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삼의 한라산 편지(20)] 제주의 상징새/ 큰오색딱따구리

그동안 중단됐던 오희삼 님의 한라산 편지가 다시 연재됩니다.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에 못이겨... 한라산 봄소식과 함께 제주의소리에 새로운 편지가 도착했네요. 독자들의 성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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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하셨는지요. 오랜 만에 편지를 쓰자니 봄 소풍 나온 아이처럼 설렙니다. 기나긴 겨울의 터널을 건너온 숲에는 어느 새 봄기운이 일렁입니다. 우듬지 끝을 스치는 바람결이 매섭기는 하지만, 옷섶을 파고들던 한겨울의 날카로운 비수가 다소 무디어진 듯합니다. 얼었던 대지를 녹이는 봄날의 햇살이 나목(裸木)의 숲 속에 닿으며 생명 가진 것들이 뿜어대는 열기로 봄의 길목에 접어드는 숲은 생기로 넘쳐나지요.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산개구리의 몸에는 겨우내 제 몸을 품었던 흙덩이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저들의 삶터인 산속의 연못을 찾아 힘겹게 몸을 굴리는 산개구리의 둥글고 맑은 눈망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애처로움에 안쓰럽기도 합니다.

오므린 뒷다리를 딛고 힘차게 도약을 해보지만 산개구리는 이내 코앞에 쓰러지고 맙니다. 동면(冬眠)하는 동안 제 몸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탓에 힘을 잃은 게지요. 계절이라는 자연의 세계에 적응하며 힘겨운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산개구리의 몸부림, 생명 가진 것들이 뿜어대는 봄을 향한 치열하고 엄숙한 원초적 본능이겠지요.

어디 산개구리뿐이겠습니까. 두터운 대지를 뚫고 피어나는 봄날의 꽃들이 그러하고, 한겨울 차가운 바람 속에서 겨울눈을 품고 마침내 새잎을 틔우는 모든 수목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봄인 게지요. 만물이 새로운 생명이 기운으로 생동하는 봄인 게지요. 얼음새꽃이라 불리기도 하는 복수초가 꽃샘추위 속에서 샛노란 황금빛 꽃잎을 열어젖히고, 노루귀도 두터운 대지를 뚫고 잎사귀도 없이 외로운 줄기 끝에 분홍빛의 자태를 드러냅니다.

겨울이란 계절을 관통하는 동안 겨울눈(越冬芽) 속에서 봄을 기다리던 산수유나무도 이제 곧 예의 노란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앙탈 부려도 한라산 숲속에는 더덜이 없이 봄기운이 일렁거립니다.

   
 
 
진행형의 봄 숲에서 가장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이는 바로 새들입니다. 한라산 숲 속에 터를 잡고 사는 텃새들이지요. 숲속의 많은 친구들이 겨우내 침묵 속에 살아가지만, 한라산의 텃새들은 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그리운 친구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이 황량한 겨울 숲을 지켜온 터줏대감인 셈이지요.

박새며 곤줄박이, 휘파람새가 바로 한라산에서 흔하고 볼 수 있는 텃새들입니다. 날렵한 몸매를 가진 텃새들은 한라산의 숲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한라산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봄을 맞는 한라산의 숲에서 단연 돋보이는 새는 바로 큰오색딱따구리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는 말 그대로 다섯 가지의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몸통의 윗부분은 흰색이지만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주황빛을 감도는데, 위아래로 검정색의 줄무늬가 있어 눈 덮인 겨울 숲에서나 신록으로 우거지는 여름에도 그 모습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새입니다. 또 수컷의 머리는 붉은빛을 띠어 화려함을 뽐내지요. 게다가 검정색의 날개에 흩뿌려져 점점이 박혀 있는 흰 띠와 귀 밑의 하얀 선이 빚어내는 앙증맞은 생김새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키욧 키욧’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나무를 오르내리는 동작은 또 얼마나 민첩한지 모릅니다. 공룡의 발톱을 연상시키는 강한 발톱과 든든한 꼬리날개로 균형을 잡을 수가 있어서 수직의 나무를 다람쥐처럼 오르내리지요. 또한 360도를 회전할 수 있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먹이를 찾아냅니다. 몸집에 비해 큰 날개를 펴서 이 나무 저 나무를 쉴 새 없이 옮겨 다니며 나무껍질 속에 있는 먹이를  쪼아댑니다.

