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36) 김순화 어르신 이야기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1에서 소개된 지난 1~25회 원고는 제주의 음식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서술이었습니다. 이어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2로 마련된 26회 원고부터는 제주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매월 한 분의 삶을 풀어낸 글을 격주로 소개하면서 그 속에 DNA처럼 배어있는 제주음식 이야기를 함께 교감하려 합니다. 인터뷰에는 일러스트 작가 '色色님'도 동행해 현장에서 영감을 찾아낸 아름다운 삽화도 매회 선사합니다.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인의 삶과 제주음식에 깃든 지혜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글]

“아니, 어르신 이게 뭐에요? 수꿩 아니에요?”

어르신을 만나기로 한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날은 대한(大寒)보다 춥다는 소한(小寒)이었다. 롤케이크와 쑥찐빵을 손에 들고 들어간 제주시 삼양2동 어느 가정집 마당에서는 평소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이 사냥 가능한 날이라서 우리 아들도 다녀왔는데 비가 와서 꿩들이 날아다니지 않고 다 숨었어. 그래서 오늘은 한 마리 밖에 못 잡았다더라고.”

마당을 들어서자마자 내가 본 광경은 잡아온 꿩을 삶아 털을 뽑는 장면이었다.

“이 꿩 손질해서 뭐 만드시려고요?”

“뭘 만들긴, 꿩엿 해야지.”

미리 손질(?)되어 있는 꿩만 봤던지라 꿩을 처음부터 손질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손질하는지 궁금하기도 해 마당에 함께 쭈그려 앉아 어르신의 아드님이 꿩을 손질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르신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리셨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김순화 어르신의 집을 찾은 날은 마침 소한(小寒)이었다. 제주의 전통음식이자 겨울철 보양음식인 꿩엿을 만들기 위해 어르신의 아드님이 잡아온 꿩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전엔 꿩을 아무때나 사냥했지만 지금은 엄격하게 수렵을 제한하고 있다. 정해진 시기에만 잡을 수 있고, 허가증이 있는 사람만 꿩 사냥을 할 수 있다. 허가 된 장소에서 허락된 날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만 잡을 수 있다. 수렵허가를 받고 사냥해온 꿩을 손질해두었다가 김순화 어르신은 꿩엿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보내신단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아이고 오늘 소한이야. 일 년 중 제일 추운 날. 그렇게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 안돼요. 빨리 일어나. 들어와서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앉아. 어서!. 소한에는 밖에 나간 사람도 찾지 않아.”

어르신의 만류에 마지못해 일어났지만 이미 어르신 집 마당 초입부터 너무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들을 들은 나는 너무 신이 났다. 어르신은 종종 아드님이 방앗간에서 맞춰오신다는 팥 찰시루떡과 롤케이크, 골드키위를 접시에 담아 상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오셨고 나는 어르신이 자리에 앉자마자 여쭸다.

“어르신, 근데 왜 소한에는 집 나간 사람을 찾지 않는 거예요?”

“옛날 어른들 말이지 뭐. 소한, 대한 날에 나가면 얼어 죽으니까. 그만큼 춥다는 말이야. 그만큼 추운 날에는 안 나가는 게 좋다는 뜻으로 어른들이 하는 말이지. 제주 어른들 속담 같은 거야.”

“그럼 오늘 잡은 꿩으로 오늘 당장 엿 만드실 거예요?”

“아니. 오늘 잡은 한 마리로는 엿을 만들 수 없어요. 적어도 3~4마리는 있어야 엿을 만들지, 저거 한 마리로 엿 만들면 엿 요만큼 밖에 안 나와.”

이 말씀을 하시며 어르신께서는 '요만큼 밖에'라는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접은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셨다. 

1939년 7월에 태어난 김순화 어르신과의 첫 만남이었다.

김순화 어르신은 일제강점기에 제주가 아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전세가 심상치 않자 어르신의 부모님은 가족에 살고 있는 고향 제주도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때가 어르신 나이 7살 무렵이었다. 어르신은 그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일본을 출발한 배는 밤 12시 즈음 제주 산지항에 도달했고 어르신 가족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 삼양동까지 갔다고 한다. 그 다음날 바로 밭에 나가 검질을 매기 시작할 정도로 곧바로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외가가 삼양에서 가까운 화북에 모여 살고 있었고, 삼양에도 친척들이 계셔서 어르신은 삶의 터전은 일곱 살 부터 지금까지 계속 삼양이다. 당시 일본에서 학교에 막 입학하려던 참에 제주로 이주했던 어르신을 집안의 어른들은 바로 학교에 보내 주었다. 그런데 1학년이 아닌 3학년부터 다니게 되었고, 학교에 적응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오자마자 3학년으로 부모님이 학교에 붙여주신 거야. 그런데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내가 제주말을 잘 못했어. 1학년부터라도 붙여줬으면 끝까지 다녔을 텐데, 교우들하고도 말을 잘 섞지 못해서 학교를 갔다 안 갔다 하게되더라고. 그러니 뭐 학교에 정 붙여 다닐 수 있었겠어? 또 그땐 뭘 알 나이가 아니었지. 지금이었으면 악착같이 (학교 공부) 하지. 그때 부모님이 조금만 학교 다니라고 다독여 줬으면 끝까지 다녔을지도 몰라. 근데 그땐 뭐 알았나. 그냥 자기 이름 정도만 쓸 줄 알면 되었지 뭐.”

