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11) 어머니와 같이 산지 21년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 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덥습니다. 소식을 전한 지 오랜 이유를, 더웠다는 구차한 말로 핑계 대고 맙니다. 

지난 편지를 써 놓고  마음 속 응어리진 것이 풀리는 듯 후련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어머니의 얘기를 쓰면서 다시금 힘든 그 시절이 떠올라 힘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꽁꽁 쟁여두며 아픔을 삭이는 것 보다 글로 써 놓고 나니 타자화(他者化)되어 한결 담담해지더군요. 무엇보다 댓글을 읽고 위안받았고, 많은 분이 메일로 힘내라는 글 보내주셨습니다. 다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다들 궁금해하더군요. 그 후 어머니의 삶을... 또 어머니가 9살, 5살, 3살 때 키운 저의 배다른 누나들은 어떻게 어머니를 찾아뵙는지... 이런 궁금증의 말미에는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람들을 쓰셨습니다. 이제 어머니 그 후 이야기를 이 편지로 보냅니다. 

차마 쓰지 못하고 비우는 기억이 또 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서울대 병원에서 돌아오고 난 뒤, 집 뒤 우영팥(텃밭) 나스미깡낭(하귤나무)아래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는 얘기를 지난 편지에 썼습니다. 

그 후 어떻게 그 시절을 겪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득합니다. 언젠가는 어떤 장르의 글로 그 날들을 쓰겠지만,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견뎌냈습니다. 어머니가 견뎌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어머니는 서울대 병원에서 시력이 회복될 수 없다는 진료결과를 받은 후 한 달 쯤 지나, 어머니의 육촌동생이 주지스님으로 있는 절에 갔습니다. 나에게 외삼촌 뻘인 그 주지스님은 결혼을 한 대처승이셨습니다. 어머니를 보러 효례교 하시다리를 건너 어머니 있는 그 절에 가면 스님삼촌이 마당에 있다가 나를 보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앞니에 금으로 테두리로 씌워 웃을 때 그것이 번쩍거리는 모습에 가끔 웃음을 참기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나 나에게나 늘 따뜻하게 대해줬습니다. 내가 태일이 삼춘이라고 불렀던 그 주지스님, 지금도 얼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 그것 말고는 다른 기억은, 마치 암호처럼 몇 마디만 언급하고 비우겠습니다.  
 눈 내리는 날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머니와 걸어 갔던 신도리 어느 집....
 학교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에 집으로 갔을 때 가지런히 놓여 있던 대나무 더미...
 고등학교 매점, 빵돌이... 서귀포 동문시장 선희한복... 내 손으로 어머니의 귀를 막던 밤... 
 이 기억들은 이렇게만 쓰고 비워둡니다. 

각시가 엄마와 같이 살자 했습니다.  

나는 1999년에 결혼했습니다. 각시에게는 결혼 전에, 결혼하게 되면 어머니와 같이 살아야 한다 했습니다. 결혼 다음 해, 아들이 태어났고 또 일 년이 지나 아들 돌잔치를 치렀습니다. 

돌잔치 끝나고 한 달쯤 지난 뒤 각시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 어머니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해놓고 왜 효돈에서 모시고 오지 않는거?”

각시가 참 고마웠습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 모시고 와야 한다고 말했으면서도, 막상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그 말을 차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얘기 나온 그 주 일요일에 효돈 집에가서 어머니 짐 챙기고 바로 모셔왔습니다. 어머니 짐이라야 옷가지 몇 개, 고작 달랑 보따리 하나였습니다. 처음 어머니 방은 햇볕 잘 드는 방이었고, 나중에 아파트로 이사갈 때는 일부러 계단으로 다니시기 편하라고 2층을 골랐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어머니(뒷줄 분홍색 상의)도 함께 갔습니다. 어린이날 제주대학교 운동장입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떠드는 소리에 한참 웃음지며 좋아하셨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어머니(뒷줄 분홍색 상의)도 함께 갔습니다. 어린이날 제주대학교 운동장입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떠드는 소리에 한참 웃음지며 좋아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집으로 와서 참 좋았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하게 어머니를 볼 수 있는 게 좋았고 더 이상 어머니 걱정을 하지 않아 안심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녁에 퇴근하면 어머니가 집에 있는 건, 정말이지 감히 행복이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할머니를 살뜰히 챙기고, 같이 외출할 때면 늘 손을 잡고 “할머니 앞에 계단 있어요, 높은 턱이 있어요.” 하는 식으로 조금이라도 위험하지 않게 하는 일이 습관이 되고, 늘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녹아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차츰 아파트단지의 구조를 파악하고는 혼자서도 하루에 한 번, 주위를 한 바퀴 산책하는 일상이 자리 잡았습니다. 나는 그런 일상이 참 좋았습니다. 

