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만큼 미국 내 유력 인사들 한데 모을 수 있는 사람 있을까”
한인회의 숙원 한인회관 건립하고, 두 차례 뉴욕한인회장 연임

美 의사 7백명의 `태권도 아버지

▲ 강익조 회장 ⓒ중앙

지난 2003년 9월 7일, 중앙일보는 뉴욕발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제목은 이렇다 “뉴욕市 의대서 도장 운영한 강익조 사범-美 의사 7백명의 `태권도 아버지`”

이 기사에는 강익조(67) 씨의 ‘강 태권도·합기도 도장’에 미국 각지에서 모인 제자들의 수련회 겸 동문회 풍경이 묘사돼 있다. 이 기사 중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구절은 이것.

“마크 스로멘바움 뉴욕시 부검소장 등 이번 모임 참석자들은 ‘한국인 중에 우리 사범 만큼 미국내 유력 인사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하며 웃기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강익조씨 한분이 미국에 관한 수십명의 자문관을 위촉하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 아닌가. 즉, 그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절히 활용하면 제주가 미국과 관련한 사업을 벌이거나 관련 자문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기왕 얘기 나온 김에 의사 수백명을 태권 제자로 두게 된 강익조씨의 인연을 잠깐 소개한다. 강씨는 지난 1978년, 미국에서 손꼽히는 의대 가운데 하나인 아인슈타인 메디컬스쿨(뉴욕시 브롱스 소재)에서 태권도를 지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에게서 태권도를 배운 한 고등학생이 이 대학에 들어가 학장을 설득해 도장을 마련토록 했던 것이다. 의대생들이 힘든 공부로 운동량이 절대 부족하기 쉬운데 태권도야말로 심신훈련에 제격이라는 주장을 학장이 받아들인 것. 이 아인슈타인 의대에서 그동안 강씨에게 태권도를 배운 학생은 7백명을 넘는다(뉴욕 중앙 참조).

▲ 강익조씨와 미국인 제자들 ⓒ중앙
강익조씨의 제자는 이들만이 아니다. 현재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 법조인들과 의사 약 1,500여명이 그의 제자들로 수련을 받고 있다. 제자들 중에는 하버드 의대 교수도 있고, 비행기를 60여대나 보유한 항공사 사장도 있다. 미국에서는 이준구씨와 함께 태권도를 미국사회에 보급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고희를 몇해 남기지 않은 연세임에도 지금도 웨스트 체스터와 커네티컷 두 곳에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필자가 뉴욕을 방문했던 지난 10월 주말에도 승단심사를 하신다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한인회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한 강익조 회장 - 한인 숙원사업 한인회관 건립

▲ 뉴욕한인회 로고 ⓒnykorean.org

강익조 씨가 뉴욕에서 유명한 것은 이것 만이 아니다.

지난 2003년 7월 28일자 미주 중앙일보에는 커네티컷대 명예교수인 김일평씨의 뉴욕한인회 창립비화(4)가 실렸다. 여기서 김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60년에 창립 된 뉴욕한인회는 벌써 43세가 되었다. 인생으로 말하면 중년기가 되었으며 단체로 말하면 반세기의 역사를 과시하는 것이다....한인회 회장도 창립 후 제28대에 이르렀다.

제 1대부터 제 28대 까지 리더십을 평가할 때 무슨 업적을 남겼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한인회가 한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가 평가기준이 된다면 제 18대회장인 강익조는 한인회관 건물을 장만했고 또 한인회 총연합회를 조직했으며 또 한인회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을 종종 받는다. 성공한 한인회장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초대회장으로부터 오늘까지 회장이라는 명예만 얻어 놓고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않은 회장도 있었다. 또 한인회 발전에 장애가 된 회장도 한 둘이 아니다...."

여기서 김교수는 28대(2003년 당시, 현재는 30대)에 이르는 한인회장 중 유일하게 강익조 회장만을 한인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한다. 단순한 긍정적 평가 정도가 아니다. ‘한인회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 ‘성공한 한인회장의 좋은 모델’ 등.격찬에 가까운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게 김교수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뉴욕 한인사회 전반적 평가라면 과도한 생각일까? 한인회관 건물(149W 24Street, New York. NY)을 마련한 강익조씨 이게 언제적 일인가.

“모든 뉴욕 동포들의 숙원인 한인회관을 마침내 구입했습니다. 경사스런 사실을 발표하는 이 자리가 매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뉴욕 중앙, 2002.4.10자 ‘되살려야 할 한인회관’ 중)

1983년 6월 10일 당시 뉴욕한인회장이었던 강익조씨는 한인회 이사와 각 단체장, 언론사 관계자를 초청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은 당시 표정을 이렇게 전한다.

