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미디어 “어디까지 사실이고 허구인가”
4.3과 미디어 “어디까지 사실이고 허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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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미디어](하)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토론문
지난 7월 31일 제주4.3 72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제주언론학회(회장 최낙진)와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이 ‘4.3과 미디어’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공동 개최했다. 그 중 3부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불온삐라 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발표(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발표 내용 중 제주4.3에 대한 일부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요청으로 토론문 전문을 2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3년 제주신보사 직원들과 해병제주경비사령관 장교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토론문 보완
문국주, ‘조선사회주의운동사 사전(1981, 동경: 평론사)’

발제문은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의 내용을 맨 처음 문자화시켜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문국주(文國柱)라고 생각한다. 그는 1981년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자신의 저서 ‘조선사회주의운동사 사전(1981, 동경: 평론사)’에 실린 <제주도의 4·3 투쟁>이라는 소논문에서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과 관련된 사건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글의  원본과 번역본은 고문승 편저 ‘제주사람들의 설음(제주: 도서출판 신아출판사. 1991)’에 실려 있고. 한글 번역은 김정필 선생(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 기업농)이 했다. 

이와 같이 험악한 상황 하에서 남로당원(南勞黨員)들은 그해 (1948년) 8월 25일에 북조선에서 실시하게 된 조선최고인민회의(朝鮮最高人民會議) 의원선거의 임무를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남조선인민대표자인 대의원을 선출하는 지하 간접선거 결과, 안요겸(安堯儉, 별명 安世勳), 강규찬(姜圭讚),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珍), 고진희(高珍姬) 등이 선출되어 북조선으로 갔다. 김달삼이 언제 제주를 떠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8월 2일 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배를 타고 목포로 떠났다. 추측하건대 이들은 북한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라는 미군보고를 볼 때 김달삼은 일행 4명과 함께 8월 2일 제주를 떠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240쪽).

그 후 더욱 엄격해진 경비태세하의 제주시내 20수(數)개소의 직장세포가 건재하고 있어서, 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布告文) 약 3,000매를 시내의 동서남북의 요소에 산포(散布)하였다.

잔인무도한 경찰관들이여!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개(犬)들이여! 너희들은 무고(無辜)한 도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있다. 하나님(天人)도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범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너희들의 극악비도(極惡非道)한 악사(惡事)를 동족이라고 해서 부끄럽지만 참고 견디어 왔지만, 은인자중(隱忍自重)도 이제는 한도에 달하였다. 우리들은 인민의 원한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너희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가까운 시일내 권토중래(捲土重來)하기로 결정하였다. 인민군사령관(人民軍司令官) 이덕구”라고 서술하고 있다.

발제문은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의 내용을 맨 처음 문자화시켜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문국주(文國柱)”라며 문국주 책에 소개된 ‘포고문’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문국주가 실제 포고문을 보고 그것을 문자화시켰다기보다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의 서술 내용과 이 책에 소개된 ‘호소문’을 혼합한 것으로 보인다. 위 문국주의 글과 관련 있어 보이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미제(米帝)와 이승만 역도들에 대한 전체 도민들의 가슴에 쌓이고 또 쌓인 적년의 울분과 원한이 하나로 집중된 화산과 같은 기세가 놈들의 권토중래(捲土重來)에 대한 은인자중(隱忍自重)의 폭발인 것이었다. 즉, 무권리와 인간 생지옥에서 헤여나서 삶의 광명을 찾으려는 30만 도민의 절실한 의사와 열망의 집중 표현이었다.