유난히 단단하면서 몸피에 비해 긴 부리를 지닌 딱따구리는 나무껍질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애벌레를 좋아합니다. 부리 속에는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의 혀가 있어서 순식간에 나무껍질 속에서 잠을 자는 벌레들을 잡아챌 수 있지요. 먹이들이 풍부해지는 봄이 되면 딱따구리들은 더욱 분주해집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풀고 제 세상 만난 듯이 숲 속을 헤집고 다니는데, 딱따구리에겐 그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완연한 봄이 오면 제 짝을 찾아 결혼도 하고 새끼를 낳기 위해서지요. 그래야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새끼들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새끼를 낳기 위해서 부지런히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 것이지요.

   
 
 
청혼을 하기 전에 딱따구리에겐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결혼지참금과도 같은 둥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야생의 세계에선 배우자를 찾을 때 보통은 힘 센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배우자로 삼지만, 딱따구리 세계에서는 안전하게 새끼를 키울 수 있는 보금자리가 청혼을 수락하는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아늑하고 안전한 둥지 속에서만이 자신의 분신들을 온전히 키워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단단한 부리를 지닌 딱따구리는 주로 참나무에 구멍을 파서 둥지를 짓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둥지로 비가 스며들지 않아야 하고 바람도 적당한 곳이라야 하기에 비스듬한 나무의 안쪽을 택합니다. 뱀이나 족제비 등 알을 노리는 적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선 나무의 높은 곳에 둥지를 틉니다. 이쯤 되면 새들의 둥지 치고는 근사하지요.

둥지를 짓기에 마땅한 곳을 물색한 딱따구리는 마침내 나무를 쪼아댑니다. 딱따구리(Dendrocopos leucotos)는 '나무(Dendron)를 쪼는(kopos) 새'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영어로는 woodpecker 라고 하지요.  ‘따라라라라라라라라라’  총각 딱따구리 여러 마리가 동시에 숲의 이 곳 저 곳에서 나무를 쪼아댈 때면,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고요하던 숲 속이 쩌렁쩌렁 들썩거리지요.

아무 곳이나 대충 지은 둥지는 신붓감들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에 딱따구리로서는 정성을 다해 아담하면서 튼튼한, 그야말로 ‘레미안’ 같은 보금자리를 만들어야겠지요. 알을 낳는 암컷 입장에서도 근사한 레미안을 본다면 아마도 한 눈에 반하겠지요.

   
 
 
숲 속에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딱따구리는 이 보금자리에 알을 낳습니다. 한 번에 보통 대여섯 마리를 낳지요. 보름 정도 알을 품고 나면 귀여운 2세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어미 딱따구리는 날마다 먹이를 물어다 새끼들을 키워냅니다.

봄 숲에서 곱게 색동옷으로 단장하고 분주히 오가는 딱따구리는 부지런하고 독립성이 강한 새의 상징입니다. 해마다 새로운 둥지를 만들어 자손을 낳고, 쉴 새 없이 먹이를 나르며 자식을 키우는 모습도 그렇지요.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나서 독립할 때면 미련 없이 자연 속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새끼들은 새로운 둥지를 틀고 저들의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딱따구리가 한번 만들어놓고 떠난 둥지들은 숲 속에 사는 다른 새들의 보금자리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딱따구리처럼 나무를 뚫을 만큼 단단한 부리가 없는 작은 새들은 딱따구리가 만들어놓은 둥지를 이용해서 번식을 하지요. 박새나 곤줄박이 같은 아주 작은 새들입니다. 그런데도 딱따구리들은 그런 작은 새들을 쫒아내지 않습니다.  나무라지도 않으며, 임대료를 달라고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딱따구리에게는 새로운 나무에서 새로운 둥지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강하고 튼튼한 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하고 독립심이 강한  이 새의 미덕은 한라산에 기대어 사는 제주인들의 피 속에 흐르는 강한 자립심과도 닮아서 참꽃·녹나무와 함께 제주도를 대표하는 상징 새이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고즈넉한 숲속을 걷다가 어디선가 “따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하고 산을 뒤흔드는 드러밍 소리가 들리시거든, 어디선가 오색딱따구리가 장가를 들려고 새로운 둥지를 만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드디어 한라산에도 봄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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