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참회록 : 사랑과 용서만이(2)]용서는 사랑보다 힘들다

말로는 참 쉬운데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가장 힘든 게 두가지 있다.

'사랑'과 '용서'.

오죽했으면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을까.

용서는 사랑보다도 몇 배나 더 힘든 것이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남을 용서하라"고 한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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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 학교 생활에서 '얻어 맞은 기억' 중에 가장 큰 사건은 고3 때였다.

3학년 1학기때 수학 선생(김 아무개)이 아주 얄밉게 우리를 대하기 때문에 골탕을 먹이려고 전학년(두 반)이 1학기 말 수학 시험에 백지동맹을 했다.

나와 내 단짝 친구가 주동자로 걸려 들었는데, 훈시하는 송 모교장에게 정면으로 도전해서 양쪽 고막이 터지도록 얻어 맞았다.

우리 고3은 이 교장의 훈시를 듣기 전에 대운동장에서 전교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훈육주임과 담임선생들로부터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세번씩이나 얻어 맞았지, 여학생들은 손바닥을 회초리로 맞았고...분이 하늘까지 치솟았지만 반항하는 녀석들이 한 놈도 없었어...그런데 내 단짝 친구는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나중에 알고 봤더니만, 교장실에 끌려가서 무릎꿇고 앉아 있었다는 거야...시험시간이 끝날 때까지 각자의 책상에 앉아 있다가 종치면 일제히 백지를 내기로 했는데, 그 친구는 시험지를 받자마자 이름 석자만 써서 시험감독 선생에게 내고 교실밖으로 나가다가 복도에서 교장에게 붙들렸다고 하더군.

그 교장은 서북청년단 출신, 별명이 "백두산 호랭이"...아주 '독종 호랭이'었어...[서북청년단이란 평안 남북도 출신으로 구성된 반공단체, 제주4.3항쟁의 원인제공]

백지동맹을 한 우리를 대강당에다 무릎꿇고 앉혀놓고, "빨갱이 사주를 받아서 했다"고 훈시의 첫 마디...내가 맨 앞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용수철 처럼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교장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대들었다: "교장 선생님, 그 말씀 취소하십시오!"

아닌 홍두깨를 당한 교장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더니만 나에게 맨손으로 뺨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뺨만 아프냐 너 손바닥도 마찬가지로 아플 것이다' 하고 오기로 끝까지 도망도 안가고 꿈적도 않고 맞았다. 양쪽 귀에 아무 소리도 안들리더군.

그래도 화가 덜 풀렸는지 식식거리다가 학생들 앞에서 챙피도 하고 그래서인지 후다닥 나가버리더군.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일찍 하교해 버리고 나는 텅빈 교실 내자리로 돌아가서 학교가 떠나가라고 엉엉 큰소리로 울었지...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눈물이 다 마르도록...학교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싶기도 하고...교무실에서 종회를 마친 내 담임 선생(경북사대 화학과 출신)이 교실로 돌아왔어.

나를 달래려고 무진 애를 썼지. "나는 귀가 안들린다. 나를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 선생님과 함께 모슬포 대정보건소에 진단받으러 갔다. 의사 선생님(서성제, 경북의대 출신) 말씀이 양쪽 고막이 다 터졌다고 했다. 그때 나는 거의 절망적으로 들렸다. 이제 나는 병신이 되는가 싶어서...울면서 그 의사선생에게 진단서를 끊어달라고 했지...그런데, 내 담임 선생이 극구 말리는 거야.

나는 그 교장선생을 파면시키겠다고 주장했고, 그 담임 선생은 나를 말리느라 애가 탔지.

교장은 나를 퇴학시키겠다고 으름짱을 놓고...결국 나를 퇴학시키지도 못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되었지만...

학교에서는 특별지시가 우리에게 떨어졌다. 백지동맹 사건을 학교 밖에 나가서 발설하지 말라. 소위 함구령이었다. 당시는 한일회담 반대로 육지 대학과 심지어는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소위 6.3사태) 모두 학교가 문을 닫았고 조기방학을 실시했었지...

내가 너무 억울해서 하소연할 사람을 찾아서 외사촌형(김평중, 경북사대 화학과 4년)을 찾아갔었지, 형은 내가 들어서자 마자 벌써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나를 무척이나 위로해 주었다. 그 이종사촌 찬일(나와 같은 반)이가 집에 가는 길에 들려서 고해 바친 모양.

나는 고막이 터지는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성질은 불같아서 만약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면 학교가 뒤집어졌을 터였다.

'빨갱이'는 그때부터 내 평생의 화두가 된거야. 내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을 캐는 거야. 아마도 나를 최근까지도 'Red complex'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는지도 몰라. [이 '빨갱이 사건' 말고 또 하나 더 있지, '호로자식 사건'이야...이것도 짚고 넘어가야 돼]

그때부터 나의 반항(비폭력 무저항)이 시작되고 나와 동조하는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때는 중머리처럼 빡빡 깍아머리 시절...나는 머리를 절대로 깍지 않겠다면서 맞섰다. 교장실에도 몇번씩 불려갔지...

"머리 깍아!"

"돈도 시간도 없습니다."
....

교감 선생인 같은 급우 태욱이 아버지는 제봉가위를 바지 뒷주머니에 차고 다니다가 교실 복도에서나 운동장에서 붙잡히는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 놓곤했지...나의 할아버지에게 혼줄 당할까봐서인지 나의 머리는 건드리지 않더군...힘없는 급우들 머리만 작살을 내는거야....태욱이 아버지는 나의 먼 친척, 나의 할아버지 성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터.

결국 졸업때까지 나는 머리를 깍지 않았다. 우리는 갑오경장 때 상투를 짤리우던 유림들이 외치던 소리를 반복 제창했었지: '가단두 발부단'. [내 목을 칠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는 못깎는다]

교장이 우리가 머리를 깍지 않으면 함께 졸업기념사진을 찍지 못한다고 해서 우린 그만두라고 했지, 결국 대정고 12회 졸업생은 졸업앨범이 없는 대정고 사상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나는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어. 핑계는 대구에서 대학입학시험 치룬다고 가서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교장을 다른 학교(제주여고) 복도에서 만났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인사도 안했어. 그것으로 끝이야. 그후 만날 일이 없었으니까.

'빨갱이'란 말 한마디 때문에 평생 원수가 되고 만셈이지. 그 교장은 은퇴후 제주시에 산다고 말을 들었는데, 아들 잘 못 둬서 쫄딱 망했다고 하더군.

   
 
 
그게 깊은 상처를 줄 줄은 그 사람은 몰랐을거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오죽했으면 그 누군가가 말했을까.

모두 무지의 소치라고 본다. 나 자신부터 회개(참회)하고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화가 내맘과 몸속으로 깊이 파고드니까 나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되는거야, 그래서 용서를 빌기 위해서...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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