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한홍구, 6일 ‘4.3과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 강연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70여년 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갖가지 이유로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제주도민들. 그 억울한 한(恨)을 제대로 토해내지도 못한 채 가슴 한편에 묻어야만 했던 제주4.3.

깊은 생채기에 억울함도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던 제주도민들에게 역대 군사독재정권은 왜곡된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빚어진 이념의 탈과 누명까지 씌워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다. 억울한 죽음마저 죽여버린 국가의 만행에 다름 아니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이번 강연은 ‘아트스페이스·씨’에서 전시 중인 ‘이진경 展, 먼 먼 산 : 눈은 나리고’ 연계 프로그램으로 기획됐다. 

한홍구 교수는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었는가 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그 죽음에 대해 왜 내놓고 울지 못했는가다”라며 “죽음마저 죽여버린 참혹한 한국 현대사다. 조작간첩사건은 어떻게 또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려 역사를 지워버리려 했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2006년 천주교인권위원회가 파악한 재일교포 관련 조작 간첩 사건 총 109건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34%, 37건이 제주 출신으로 집계됐다. 대한민국 인구 중 1.5%에 불과함에도 3명 중 1명은 제주인이었던 것. 

4.3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은 수많은 도민을 간첩으로 내몰았다. 4.3을 공산폭동이라 낙인찍고 피해자들을 사지로 내몬 까닭에 살아남은 그 누구도 억울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조작 간첩 사건에 연루된 무고한 도민들은 국정원과 기무사, 경찰청 대공분실의 조작과 날조로 한순간에 ‘빨갱이’가 됐고 불법 구금돼 고문을 당하거나 수형 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이후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으로 건너간 도민들은 일본 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 친척이나 지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공안기관에 불법 구금되거나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조작 간첩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고문 후유증은 물론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까지 새겨져 고향을 떠나 살아야만 했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한 사례로 1980년대 간첩으로 낙인찍힌 강희철 씨는 구체적 물증이 없었으나 일본 조총련계 학교를 졸업했고, 큰아버지가 4.3당시 일본으로 밀항한 조총련계 인사였다는 이유로 13년간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큰아버지로부터 받은 만년필과 양복은 북한에서 교육을 마치고 받은 하사품으로 조작됐다.

이와 관련 강 씨는 2008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을 불법 연행할 당시 피고인이 조총련 계열 학교를 졸업했고, 친척 중에 조총련에서 활동한 사람이 있다는 것 이외에 피고인의 간첩 혐의를 의심할 만한 정보나 확보된 증거가 없었다”고 밝혔다. 

또 경찰관들이 자백을 강요하며 폭행, 협박, 고문 등 가혹 행위를 함에 따라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됐다는 강 씨 주장도 인정, “이 사건 공소사실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한 교수는 “제주도의 삼다도를 내 나름대로 다시 구성해봤다. 그 요소는 ‘재일동포’, ‘아픔’, ‘조작간첩’이다. 사람 수에 비해 제주는 재일동포와 조작간첩이 많다. 그 속에 서린 아픔은 이루 말할 데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재일동포 54만여 명 가운데 제주 출신이 8만여 명으로 전체의 약 16%에 달한다. 그만큼 도민들은 일제강점기와 4.3을 겪으며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다”며 “그런데 독재정권은 제주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갔다”고 강조했다. 

또 “4.3을 공산폭동으로 낙인찍었으니 제주인들을 간첩으로 몰아가긴 쉬웠다. 당시 대한민국 인구의 1.5%에 불과했던 제주에서 조작간첩이 34%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설명한 뒤 주요 사건들을 소개했다. 

그중 1977년 제주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간첩단’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 시절 언론에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가짜 재일교포 사업가가 검거됐다는 보도가 대서특필됐다.

당시 검거된 11명에는 故강우규, 故강용규 형제와 故김추백 씨 등 9명이 포함됐다. 제주교대 1, 2대 학장을 역임한 故김문규 씨와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이오생 씨도 연루됐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오후 2시 30분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씨’에서 ‘4.3과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16살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자수성가한 故강우규 씨는 1977년 귀국한 뒤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사업가로 간첩 누명을 썼다. 그는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하게 됐으며, 함께 연루된 사람들도 거짓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법원은 강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다행히 집행되지는 않았고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2010년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를 받아들고 재심을 청구, 2014년 무죄를 선고받고 검찰 항소에 따라 대법원까지 이어지는 재판 끝에 2016년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고문과 가혹행위 등을 당하는 과정에서 한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다”며 “강씨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거나 북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당시 조작 간첩 사건으로 승승장구한 법관들이 많다. 간첩 사건을 잘 처리했다는 이유로 요직에 발령받거나 인사 고과표 점수를 잘 받았다”며 “이 같은 과거에 대한 청산 없이 민주화가 되니 이런 사람들이 덕을 많이 봤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4.3의 가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피의 광풍이 몰아친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왔다”며 “가해자 측에서 민감하게 볼 수 있지만 제대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