를 돌아다 보고 말았네...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 수 밖에...그러고는 앞으로 기우뚱...나는 그녀를 절벽으로 밀어 붙이면서...

"정신차려, 윤희야!" 엉겹결에 포옹한 셈이지만...아무 일도 없었다.

앞에 가던 친구들이 우리가 늦게 올라가는 바람에..."뭔 일이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로 제주신문과 방송에 이 아무개 윤 아무개 총각과 처녀가 산방산에서 이루지 못할 사랑때문에 ... .이렇게(?)...

그리고 또 한 25년이란 세월이 물같이 흐른 뒤...

내가 제주도에 교편을 다시 잡으려고 들어갔는데, 그녀는 서울 산다고 하는 소문...서울의 동창 여자친구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어느 봄날 일요일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전화를 받고,

"교회가고 아직 안 돌아왔다" 고 하였다. "누구세요? 친척이세요?" 하길래

"내, 미국서 돌아온 사람, 이도영이랍니다, 이따 다시 전화하지요." 하고 끊었다.

그리고 저녁 8시경 다시 전화를 거니까 또 그녀의 남편이 받았다.

"윤희 바꿔주셔요." 기다리라고 하더니만 바꿔주었다.

"윤희야, 나 도영이다"....너무나도 놀란 그녀...(전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모양)...횡설수설...한 10분정도 그동안 살아온 얘길했나...

그리곤 끊었다. 그런데, 뒷날 아침 새벽 막 학교로 걸어서 출근하려고 신발을 신었는데...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녀의 남편...아주 성난 목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

그녀가 "1월에 제주를 다녀왔는데, 너 거기서 만났지? 만나서 뭐 했어?" 아주 반말로 못할 소리를 퍼붓었다. 내가 응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난, 이 학교에 2월에 처음으로 부임했는데요...한 번도 만난 적 없어요."

"뭐야! 만난 적 없어?"

"난,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만난 적 없어요"

"요즘은 목사라는 놈들이 더해!"

'띠~이잉'

...

"야! 한강에 배 지나간 것 표가 나냐?" 이런 뭔 소리여...

...

"너, 마광수 소설 읽어 봤지?"

"마광수가 뭐요?"

...

"나, 지금 당장 비행기 타고 내려갈꺼야, 꼼짝말고 거기 있어!"

"아니, 나 지금 학교에 출근해야 돼요."

"학교 전화번호가 뭐야?"

"예, 064-738-0000" 입니다"

"가서 죽여버릴거야"

출근을 하고 강의 준비하느라 연구실에 잠깐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으니 그녀의 남편...

"너가 어떻게 해서 윤희하고 친척이야?"

아니 그걸 꼭 따져서 뭘하려고..."모슬포에서는 모두 친척이 아닌 사람이 없어요"

"내 동창 친구 현철이도, 윤희 동생 윤철이게도 물어봐요."

"너 모가지를 잘라 버릴거야"

내 옆방, 제자 교수인 체육과 구철 선생에게 하소연을 하고 보디가드를 부탁했다. 이걸 어떻게?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하나?

"걱정 마세요, 선생님...그놈이 오면 내가 모가지를 비뜰어 놓고 돌려 보낼테니까요...큰 소리치는 놈 치고는 실행하는 놈 없어요...안심하세요."

문제는 학교까지 와서 횡포를 부리면 나만 죽되는 거다....

서울에 있는 소개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미령아, 내가 윤희남편한테 칼맞아 죽게 생겼다...윤희내 부부 간밤에 대판쌈 난 것 같다..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대신 말해줄래...그리고 상황을 전화해줘."

잠시 후에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간밤에 윤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만 잘 잤다고 하더라...그런데 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세운 모양이고..."

윤희 사촌인 현철(서울 동창)이게도 전화를 해서 매부를 달래라고 부탁해 놨다.

"그 친구 요즘 실직이야, 집에서 놀고 있어...윤희는 모 호텔 로비에서 옷가게를 하고...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 봤는데, 노발대발이야 설득이 안되...원래 그런 친구 아닌데...별로 말도 없고..."현철이로부터의 답변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다시는 윤희에게 전화도 못하고...미안하다 소리는 서울 여자친구에게만 부탁해 놓고...

그리고 또 몇년이 흘러서..모슬포에 갔는데...식당에서 그녀의 동생 윤철이를 만났다.

"형님, 우리 누나땜에 욕봤지요?...잊어버리세요."

잊어버려야지 모든 추억들을 뇌리에서 지워버려야지...미련도 지워야지...