어머니와 같이 산지 이제 21년째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말은 전혀 아니고요. 어머니께서 나와 각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챙겨준 것이지요. 

아빠! 저기서 절 많이 하면 할머니 눈 볼 수 있댄... 

둘째가 세 살 때 우리 가족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당연히 어머니 포함 다섯 명이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찰을 위주로 남도 여행을 갔습니다. 15년 전 그때 어머니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했고 걷기도 잘 걸었습니다. 

무위사, 대흥사, 화엄사, 운주사, 선암사를 갔습니다. 절에 들어서면 절 이름과 지역을 아는 대로 얘기해주면 어머니는 나에게서 들은 말을 계속 되뇌이며 기억하려 애를 썼습니다. 바람소리, 햇볕, 새소리, 풍경소리로 각기 다른 절 마다의 체취를 느끼려는 듯이 오래오래 숨을 들이마셨고, 그때마다 “잘도 좋다...” 하셨습니다. 범종 소리를 듣고 싶다해서 시간에 맞춰 기다려 범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종소리도 절간마다 다 또난게... 화엄사 종소리가 제일 킁게...” (종소리도 절마다 다 다르네. 화엄사 종소리가 제일 크네...”

그 말을 할 땐 어머니의 표정과 눈빛은 참 맑았습니다.  대흥사 경내를 돌 때는 어머니는 혼자 절 난간에 앉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난간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오래도록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생애 첫 여행에서 해남 대흥사를 갔습니다. 다산초당에도 올라갔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때 여행 얘기를 자주 합니다. 소리의 기억을 자주 말합니다. 
어머니의 생애 첫 여행에서 해남 대흥사를 갔습니다. 다산초당에도 올라갔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때 여행 얘기를 자주 합니다. 소리의 기억을 자주 말합니다. 

지금은 무안 법천사 주지로 계신 덕우스님이 그때는 강진 무위사 부주지로 계셨습니다. 무위사 방문했을 때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머니는 스님에게 “고맙수다, 고맙수다” 했습니다. 

그 날 덕우스님이 무위사 대웅전 본존불 뒤에 모셔진 월하관음도 전설을 들려주었습니다. 절 밑 마을에 눈 먼 아비를 모시고 살던 딸이 월하관음도를 보며 정성껏 기도하자 그 아비의 눈이 뜨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내 마음에는 설핏 ‘아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몇 만 번이고 절하겠다’ 짧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미 나의 바람은 전혀 실현되지 않음에 체념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내 생각이 부끄러웠습니다. 

“아빠!. 스님이 저기서 절하면 눈이 보인댄. 할머니도 눈이 보일 수 있어. 절 많이 하고 가게” 

덕우스님께 인사드리고 절을 나서는데, 그때 일곱 살 아들 원재가 내 손을 대웅전쪽으로 잡아 끌었습니다. 얼떨결에 대웅전으로 향하는데 부끄러웠습니다. 아 그래서 우리 식구 대웅전 본존불 뒤 월화관음도를 보며 108배를 했습니다. 아들은 그 날 힘든 내색 참아가며 108배를 다 채웠습니다. 

그 여행도 다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같이 생활해서 함께 올 수 있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 엄마는 그때 인생 처음으로 비로소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엄마와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어머니는 올해 한국 나이로 92, 아흔 둘입니다. 어머니와 살면서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 에서도 어머니도 화를 낸다는 겁니다. 그동안 어머니였기에 참고 또 참았던 것이었겠지요. 일례로 진밥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밥이 조금 설익으면 바로 앞에서 대놓고 큰 소리로 얘기합니다. 