‘《국방군과 경찰원들》’에게의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뿌리란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마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 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濟州島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에서 쫓겨 내기 위하여! 매국노 리승만 악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 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를 지켜 주는 빨찌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는 자리를 차지하라!” (165~166쪽)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문국주가 소개한 ‘포고문’은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의 내용과 문구를 취사 선택해 조합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②’, 전예원, 1994, 91~92쪽
“이 책자(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는 4월 3일 무장대가 행동을 개시하면서 뿌렸다는 2개의 ‘호소문’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삐라는 무장투쟁 지도부의 상징적인 구호로 간주, 여러 책자에 인용된 바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관‧공무원‧대청 단원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중략) 다른 하나는 무장대 지도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여기서 ‘경고문’ 또는 ‘호소문’이란, 삐라의 내용이 앞의 것은 ‘경고하는 내용’이며, 뒤의 것은 ‘호소하는 내용’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즉 일반명사로 쓰인 것이지 삐라 앞부분에 ‘경고문’ 또는 ‘호소문’이라고 적시돼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1997, 68쪽
“무장대는 총지휘자 이덕구(李德九)의 명의로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고, 토벌대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장병‧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金奉鉉․金民柱, ‘濟州島人民들의 4․3武裝鬪爭史(文友社, 1963)’, 166쪽)”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 명의로 발표한 삐라의 내용을 소개한 위의 글은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며, 그 출처를 각주로 통해 밝혔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48년 제주 시가지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소결
결론적으로 ‘선전포고문’, ‘포고문’, ‘호소문’ 등 무장대 삐라의 이름과 내용을 적은 책자들은 모두 1963년 출판된 김봉현‧김민주 공저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가 출처이며, 대부분의 책자는 각주를 통해 이 책을 인용했음을 밝혔다.

또한 김봉현‧김민주도 실제 삐라를 본 후 그 내용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듣고 이를 옮긴 것이다. 그래서 용어에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다(김민주는 입산해 무장대가 됐으므로 삐라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토론자가 김민주 생전에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해도 삐라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4‧3무장봉기와 함께 뿌려진 삐라는 조천중학원 학생으로서 아직 입산하지 않은 김민주가 못 보았을 가능성이 높고, 1948년 10월 24일 뿌려졌다는 삐라는 김민주가 이미 입산한 뒤라서 역시 못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 (김시종 지음, 윤여일 옮김, ‘조선과 일본에 살다’, 돌베개, 2016)
재일동포로서 저명한 시인인 김시종은 남로당에 가입해 4‧3기간 레포(연락원) 역할을 하다 일본으로 피신한 내용 등을 일본어 책으로 쓴 바 있는데, 이 책이 2016년에 한글판으로 번역됐다. 

토론자가 이 책을 정독한 바에 의하면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글쓰기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책 내용 중 발제자가 관심을 갖는 ‘1948년 10월 24일자 이덕구 명의의 삐라’는 아니지만, ‘4‧3무장봉기 직전 작성했다는 무장대 삐라’와 관련된 내용이 있기에 참고로 아래에 옮겨 적는다.

우리 연락그룹이 맡은 임무는 전단(삐라) 100매 작성과 도화지 4매를 얇은 판자에 붙인 입간판 두 개 제작, 그리고 그 살포와 설치를 책임지는 일이었습니다. ‘호소’용 삐라는 두 종류가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지만, 우리가 작성한 것은 ‘도민을 향한 호소’ 쪽이었으며 ‘경찰에 대한 경고문’의 실물은 못 본 채 끝났습니다. 도민을 향한 호소는 “시민동포여! 경애하는 부모형제여! 4‧3의 오늘, 당신의 아들딸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로 시작해,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매국적 단독선거‧단독정부에 결사반대하며 “그대들을 고난과 불행에 빠뜨린 미제와 그 수하들의 학살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오늘 그대들의 골수에 스며든 원한을 풀어내기 위해!”로 이어지는 전문 250자 정도의 격문이었습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그룹은 나흘간 이 ‘호소’를 손으로 옮겨적었습니다. 총파업 탄압 때 등사기를 남김없이 압수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다가온 4‧3날의 미명은 활짝 갠 쌀쌀한 새벽이었습니다.(189쪽)