윤희하고는 모슬포 극장(영화관)에서 <시집가는 날>(조미령 주연)을 함께 본 것 밖에 없는데...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끌고 들어갔으니까...그건 우리 담임선생이 윤희보고 표를 사고 도영이를 데리고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그때 국민학교 6학년 때...

그 사건이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져서..."윤희는 도영이를 좋아한다"....

내 단짝 남자 친구(원주)가 크리스마스가 되니 친구들에게 카드를 만들자면서 도화지를 한 장 나에게 주었다. 나는 크레용을 가지고 멋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시작하는데...그 친구는 나더러 누구에게 줄 거냐고 물었다.

"응, 윤희에게..."

"야, 너가 만든 것도 보여줘" 그는 숨기고 보여주질 않았다.

그 친구가 그날 이후로 친구들에게 방송을 해데기 시작하고...또 그녀의 집 앞을 지나야 그 친구 집엘 가고 오곤 하는데...

그녀의 집앞을 그 친구와 함께 지날 때면, 윤희 들으라고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얼마나 큰소리로 노래를 나대신 해데는데...그녀의 집 앞을 지날 때는 고개를 떨구거나 멀리 다른 쪽을 보게 만들곤 했다.

소설같은 얘기지만...진짜 다큐멘터리지.

아니, 그게 한낮 꿈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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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6학년" 하고...생각하니까, 이게 Q가 되어서...어릴 적 윤희 친구가 연상되었고...그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윤희네 하고는 이상한 친척이 된다. 우리 고모할머니 한 분이 서림에 시집을 갔는데, 그리고 아들 딸도 낳고 잘 살았고...남편은 일본 무역을 한다고 모슬포 축항에서 오락가락...그런데 윤희 엄마하고 눈이 맞아서...윤희네 식구가 따로 만들어졌다.

아니, 이걸 윤희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 줄 수가 있냐고...그리고 우린 아무리 서로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진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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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의 국민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은 김태규 선생,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줬지....그 선생님 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살다시피...과외공부도 받고...물론 무료일뿐만 아니라 찐빵도 실컷 먹게 해주었고...국민학교 내내 매맞은 기억만 품고 살던 나에게 정말로 아버지같고 형님같은 스승을 만난 것...사막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나는 국민학교 다니는 동안 우등상은 6학년 졸업식에서 처음 받았다...

졸업후 그 선생님은 제주를 떠나 경남으로 전근을 갔고...부산 - 제주 연락선 <제주호>에서 겨울 방학때 딱 한 번 상봉...

그리고 제주에 교편잡으러 들어왔을 때 은사님을 찾아 이곳 저곳 수소문을 했고...도 교육청에 가서 알아보니...후에 응답이 오길 ...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고...그 분은 대정 신도리가 고향이었다고...아마도 내 할머니 친척되는 분이 아니었나 되짚어 본다....

그후 나는 중 고 6년 동아 중 3만 빼고 우등상장을 받게 되었고...선생님과 같은 진짜 선생이 되겠다고 사범대를 지원하고 대구로 갔다. [중 3때 5.16 쿠데타가 터지고 수학 선생에게 영문도 모르고 얻어 터지고 수학 공부를 손떼버려서...그리고 부산에서 퇴학맞고 고교 1년으로 전학 온 여학생 둘이 있었는데 그 애들 하고 거의 매일 밤새도록 놀러 다니느라고...1학기를 다 까먹다 시피하고 2학기 때 되서야 정신을 다시 차리고 공부를 했는데, 졸업식에서는 3년 개근상과 진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4년후 사범대를 졸업하고 모슬포 모교로 돌아온 나, 점점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선도할 아무 실력도 없는 '나쁜 선생'이 되어 갔다. 학생들을 구타도 하고...곧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도 받고...이러다간 내 인생이 말이 아니겠다 싶어서...대학원에 가서 더 공부하고 돌아오리라 맘 먹고 그해 군에 가기 전에 잠적해 버렸다. 몇 달 동안...학교에서는 난리가 났었던 모양...내 친구 아버지가 교장(강달훈)...대구에 가서 골방에서 입시공부. 합격증을 받아 놓고 군입대.

제대 후 다시 대구로 돌아가고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되었다..........

내 대구 은사님 중 한 분이 우리에게 늘 하시던 말씀 "물 건너간 민족들이 잘 된다...그건 바로 모험심과 개척정신이야..."

그래서 인지 지금도 나는 태평양 물건너가서 광야를 개척 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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