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제주대 출신이 미국 대학 교수 되다!
정직과 배움의 자세로 4년만에 박사학위 및 교수 임용

마지막 방문지인 시카고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김병석 교수를 만났다. 지난 10월 21일 시카고 제주도민회 임원진들과의 만남 자리에 고근찬회장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 시카고제주도민회와 김병석 교수(맞은편 마주보는 이)
김병석 교수. 73년생이니 약관 35세의 나이다. 조천리 출신으로 조천 초등학교-오현 중학교-제주제일고를 졸업했다. 92년도에 제주대 과학교육과에 입학 98년에 졸업하고, 한국교원대 생물교육과를 99년 입학, 2001년 졸업했다. 다음 해인 2002년 미 일리노이 공대(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수학·과학교육과에 입학 2006년 졸업함과 동시에 루즈벨트 대학교 (Roosevelt University) 초등교육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이하 김병석 교수의 얘기는 인터뷰 기사라기보다는 김교수의 자전적 얘기를 옮겨적은 것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다소 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르지 않고 김교수의 얘기를 대부분 소개한 것은, 그의 얘기 속에 우리 제주지역의 대학생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합리적 핵심’과 교훈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 그대들이여! 일독을 권한다!! 

풍물패에 미친 대학시절...학교까지 그만 두고 전문 풍물패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초등학교 때 커서 어떤 인물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대통령, 군인,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김교수 또한 초등학교 6학년 때 노벨상을 타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얘기했었다. 중·고교를 거치면서 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 그는, 제주대학교 사범대 과학교육과를 진학하게 된다.
 

▲ 제주대 출신 김병석 교수
고등학교 때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며 ‘운우풍뢰’라는 사물놀이 팀 창단 멤버로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교 시절에는 사범대 놀이패 ‘꾼’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나중에는 학교까지 그만 두고 전문 풍물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의 진로가 바뀐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음을 인지했고 교사의 꿈을 포기하기도 아쉬워서 다시 2년 반의 휴학을 접고 복학하여 학부를 마친다. 중등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시를 치러야 했는데 학부시절 학업외 활동에 너무 치중한 것 같기도 하고 또 교과교육에 대한 관심도 있고 해서 그는 한국교원대 생물교육과 석사과정을 1999년에 다시 시작한다.
 
마침 그가 소속된 과가 BK21 프로젝트에 선정되어서 석사과정 동안 프로젝트 일원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과학교육학회를 두 번이나 참여하게 된다. 처음에는 견학이 목적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렇게 바람들고 나니 미국에서 탐구학습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교원대 시절 BK21 프로젝트로 미 과학교육학회 참여 계기
 

▲ 루즈벨트대학 ⓒroosevelt.edu
그는 주위로부터 명망있는 미국 교수의 이름을 소개받고 그 중 관심있는 두 명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박사과정으로 지원하고 싶다고. 그 중 한 명이 답장을 해 주었는데 이 분이 바로 그의 전 지도교수였다. 원래는 오래곤 주립대학에 있었는데 김병석씨가 원서접수를 할 때는 시카고 일리노이공대 수학·과학교육과로 옮겼다. 그래서 나중에 김병석 씨는 입학허가서를 받고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시카고로 2002년에 오게 된다.
 
국내에서의 학부와 석사과정 동안 김병석 씨는 자취생활을 거의 8년 동안 했었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을 때는 “꼭 내 반쪽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마침 알고 지내던 초등교사와 2002년 3월에 백년가약을 맺고 다음 달인 4월에 시카고로 온다. 아내도 석사과정을 같은 과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시카고에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지라 어학연수 5개월하면서 정착할 준비를 했다. 처음 한 달간은 미국인 집에서 홈스테이하다가 원룸 아파트로 한 달만에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옮겼다.
 
처음 일년 동안은 정착하느라 힘들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해서 식료품점에 장보러 가서는 과일은 사먹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그저 들었다 놨다하다가 “다음에 사지 뭐” 하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학연수할 때나 박사과정 동안 어쩔 수 없는 회식 빼고는 부부 단둘이 처음으로 외식을 한 것은 시카고 와서 반년이 지난 아내 생일 때였다. 집 근처 자그마한 식당이었었는데 너무 행복해 하던 자신들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단다. 점심도 늘 도시락을 싸고 다녔다. “박사과정 시작하고 몇 달 동안은 카페테리아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갈 일이 있어야죠.” 이렇게 생활력을 키워나갔다.