“기자 생쏠인게... 아세 씹토 못허키여”(“그저 생쌀이네. 아예 씹지도 못하겠어.”) 

그럴 때마다 각시와 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큭큭 웃습니다. 뭐 물 넉넉히 놓고 밥을 한 번 더 하면 되는 일이고요. 

어머니는 머릿고기, 육회, 연어회, 양파계란볶음, 고구마, 옥수수를 좋아하고, 두부는 밥 같다고 하면서 절대 안 드십니다. 베지밀, 바나나우유를 좋아하고 초코우유는 안 드십니다. 단 걸 좋아하고 의외로 피자도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이 많은 좋아하는 것도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절대 따로 먹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같이 산 뒤로 매해 마다 일부러 케잌의 촛불을 끕니다. 어머니도 손뼉치며 같이 노래부릅니다. 이 날은 딸이 할머니 생일케이크를 자기가 자른다고 해서 어머니도 많이 웃었습니다. 어머니 웃음이 참 좋습니다. 
어머니와 같이 산 뒤로 매해 마다 일부러 케잌의 촛불을 끕니다. 어머니도 손뼉치며 같이 노래부릅니다. 이 날은 딸이 할머니 생일케이크를 자기가 자른다고 해서 어머니도 많이 웃었습니다. 어머니 웃음이 참 좋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귀도 잘 안 들려서 보청기도 했습니다. 더 잘 들리기 위해서 작년에 한 쪽도 따로 보청기를 맞췄는데 나라에서 공짜로 해줬다는 말에 겨우 그걸 착용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사다드리는 옷은 다 만원 이하라고 해야 입습니다. 

 “아마야.  어떵 이추룩 헐험이라? 요새도 영 헐헌 옷이 이싱게이...” (어머나. 어떻게 이렇게 저렴할 수 있어?. 요새도 이렇게 저렴한 옷이 있구나....“ 

하며 감탄하고 입습니다. 이래저래 나는 거짓말만 늘어갑니다. 

아프면 끙끙 앓다가 겨우겨우 병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제발 조금만 아파도 바로 얘기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어머니와 나는 한참을 싸웁니다. 싸움은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와 같이 살면서 어머니는 처음으로 당신의 생일상을 받았습니다.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하고 소고기를 굽고 케이크 촛불을 끄고, 용돈 드리고.... 이런 일상이 예전에 어머니에게는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말입니다. 

요즘 어머니가 새로 틀니를 해서 치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두 번째 틀니비용도 나라에서 아주 조금만 내면 해 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요즘 어머니가 새로 틀니를 해서 치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두 번째 틀니비용도 나라에서 아주 조금만 내면 해 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어머니와 더 많은 싸움을 해야 하고, 가끔은 짜증을 내는 일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크게 아프지 않고 살아준 어머니가 너무 고맙습니다. 또한 언제나 덤덤하게 곁에서 신경 쓰는 우리 각시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맙습니다. 아들 원재, 지운이도요. 혹여 우리 각시 부담될 까, 고맙다는 말 오히려 못한다 하는, 그러면서도 어머니 새 틀니비용 겸 용돈 드리라고  삼 백만원 바로 보내는 내 착한 동생 인자와 이쁜 조카 소형, 소희. 인천에서 우리 집과 어머니 안부를 걱정하는 인선누나까지... 그래서 어머니와 같이 사는게 힘들지 않았고 지금도 행복입니다. 내 주위에는 온통  좋은 사람들입니다. 

지난 편지보내고 너무 늦게 보냅니다.

슬픈 일의 끝에는 행복하면 좋겠다 하신 분들에게 이제 이 편지로 “잘 살고 있습니다” 라고 소식 전합니다. 이 더운 여름도 곧 지나겠지요. 

다음 편지는 빨리 소식 전하겠습니다. 

2022년 8월 3일 
강충민 올림


# 강충민 시민기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글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사회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좋아하는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라초등학교 인근에서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jejungo.net )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강충민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강충민시민기자 블로그 가기 ⇒ http://blog.naver.com/som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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