# 발제문에 언급된 자료 분석
姜龍三, 李京洙 編著, ‘大河實錄 濟州百年’, 泰光文化社, 1984
주로 경찰, 보수인사, 공무원에 대한 취재와 전언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대한제국 말부터 대한민국 제5공화국 때까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사실여부를 떠나 참고할 만하다. 그러나 각주 하나 없는 글이라 무엇을 근거로 쓴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또한 사실관계가 틀린 역사 왜곡과 오류가 너무나 많은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 서술된 구체적 내용에 대해 엄밀한 검증을 하지 않은 채 인용하는 것은 왜곡과 오류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사실관계 왜곡 사례를 몇 가지 든다면,

1949년 1월 17일 발발한 ‘북촌 사건’은 군 토벌대에 의해 불과 이틀 사이에 북촌리 주민 수백 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작가 현기영은 1978년 문예지 ‘창작과 비평’에 ‘순이삼촌’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게재해 이미 북촌 사건의 참혹상을 세상에 알린 바 있다. 그럼에도 그 후 쓰여진 ‘대하실록 제주백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날짜가 틀린 것은 물론이고 “공비들은 …마을로 숨어들어 살인과 약탈, 방화를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660쪽)이라고 서술돼 있다.

심지어 ‘부청하(夫淸河, 11세)’라는 실제 인물을 등장시켜, ①부청하는 조천면 선흘리에서 살던 중 ‘아버지가 공비들에게 붙들려 죽음’을 당했으며 ②아버지가 죽은 후 외할머니와 함께 북촌리에 살던 중 ‘공비들의 총칼 앞에 까닭없이 죽어가는 처절한 생명을 보았던 것’이라는 부청하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660~663쪽). 

토론자는 여러 사람의 증언과 현장 취재를 통해 ‘대하실록 제주백년’의 오류를 지적한 바 있는데, 즉 부청하의 아버지 부사림(夫仕琳, 31)이 조천면 선흘리의 한 굴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숨어있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돼 참혹하게 죽은 사실과 북촌리 집단학살 사건을 밝힌 바 있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414~415쪽; 435~440쪽).

토론자는 부청하 씨의 증언을 이미 여러 차례 듣고 정리한 바 있지만, 이번 세미나 토론문을 작성하면서 오랜만에 안부를 물을 겸하여 전화를 통해 다시 한번 증언을 들으며 ‘대하실록 제주백년’의 왜곡을 재확인 했다.(2020년 7월 27일 오전 전화 통화) 

# 부청하(夫淸河) 1943년생, 서울시 관악구, 상록보육원 원장
(‘대하실록 제주백년’이라는 책에는 선생님의 증언을 토대로 부 선생님의 아버지가 ‘공비’에게 희생됐고, 북촌사건도 ‘공비’가 저지른 것으로 쓰여 있다. 전에 강용삼이라는 분을 만나 4‧3 때의 일을 증언한 적이 있는가?)

“강용삼은 신문사 편집국장이던 사람이다. 과거에 만나서 4‧3 때 일을 말한 바는 있다. 아버지는 집을 나선 후 굴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 무렵 나도 선흘리 굴에서 사흘간 숨어있었다. 6살 때 일이다. 아버지는 굴속에서 붙잡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 시신을 수습했다. 아버지 성함은 부사림이다. 그땐 어려서 가해자가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선흘리 사람 여럿이 함께 굴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북촌사건은 어떻게 경험하게 됐으며, 그 사건이 소위 ‘공비’가 저지른 것인가?)