서상복 초대 한인회장은 “50년 전부터 가졌던 꿈이 비로소 이뤄져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감격했고, 당시 김세진 뉴욕총영사는 “뉴욕에 와 1백회 이상 축사를 했지만 오늘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세계의 중심인 맨해튼 한복판에 동포들의 성금으로 한인회관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그처럼 경사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뉴욕 중앙, 2002.4.10 ‘되살려야 할 한인회관’ 중)

이러한 한인사회의 경사를 이끌어낸 주역이 바로 제주출신 강익조 씨다.

▲ 한인회관 건물 @뉴욕중앙
2003년 ‘한인이민사 인물 1백인’에 선정

▲ 뉴욕한인회 홈페이지(nykorean.org)에 실려 있는 역대회장단 사진 중 제 17~18대 회장인 강익조 회장 사진. 30대 까지 거치면서 유일하게 연임한 회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익조 씨는 서귀포시 서홍동 출신으로 남주고를 나왔다(남주고 4회 졸업생으로 이후 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 71년 태권도 사범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79년 제6대 뉴욕한인청과상협회장으로 당선된 그는, 82년부터 86년까지 제17~18대 뉴욕한인회장에 처음으로 연임하는 신뢰를 얻게 된다(한인청과협회는 뉴욕 일원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70년대 초반-직능단체다. 당시 1만달러 내외의 소자본이면 청과업소를 운영할 수 있어 초기 한인들이 청과업에 몰려들었었다).

단체장 회장직 연임은 일반적인데 뭐가 그리고 중요하냐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뉴욕한인회는 지금까지 30대까지 회장단이 취임했지만 유일하게 연임한 회장은 강익조씨 한명 뿐이었다. 

얘기 나온 김에 강익조씨와 관련된 이벤트를 잠깐 소개한다. 뉴욕한인청과협회가 매년 주최하고 있는 추석맞이 민속 대잔치는 한인들의 전통문화를 2세와 미국사회의 타민족에게 적극 홍보하는 대표적인 행사이다. 이 추석맞이 잔치 모태가 된 것은 82년의 광복절 경축행사인데, 17대 한인회장으로 당선된 강씨가 광복절 경축행사를 뉴욕 업스테이트 라클랜드 카운티에 있는 안소니웨인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이렇듯 앞서 김일평 교수의 강회장에 대한 찬사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한인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3년 가을에는 미주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선정하는 ‘한인이민사 인물 1백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 5월, 뉴욕한인회 역대회장단 협의회 회장으로 피선

90년대 후반 강익조 씨는 귀국하여 몇년간 국내에서 체류하기도 했다. 이 기간 중인 지난 96년 제15대 4.11총선에 서귀포시 남제주지역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 뉴욕 @뉴욕 한인회 홈페이지(nykorean.org)
당시 강씨의 출마의 변은 이랬다 “미주한인협회장을 두 차례 역임하며 세계화의 물결을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서 제주도의 세계화와 위상정립을 통한 계획적인 발전을 리드하고, 성장잠재력을 일굴 사람이 필요하다는 신념에서 출마하게 됐다”(제민96.2.29자)

강익조씨의 출마를 생뚱맞게 보는 시선도 있었으나, 뉴욕한인협회장 출신인 박지원씨(DJ의 오른팔),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 출신 김혁규 전 경남지사 등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그의 출마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경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는 지난 99년 6월 발족한 ‘뉴욕클럽’의 멤버이기도 했다. 이 뉴욕클럽은 강익조 씨를 포함, 뉴욕생활을 하다 국내로 역이민해 온 박지원씨, 전 김혁규 경남지사, 유종근 전북지사등이 가입돼 있다). .

너무 시기를 앞서 나왔는지, 제주라는 지역특성 때문이었는지 다른 뉴욕 단체장 출신들과는 달리 그는 고배를 마셨다. 예수도 자기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이 있듯이...이후 다시 그는 뉴욕으로 돌아갔다..

뉴욕 한인사회의 신화 강익조 회장. 올해(2007년) 5월에는 뉴욕한인회 역대회장단 협의회를 2년간 이끌어 갈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뉴욕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지금도 정렬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기) 뉴욕에는 뉴욕도민회 소개[지구촌 제주인(9)]에서 언급했듯이 이른바 쟁쟁한 제주인들이 많다. 이 중에서도 강익조 회장은 반드시 소개해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에서, 뉴욕출장 중 몇차례 만남을 시도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강회장 본인의 완강한 인터뷰 고사 때문도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소개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이 '지구촌 제주인' 연재 의미가 퇴색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뉴욕에서 전해들은 강회장에 대한 스토리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웹사이트를 검색하여 찾은 그에 대한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나중에 강회장과 직접 인터뷰를 통해 이 리포트는 수정 보완할 것을 약속한다.(필자.windjeju@naver.com) <제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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