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지역 4.3순례 동행취재](상)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서대문-마포-인천 형무소 순례

제주4.3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생사도 모른 채 타지 형무소에서 수감된 뒤 행방불명이 된 가족을 기린 4.3행불인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생사도 모른 채 타지 형무소에서 수감된 뒤 행방불명이 된 가족을 기린 4.3행불인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아버지, 나 왔수게. 이번에 무죄 선고 받아시난 이제랑 영면하십서.”

차가운 옛 형무소 터 앞,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거리 한 곳에서 제주4.3 유족들은 행방불명된 피해자들을 기렸다. 

4.3 때문에 생사도 알 수 없이 행방불명돼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내 부모, 내 형제의 영령을 기리던 유족들은 참았던 한을 토해냈다. 

4.3 당시 재판을 받은 사람 중 1948년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은 벌금형이나 구류, 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1949년 군법회의 때 금고나 징역 등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에 형무소가 없어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이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열악한 형무소에서 옥사하거나 6.25 한국전쟁 당시 총살 당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이날 순례는 제주4.3유족회 경인위원회가 주관했다. 

30도를 넘어서는 무더운 날씨에도 유족들은 애달픈 마음을 안고 형무소에 도착할 때마다 제주에서부터 정성스럽게 싸 들고 온 제사음식을 차려냈다. 날은 더웠지만, 유족들 마음은 행방불명된 내 가족을 생각하는 한으로 여전히 시린 기억 그때 그대로였다.

이날 오전 7시 40분부터 제주국제공항에 모인 유족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추도비에 마련된 제주4.3행불인 제사상.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서울 서대문형무소 추도비에 마련된 제주4.3행불인 제사상.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은 마포형무소(현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유족들.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은 마포형무소(현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유족들.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김포국제공항에 내린 유족들은 첫 순례지인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 뒤 추모비 앞에 제사상을 마련했다. 배, 사과, 참외 같은 과일과 함께 고향 제주에서 가져온 감귤과 기정떡을 올리고 향을 피운뒤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리며 묵념했다.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주로 4.3당시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끌려온 여성 수형인들이 수감된 곳이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뒤 수감 한 달 만에 대부분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것.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점령, 복역 중이던 사람들은 출소해 각지로 흩어졌다. 고향 제주로 내려간 사람은 다시 붙잡혀 총살당하기도 했고, 서울에 머물며 인민군 아래 있다 월북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도 많았다.

오창흡 4.3유족회 경인위원회 부위원장이 추도사를 낭독하며 묵념이 진행된 가운데 유족들은 땡볕 아래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행방불명 희생자들을 기렸다.

이어진 순례의 발걸음은 마포형무소가 있었던 자리인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향했다. 경성감옥, 경성형무소로도 불리는 이곳은 일제가 지은 곳으로 4.3이 발생했던 당시에는 마포형무소로 불렸다. 

마포형무소에는 수감 인원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70여 명이 두 차례의 군법회의를 거쳐 수형 생활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서일까 마포형무소를 찾아 전과 같이 제사상을 차린 유족들은 추도사를 읽기 전부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참아왔을지, 감히 헤아려볼 수도 없을 유족의 흐느낌에 모두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제주4.3 군법회의 수형인 중 19세 미만 소년수들이 수감된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술을 올리고 있는 유족들. [인천=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 군법회의 수형인 중 19세 미만 소년수들이 수감된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술을 올리고 있는 유족들. [인천=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서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이날 순례팀이 찾은 형무소에는 4.3행불인 영령을 기리는 리본이 묶였다. 사진 왼쪽부터 서대문형무소, 마포형무소, 인천형무소. [서울.인천=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한 유족은 최근 직권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며 행방불명된 아버지에게 말했다. 영면하셔도 된다는, 당신이 겪었을 억울함을 덜어내도 된다는 위로였다. 묵념이 있고 난 뒤 유족들은 누구랄 것 없이 앞으로 나와 술을 올리고 행방불명된 이들의 해원을 바랐다. 

한 차례 눈물바다를 이룬 유족들은 뒤이어 순례의 마지막 행선지인 옛 인천형무소가 있던 자리, 인천지방법원으로 향했다. 서대문형무소, 마포형무소와 다르게 인천형무소는 이곳이 형무소였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유족들은 “여기는 형무소 옛터 표지석도 없네”라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내 제사상을 차리고 인천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피해자들을 위해 제를 지냈다.

당시 인천형무소에는 대부분 19세 미만 소년수들이 수감된 곳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에 편입되기도 했고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북한으로 끌려가기도 했던 것으로 조사된다. 

4.3 당시 억울하게 붙잡혀간 뒤 머나먼 서울과 인천에서 수형 생활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행방불명된 이들. 먹먹한 마음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유족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한이 서려있었다. 

“생사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소연하는 유족들은 그나마 최근 직권재심을 비롯한 4.3유족회 등 기관의 재심 청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억울함을 덜어내고 있다. 

하지만 2530명의 4.3 군법회의 수형인 가운데 재심을 통해 공소기각이나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은 아직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형무소를 순례하며 4.3 피해자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4.3의 완전한 해결에 관심을 놓치면 안 될 중요한 이유다. / 인천=김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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