“무슨 소리냐? 직접 경험했고 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는데!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와 함께 처음엔 친할머니 권당 중 경찰인 ‘김 순경’을 찾아 김녕리로 갔다. 그러나 김 순경은 ‘폭도들은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해서 북촌리로 가게 됐다. 그래서 북촌사건을 겪게 되었다. 나는 지금 북촌리에 세워진 ‘순이삼촌 비석’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밭으로 끌려나갔다. 군인들이 곧 총을 쏠 기미가 보이자 외할머니는 나를 당신의 치마 속으로 숨기면서 ‘네가 죽으면 네 집안의 대가 끊긴다. 내가 총에 맞더라도 널 치마 속에 꼭 품고 죽을 테니 너는 꼭 살아남아라. 그리고 네 아버지 제삿날을 10월 25일이다’라고 말씀하였다(증언자의 아버지 부사림의 제삿날이 음력 10월 25일이므로 사망일은 10월 26일이다. 즉 1948년 양력 11월 26일인데, 이 내용은 ‘4‧3은 말한다’ 제4권 414~415쪽에 실려있다). 곧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갑자기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군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다음날 함덕리로 오라고 말한 후 가버렸다. 나는 함덕리로 갔다가 어머니도 안 계신 상태여서 고아원에 넘겨졌다. 처음엔 삼성혈 부근 천막이 고아원이었다. 거기에서 다시 약 1년간 용담리 공회당이 고아원으로 사용됐고, 다시 화북리로 옮겨져 1년 반가량 살다가 외도리로 옮겨졌는데 이게 바로 제주보육원이다.”

‘북촌사건’은 이틀 사이에 수백 명이 희생됐고,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널리 알려짐으로써 참혹한 집단학살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사망자 절대숫자를 보면 제주4‧3 때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곳은 제주읍 노형리이다. 600명가량의 주민들이 대부분 군‧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대하실록 제주백년’에는 노형리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제주읍내에서 약 4킬로 떨어진 중산간마을 노형리. (중략) 노형마을이 미증유의 참화를 입은 것은 고구마수확도 거의 끝난 1948년 11월 9일이었다. (중략)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현임종(玄林鍾)은 보리갈이 때문에 들에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정적을 찢는 총성이 요란하게 들렸다. 놀란 소년은 딴 생각을 가질 여유도 없이 반사적으로 밖에 뛰어나왔다. 마을은 벌써 불바다로 변하고 있었다. 이날 초저녁을 기해 노형리를 습격했던 공비들은 때마침 산업도로 진입로에 들어서는 국군토벌대와 뜻밖에 조우하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총격전을 벌이면서 마을에 숨어들어 무차별 방화와 살상을 자행했던 것이다.”(715~718쪽)

요컨대, ‘대하실록 제주백년’은 노형리 주민들의 희생이 ‘공비들의 무차별 방화와 살상’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현임종’이라는 실제 인물을 거명하면서 그의 ‘증언’을 싣고 있는 것이다.

토론자는 이미 현임종 씨를 여러 차례 만나 증언을 채록해 글을 쓴 바 있지만(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제447회, 1999년 6월 18일자. 초토화작전-노형리), 동영상 기록을 남기고자 최근(2020년 4월 14일) 다시 만나 구술채록을 하였다. 

현임종 씨는 ‘대하실록 제주백년’에 대해 “그건 강용삼씨가 자의적으로 쓴 것이다. 언젠가 김종철 선생과 함께 강용삼씨와 저녁을 먹는 과정에서 내가 김종철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4‧3때 상황을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글을 쓰다니. 난 그 책에 그 내용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진실은 그 글과 정반대”라고 말했다.

고재우, 김영중의 책
경찰 출신인 고재우와 김영중의 책은 검증되지 않은 자료들을 나열한, 왜곡이 심한 것들이다. 두 사람은 경찰로 근무한 바 있기 때문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구체적인 경찰 내부 문건을 근거로 제시하며 글을 썼다면, 그 경찰 내부 문건은 검증을 거쳐 중요한 1차 사료로써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해도, ‘경찰로서 직접 겪었던 4‧3의 경험’을 기술했다면 이는 ‘구술사(口述史)’로서 그 역할을 할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구술을 바로 사료로 취급하는 건 위험하지만, 구술은 사료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을 알려주는 중요한 ‘1차 사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글은 구술사가 될 수도 없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경찰로 근무한 바 있기 때문에 이들의 글은 독자들에게 착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즉 ‘경찰 출신이 경찰의 활동상을 서술한 것이니 맞는 말일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4‧3 당시 경찰이 아니라 4‧3이 종결된 후 경찰이 되었다. 한 사람은 1948년 4‧3무장봉기 당시 13살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8살이었다.