넘어야 할 벽 ‘영어’...집에서도 영어로 의사소통하다

원래 영어에 관심도 없고 미국문화에도 반감 아닌 반감이 있던 터라 영어는 자신이 꼭 넘어야 될 벽이었다. 그래서 김병석 씨 부부는 집에서도 영어로 의사소통했다. 어학연수 시절 한국 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수업시간 빼고는 한국말하면서 친구들과 지내는 것을 보고, 병석 씨는  스터디그룹을 만들고 영어로만 의사소통하기로 룰을 정했다. 아무튼 박사과정 시작 후에도 병석씨는 아내와 한 연구실에서 일했는데 한국말은 일절 안했다고. 사적인 대화를 할 때도 영어로 했단다. 그런데 영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늘지 않더란다. 김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지도교수 부부 모두 저의 과의 교수님이셨는데 댁에서 파티를 댁에서 자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들은 대화에 여념이 없는데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남들이 말을 걸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아 이래서는 안되겠다’ 느꼈어요. 영어로 말을 못해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얘기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그래서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내용일지라도 사람들 대화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고 또 제가 관심있는 주제로 대화도 이끌어 가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 제주출신 김병석 교수와 지도교수 내외(2002년 신년)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정직과 배움의 자세...4년만에 박사학위
 
박사과정을 하면서 김교수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정직과 배움의 자세였다.

“이 두 가지가 제 의사결정을 하는데 기본이 되었는데 제가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근본이 아닌가 합니다. 변명하려고 안했고 남 속이려고 안했고 쉽게 가기보단 더 배울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지도교수 강좌 과제를 제출했는데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더욱 신중하게 리포트를 작성하라고 담당교수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김병석 학생은 “저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 학생”이라며 “더 많은 지도 부탁드린다”고 하고 다시 제출했다. 이런 태도를 지도교수가 좋게 본 것 같더란다. 또한 병석 학생은 교수님 강의 준비를 위해 복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단순노동이지만 교수님께서 어떤 수업 자료를 사용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맘에 든 것이 있으면 허락받고 한 부 더 복사해서 챙겨뒀다. 그래서 김병석씨는 그 교수의 웬만한 수업 자료, 발표자료 들은 거의 소장하고 있단다. 이러다 보니 가끔 그 교수가 자료를 못 찾을 때면 김병석 학생에게서 얻어 가기도 했다고.

▲ 루즈벨트대학 로고 ⓒroosevelt.edu

또한 아내와 김병석씨 단 둘이 모 교수의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없는 과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제출했다. 한 10장 정도의 리포트였는데, 얼마 후 그 교수가 김병석씨와 아내를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서 연구실로 불렀다. 심각한 것 같아서 좀 긴장하고 있었는데 대뜸 “당신들은 참 스마트하다”고 얘기했다. 병석씨와 아내는 그냥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는데 그 교수는 “잘 새겨들으라”고 했다. “내 제자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들이 세 번째”라고 말이다. 과제로 제출한 그 페이퍼는 다음 해 학회에서 발표했다. 김교수는 얘기한다. “항상 정직하려고 하고 배우려는 자세 때문에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나 싶어요. 힘들지 않은 유학생활 없겠지만 저는 정말로 배움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유학생활에 참 많은 도움이 되다

유학 온 첫 해에 우연히 신문을 통해 이 곳 시카고에도 문화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락을 했더니 따뜻하게 반겨줬고 그 해 가을 추석맞이 양로원 풍물공연을 계기로 한인문화교육센터 소속 풍물패 ‘일과 놀이’에서 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일과놀이는 설날 즈음해서 지신밟기, 여름에 한인거리축제, 다운타운 밀레니엄 공원 공연, 입양아 피크닉 공연 등을 통해 우리의 소리를 전하고 있다. 한인 1.5세와 2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젊은 한인 2세들에게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심어줄까 하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한인 2세 학생들이 한인거리축제에서 공연하게 되는 모습을 그리며, 김교수와 일과놀이팀은 지금도 열심히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하고 한 달에 한 두번씩 공연도 하고 강습도 하고 있다. 
 

▲ 김병석 교수와 풍물패 '일과놀이'
김교수의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유학생활에도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뭐랄까 내 존재를 알린다고나 할까요? 항상 우리문화를 학과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설날에 김교수 부부는 한복 곱게 차려입고 교수 댁에 세배하러 갔다. 교수님은 너무 기뻐하신단다. 파티할 때면 아내가 다양한 김밥과 김치를 준비해 갔고 떡복이, 약밥 같은 것도 만들어 드렸다. 파티가 참 많았었는데 김교수가 전통의상 입고 장구를 연주할 때도 있었고, 일과놀이 단원들이 와서 사물놀이도 선보였던 적도 있다. 대학원생들, 교수들 모두 너무들 좋아했다고.

“우리문화에 대한 제 소견은 이렇습니다. 우리문화가 얼마나 우수한가를 역설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 맛을 못 느끼면,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내가 흥을 찾을 수 없다면 의미가 없잖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향유하고 있는가’ 입니다. 그래서 제가 향유하고 있는 것을 그냥 남들과 공유하면 되는 것이죠.”
 
아내와 김교수, 이렇게 둘이 시작한 미국생활이 지금은 넷으로 불어났다. 2년 4개월 된 딸과 11개월된 아들이 항상 집안을 어지럽히고 있다며 환하게 웃는 김교수.
 
김병석씨는 4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작년 여름에 졸업, 가을학기부터 루즈벨트대 초등교육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보통 졸업 예정자도 교수로 임용하기 때문에 재작년 말에 원서 접수하고 작년 초봄에 면접하고 직장을 잡은 것이다. 지금 그는 미국의 예비 초등교사들에게 과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강의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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