김순화 어르신에게는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가 처음엔 낯설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특히 언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초등학교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유년 시절을 보내다 19살에 중매로 같은 동네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시집가는 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며 말씀하셨다.

중매로 만나서 별거 없다고하시더니 60년도 더 된얘기를 자세히도 알려주셨다. 새신랑, 새신부를 그릴땐 언제나 설레인다.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중매로 만나서 별거 없다고하시더니 60년도 더 된얘기를 자세히도 알려주셨다. 새신랑, 새신부를 그릴땐 언제나 설레인다.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아마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만 그랬을 걸, 내가 결혼할 때 즈음에는 면사포 쓰고 많이 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면사포 안 썼어. 일찍 결혼을 한 탓도 있었지만 나는 쪽두리 쓰고 장옷 입고 결혼했거든.”

그러시더니 안방으로 가시고는 오래 된 앨범을 꺼내 보여주셨다.

오래된 흑백사진들로 빼곡히 채워진 앨범을 몇 장 넘기다보니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보였다. 아마 동네에서 제일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간 것 같다는 김순화 어르신. 마을 사람들 4명이 가마를 들고 오면 그 가마를 탔다.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가마를 잡고 들면 들러리들은 함께 걸어 지금의 삼양3동에서 삼양2동으로 걸어 남편 집으로 들어가 마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혹시 다른 분들도 나처럼 쪽두리에 장옷입고 가마타고 가서 결혼했을까 해서 노인당에서 서로 이야기 해 봐도 그렇게 결혼한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더라고 한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오래된 흑백사진들로 빼곡히 채워진 김순화 어르신의 낡은 앨범. 이 빛바랜 사진들은 김순화 어르신의 80평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사람이 죽을 때 입는 장옷입고 시집가신 게 싫지는 않으셨는지 물어봤더니, 그땐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었다 하셨다. 사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는 시집이라 어리둥절했지만 또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르신은 ‘쉐(소) 사고판 다음에 물리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사람 사고파는 건 돌릴 수 없다’고 하셨다.

참고로 장옷은 한자로 ‘장의’(長衣)인데 겉옷인 포(袍)의 일종이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여인들이 외출할 때 사용했던 내외용(內外用) 쓰개였다. 제주에서는 혼례복과 호상옷(수의 壽衣)으로도 쓰였다.

어르신은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남편을 만나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비교적 먹을거리는 넉넉한 가정이었던 것 같다. 오래된 사진에는 어르신의 친정어머니도 보였고 자제분들의 사진도 보였다. 낭푼에 뭘 담아서 먹었는지 여쭤보니 그 당시에는 죄다 보리쌀이었다고. 보리쌀로 지은 밥을 아이들이 모여앉아 입을 크게 벌려 숟가락 가득 퍼서 먹고 배가 ‘뽕그랑’ 해지면 보는 본인의 마음도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보리밥에 반찬은 ‘지’ 종류였다. 즉 장아찌 정도만 있으면 그날 한 끼는 충분했던 것이 1960년대 제주밥상의 모습이었다.

보리밥 낭푼이 밥상.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숟가락 듬뿍 퍼낸 보리밥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까 마당에서 봤던 꿩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꿩은 가을까지 “게네도 먹고 살기 바쁜 때여서 바빠부난 성격이 패라울 시기라 잡아먹어도 맛이 없어”라고 하신다. 그런데 동면 시기가 돌아오면 꿩들이 그 사이 살도 포동포동 해지고 온순해져 꿩 사냥을 하기 적합하다고 한다. 그럼 마을사람들이 함께 꿩 사냥을 나가고 사냥해 온 것을 똑같이 나눠 집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겨울철에 얻은 꿩으로는 가장 먼저 꿩엿을 만들었다. 지금은 수렵이 제한이 되어 있어서 아무 때나 못 잡고 정해진 시기에만 잡을 수 있다. 또, 허가증이 있는 사람만 꿩 사냥을 할 수 있다. 즉, 허가 된 장소에서 허락된 날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만 잡을 수 있어 예전보다 꿩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하셨다. 

