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4) 윤상순 어르신 이야기 ①월평서 나고 자라 팔십 평생 고향 지킨 삶

“들을 것도 없고, 골을 것도 없쪄.”

서귀포시 월평마을에 사시는 윤상순 어르신(1938년생)을 처음 만나뵙기로 한 날, 어르신의 현관문 앞에서 들은 이야기다.

“나는 뭐 특별한 인생을 산 것도 아니고이, 나보다 말 잘하는 사람들도 많은디 무사 나한테 와서? 난 들을 것도 없고 골을 것도 없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는 듯, 아무 표정없는 얼굴의 어르신 뒤로 정갈해도 너무 정갈한 부엌이 보였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우와 어르신, 이거 차롱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차롱을 이렇게 깨끗하게 보관하셨어요? 차롱이 너무 예뻐요.”

하나하나 먼지가 묻지 않게 정성껏 비닐로 싼 후 형태가 일그러지지 않게 잘 걸어둔 차롱이나, 먼지하나 없이 반들반들 광이 나는 어르신 댁의 마룻바닥을 보니 윤상순 어르신이 평소 얼마나 깔끔하고 정갈하신 분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냉장고 옆 할머니의 찬장에는 그릇들이 깨끗하고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싱크대로 시선을 옮겨 가스레인지 위 놓여있는 냄비의 뚜껑을 허락도 없이 열어보았다.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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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냄비에는 자리에 양념을 부어 자작하게 조려낸 자리조림이 담겨 있었다. 자리조림 진짜 맛있겠다고. 당장 밥이라도 꺼내서 먹으면 진짜 좋겠다고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어르신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들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시던 어르신의 입에서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 보따리가 하나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월평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하여 지금까지 쭉 이 마을에 사셨다는 윤상순 어르신은 올해 여든 다섯 살이 되셨다. 한 마을의 80년 넘는 변천사를 몸에 새기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르신이 어린이였을 당시에는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다. 집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친구들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넉넉하다고 해도 여자애들보다는 남자애들에게 학교에 갈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졌다. 어르신 역시 다른 여자아이들과 비슷하게 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 대신 7살 때부터 물허벅을 지고 행기소라고 불리는 용천수에가서 물을 길어오며 집안일과 농사일에 손을 보태며 자라왔다고 한다. 

조금만 내려가면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라 12살 즈음 물통에서 놀듯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물질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10대 시절부터 40대 중반까지 어르신의 삶은 곧 해녀로서의 삶이었다.

“지금에야 태왁도 있고 고무옷도 있지만 우리 때는 지붕에 달린 콕 있잖아. 그 콕 구멍 뚫어서 그거 다 파내. 그걸 다 파내면 다시 구멍을 밀봉해서 그걸로 물질했지.”

고무옷도 없던 시절 천으로 만든 물옷은 얼마나 해녀들의 몸을 보호해줬을까. 그 얇디 얇은물소중이와 박으로 만든 태왁을 가지고 물질을 나가면 물에 젖은 몸이 그대로 옷 밖으로 비추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윤상순 어르신에게는 해녀복은 좀 부끄러운 옷인 것 같았다. 해녀복을 좀 보여달라고 청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며 보자기에 싸여있던 소중이를 꺼내주셨다. 깔끔하고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어르신의 해녀복은 다시한번 어르신이 얼마나 꼼꼼한 성격이신지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자, 여러 번 덧바느질한 흔적과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물소중이가 나왔다. 아쉽게도 절대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하셨다. 아마도 반 나체처럼 보이는 그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드셨나보다. 내가 보기엔 가장 아름답고 경외로운 모습일텐데!

다른 해녀 어르신들처럼, 어르신 역시 21살이 되던 해, 옆마을 언니들과 함께 출가물질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보통 2월에 나가 8월에 들어오는데, 고향으로 돌아오면 밭농사에 여념이 없었다. 밭농사가 대충 마무리 되고 겨울이 오면 다시 출가물질 채비를 시작하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출가물질을 나갔다. 어르신은 경주 양남면으로 첫 출가물질을 갔는데 뭍에서 하는 제주에서의 물질보다 배를 타고 나가서 하는 물질이 훨씬 힘들었다고 했다. 특히 장흥군 옹산면에서의 배로 갔던 물질은 특히 고됐다고 한다. 당시에 같이 출가물질을 갔던 언니들과 한 방에서 같이 살았는데 막내였던 윤상순 어르신은 두 언니들 사이에 끼어 잠을 잤다. 그때, 언니들은 제주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매일밤 울었다고 한다. 윤상순 어르신은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언니들 울음소리에 덩달아 무척 슬퍼졌다고 한다. 곁에서 듣기만해도 그런데, 아이들을 두고 외지에 나와 차가운 바다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야만 했던 언니들은 또 얼마나 집과 가족이 그리웠을까.