두 사람이 글을 통해 보여준 착시효과는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을 연상케 한다. 박갑동 씨는 이른바 ‘남로당 지하총책’으로서 ‘중앙일보’ 연재물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제주4‧3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발발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고, 이 글은 신문 연재 후 ‘박헌영’이라는 책을 통해 출판됐다. 박갑동의 글 중 4‧3에 관한 내용에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았고, 박갑동 말고는 군 장성 출신 연구자조차 ‘중앙당의 지령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남로당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른바 ‘남로당 지하총책’이 한 이 말을 반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토론자가 1990년 일본을 방문해 박갑동을 인터뷰 했는데, 박갑동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설’에 대해 묻는 토론자의 질문에 “그건 내가 쓴 게 아니라 정보부에서 고쳐 쓴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 내용은 당시 제민일보에 보도됐고, 2002년에 다시 만나 인터뷰한 내용은 동영상으로도 촬영됐다. 

李潤, ‘陣中日記’, 麗文閣, 2002.
이윤은 1948년 말 제9연대와 교체돼 제주에 온 제2연대 군인 출신이다. 무장대가 군 주둔지인 의귀국민학교를 공격하며 벌어진 ‘의귀리 전투’를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 상황을 ‘진중일기’에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이윤은 의귀리 전투로 인해 군인 4명이 사망한데 대한 보복으로 학교에 감금해 두었던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이 집단학살 당한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 이때 희생자들이 바로 ‘현의합장묘’에 묻혀 있는 분들이다.

김관후, ‘4·3과 인물’, 제주문화원, 2018
새로운 자료를 찾거나 새로운 주장을 한 연구서라기보다는 기존에 공개된 책자들을 소개한 글이다. 특히 제주4‧3위원회에서 발간했으며 ᄒᆞᆫ글파일(hwp)로도 널리 공개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사건 자료집’의 주요 내용을 옮겨놓은 책자이다.

# 토론자의 제안
발제문을 보면, 많은 자료들을 꼼꼼하게 분석한 발제자의 정성과 노력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쏟은 노력과 그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①미군정의 對언론 정책  ②‘제주신보’에 대한 미군정의 시각(대응)  ③1947년 1월 1일 전의 ‘제주신보’ 찾기 ④‘제주신보’가 서북청년회에 접수 당했던 상황 ⑤미군정, 4‧3 진압을 위해 중앙의 보수언론 활용(잠수함 출현설 등) ⑥1990년대 제주지역 일부 일간지에 실린 보수세력의 연재 글과 통단 광고 내용을 통해 보수세력의 주장과 일부 일간지와의 관계 분석한다면 앞으로 ‘4‧3과 미디어’에 관한 좋은 논문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 교열 필요 
발제문에는 교열이 필요한 오타가 다수 있다. 예를 들면, <1945년 6월 20일 미군의 자료 → 1948년>,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상사 헝거(R. Hunger)가 작성한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가 있다(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2015, 183-185쪽) → 4‧3위원회의 무슨 책자인지 적시되지 않았는데, 이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지칭한다. 그런데 보고서 발행연도는 2015년이 아니라 2003년이다.>

향후 발제문이 단행본이나 정식 논문으로 등재지에 실릴 것이라면 많은 교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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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 2020-08-05 09:11:37
당신쓰는것은항상저쪽펀이네요.혹시이쪽사람들에게피해봤나요?보이하니육지사람같은데.내가본오성찬씨저술에보면제작은할아버지는이북보다여기가살기좋다던데.참고로제작은할아버지부인과자식들표선백사장에서죽어씁니다.공산주의자들선동에의한무지한폭동에의한슬픈히새미지요.하나그렇다고정당화될수는없지요.ㅣㄴ데요
14.***.***.38

도민 2020-08-04 09:51:16
당시엔 산폭도라 불렀습니다

학술세미나 등 모든 행사에는 생각의 좌우가 동수로 참석, 토론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요 ?
12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