내가 어르신을 만나기로 한 날은 미리 수렵 허가를 받은 날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안 잡혀 손질한 꿩을 냉동실에 뒀다가 2~3마리 정도가 더 모이면 꿩엿을 하신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주로 꿩엿을 찹쌀에 “골가루”(엿기름가루)를 사다가 만든다. 물론 그 전에는 조로 만들었지만 조 대신 찹쌀을 사용한지 오래다. 어르신은 그렇게 만든 꿩엿은 자녀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꿩엿을 준비하는 날에는 꿩메밀국수를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식당에서 파는 꿩 국수는 간혹 꿩 맛이 진하지 않아 아쉬웠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네 어르신들이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는 엿 준비하면서 꿩의 ‘꽝’(뼈)을 모아 푹 고아내고 꿩고기도 넉넉하게 넣어 국물을 낸다. 거기에 메밀로 만든 국수를 넣어 온 가족이 한 그릇씩 나눠 먹었는데, 그 해의 겨울 보양은 이 꿩메밀국수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가을 내내 얻은 늙은 호박도 겨울철에 엿으로 많이 만들어 먹었다. 늙은 호박과 물만 있으면 엿을 만들 수 있다. 출출할 때도 즐겨 먹었고 어르신은 산모들도 많이 먹었다는 늙은 호박엿을 만드는 방법을 꽤나 오래 설명해 주셨다.

추운 겨울 감저(고구마)는 고마운 주식이자 간식이었다. 익어도 설겅설겅한 조의 식감 때문에, 조밥을 할 때 조 위에 감저를 올려서 같이 익혀 먹으면 배도 든든하고 식감도 좀 나아졌다고 한다. 그렇게 밥에 넣어서도 먹고 감저를 삶아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출출할 때 일어나서 한두 개 먹으면 그게 밥이자 간식이었다고, 겨울철만 되면 생각난다고 하셨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께서 직접 내오신 요구르트 2개, 팥 찰시루떡, 골드키위의 생경한 조합이 이토록 따뜻할 수 있을까.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겨울이 되면 제주사람들은 주로 술을 만들었다며 어르신 역시 술이나 식혜도 겨울철에 자주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오합주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어르신, 오합주는 오메기술로 만드는 거 아니에요?”

“나도 이 오합주는 남편한테도 잘 안 해줘. 그만큼 귀한 술이고 겨울에 보약으로 먹었던 술이었어.”

“아니 그럼 어르신이 만든 오합주는 진짜 이렇게 만드는 거에요?”

일반적으로 제주의 향토음식 자료에 나오는 오합주는 오메기청주나 탁주에 달걀노른자 꿀, 생강, 참기름을 넣고 숙성시킨 술이다. 때문에 오합주를 만드려면 잘 익은 오메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어르신이 알려주신 오메기술의 재료는 나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푹 찐 찹쌀, 누룩, 달걀, 청, 참기름, 이렇게 다섯 가지. 여기에 잘 끓여 식힌 물 까지 사용하여 만드는 술이 바로 김순화 어르신의 오합주 레시피. 여기에 생강은 옵션이다. 생강이 들어가면 생강향이 은은하게 배어 더 고급스러운 보약이 될 순 있겠지만 생강이 꼭 필수는 아니었단다. 겨울에 만들면 2~3일이면 완성이 되고 집의 보약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가끔 오합주를 먹고 싶다고 어르신께 말하면 “맨입에?” 라고 되물을 정도로 귀하고 정성을 요하는 술이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던 오합주 레시피에 또 하나의 오합주 레시피가 더해졌다. 바로 김순화 어르신의 오합주.

대부분의 제주여성들이 그랬듯이 이렇게 계절마다 그 계절을 맞이하며 만드는 음식은, 따로 배우기보다는 다 어른들이 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어르신 역시 시집 오기 전에 음식들을 배워 왔다기 보다 어깨너머로 보고 주위에 물어가며 만들어 온 것이 바로 김순화 어르신 댁의 제주음식들이다. 각 집마다 식재료는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어르신들의 음식. 

제주 어른들의 제주음식의 본질은 무엇일까? 손녀 뻘 되는 손님을 마당 땅바닥에 앉지 못하게 하는 마음,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준비해 함께 나누는 마음, 계절마다의 식재료를 이용해 정성을 다해 만들어 가족들의 건강을 챙기는 마음이 들어간 음식이 곧 제주음식의 밑바탕에 있는 본질이 아닐까. 하물며 손님 오면 타 주시는 잔치커피 한 잔 역시 소중히 기록하고 싶은 할머니들의 음식이다.

김순화 어르신이 손수 타주신 소위 '잔치 커피'. 어르신이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저으시는데 내 마음도 어르신의 깊은 정에 푹 빠져 휘돌았다.   

김순화 어르신 댁의 겨울 음식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했던 제주사람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김순화 어르신의 꿩엿 만드는 방법, 호박엿 만드는 방법, 오합주 만드는 방법이 너무 궁금해졌다. 어르신은 꿩이 충분히 모이면 연락을 주신다고 하셨다. 김순화 어르신과 함께 꿩엿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다음 글에는 김순화 어르신의 베지근한 겨울음식 레시피들이 공개될 예정이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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