이것저것 안해본것없이 돈 벌어 장만하신 이 집에서 석유도 팔고, 쌀도 팔고, 담배도 팔았다고 하셨습니다. 전화기와 흑백테레비가 유일하게 있었다는데… 동네 인기 제일의 사랑방이었을것 같습니다. ⓒ色色
이것저것 안해본것없이 돈 벌어 장만하신 이 집에서 석유도 팔고, 쌀도 팔고, 담배도 팔았다고 하셨습니다. 전화기와 흑백테레비가 유일하게 있었다는데… 동네 인기 제일의 사랑방이었을것 같습니다. ⓒ色色

그 당시의 제주의 해안마을에 살았던 많은 10대들은 그렇게 물질을 경험해 본 것 같았다. 7살이 되면 애기허벅을 지고 식수를 가져오고 들로 산으로 올라가 지들커(땔감)를 해 온다. 지들커는 밥을 할 때 꼭 필요했다. 소낭가지(소나무가지)는 지들커 하기에 적당해 많은 제주 어르신들은 소나무가지를 지들커로 해 왔다. 한 사람이 등에 지고 올 수 있는 양과 무게가 있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는 지들커도 한정됐다. 그런 소낭가지로는 술을 닦을 때 사용하면 좋다고 했다. 그럼 보통 밥을 할 때는 보리낭이나 조짚, 콩고질 즉 밭에서 쉽게 구해올 수 있는 것들로 밥을 하셨다고 한다. 

윤상순 어르신은 고무옷이 보급되기 전까지만 물질을 하시고 그만두셨다. 출가물질이 고되기도 했고 아이들도 태어나서 출가물질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 한 가지는, 28살에 6개월 출가물질을 나가 일해서 번 돈으로 밭을 천 평 산 것이다. 약 16만원을 벌었는데 그 돈으로 정확하게 1050평의 밭을 구입했다. 어렸을 적 그렇게 풍요롭지 못한 삶 탓에 내 집 마련이 꿈이었는데 바다로 뛰어 들고 밭으로 나가며 일을 하고 돈을 번 덕택에 땅을 사고 집도 지을 수 있었다.

집을 짓기로 한 날을 받고 그 날이 다가오면 어르신은 술을 빚기 시작한다. 그 술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마실 술이다. 초가집을 지으려면 온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도와야 한다. 집을 만들기 위해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은 물과 진흙. 마을 여자들은 모두 허벅에 물을 길어와 어르신의 집으로 가져다 준다. 아기허벅, 양철허벅, 옹기허벅 마을의 모든 허벅들이 모두 총출동하여 각자 물허벅 주인 집이 아닌 윤상순 어르신 집으로 모였다. 여자들이 물부조를 하면 남자들은 힘을 모아 진흙과 짚과 자갈을 물이 이겨서 흙질을 하며 초가집을 만들고 그 위에 새를 얹어 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를 완성한다. 집을 짓는 일은 마을 사람들의 육체적인 노동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음식과 술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어야 한다고 한다. 집 짓는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며 흥을 더해주기도 하고 노름도 하면서 왁자지껄 흥겨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윤상순 어르신 댁의 초가집 짓는 날 이야기를 가만히 듣자니, 어쩌면 월평마을 사람들의 축제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은 절대 할 수 없는 작업,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도와야만 한 집이 완성된다.

비록 초가를 짓고 33년째 되는 해에 집을 다시 현대식으로 고치긴 했지만 어르신은 그 집에서 지금 50년 넘게 살고 계신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만든 에너지가 응축된 집에서 살고 계신다는 것, 월평마을 사람 윤상순 어르신, 아니 월평마을에서 살면서 초가집을 짓고 그 초가에서 살았던 어르신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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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시면서 계속 방에서 새로운 것들을 꺼내 보여주셨다.

물질을 그만두시고 담배가게, 쌀가게, 기름(석유)가게를 하셨다는 어르신. 담배 가게는 35년이나 하셨단다. 그때 사용했던 것들은 대부분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다. 내친김에 물허벅을 등에 어떻게 지는지도 직접 알려주셨다. 하나하나 꺼낸 윤상순 어르신 댁의 민구류는 다 한 개씩 정성껏 보자기로 꽁꽁 싸여 있었다. 물건들을 절대 버리는 법이 없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간직해온 어르신 댁은 마치 나의 눈에는 보물창고 같아 보였다.

보물창고 속 보물같은 이야기들과 어르신의 자부심이 가득했던 쉰다리는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진다.

# 김진경

김진경.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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