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태의 사이드뷰] <수프와 이데올로기>

현기영 선생. ⓒ제주의소리
소설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선생. ⓒ제주의소리

"4·3이 발생한 지 30년 만에 이 책을 썼으나 읽으면 감옥에 잡혀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제주에서 시작해 경기를 지나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광화문에서 4·3의 절규와 외침을 알리게 됐습니다. 4·3 문제에 대해 미국의 책임이 자유롭지 않은 만큼, 미국 뉴욕에서까지 오페라 <순이삼촌>이 공연되고 4.3을 알렸으면 합니다."

소설가 현기영이 지난 10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오페라 <순이삼촌> 제작발표회에서 한 당부다(관련 기사 : 4·3항쟁의 진실, 광화문을 거쳐 미국까지). 4.3의 진실을 알린 중편 <순이삼촌>을 1978년 발표하고 실제 박정희 군부에 의해 고문까지 당했던 현기영 작가.

팔순을 넘긴 이 노작가야말로 자신의 소설이 40여 년이 흘러 오페라란 타 예술 장르로 되살아나고, 또 4.3의 아픔이 오는 3일과 4일 양일간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울려퍼지는 장관을 뜻깊게 지켜볼 장본인이리라.

그간 연극 <순이삼촌>이 수차례 상연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던 현기영 작가를 개인적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다. 현 작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제는 제주 4.3이 훨씬 더 대중적인 영화라는 장르로, 상업영화의 형태로 더 많이 자주 제작되고, 그런 작품들을 수많은 국민들이 접하면서 4.3을 알리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젊은 세대에게 4.3을 알리기 위해선 영상과 재미가 필수"라는 진심어린 조언과 함께 말이다.

미국 이전에 현재 일본에서 제주 4.3을 알리는 '입문서' 역할을 몇 달간 자임하고 있는 작품이 존재해 눈길을 끈다. 바로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다. (관련 기사 : "4.3 완전한 해결 의지?" 윤석열 당선자가 꼭 봐야 할 이 영화들)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대상인 흰기러기상을 수상하고, 이후 서울독립영화제와 무주산골영화제, '4.3과 친구들 영화제' 등에서 미리 선보였던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 6월 11일 개봉, 일본 전역 상영에 돌입한 이후 예술영화 극장을 중심으로 장기 상영 중이다. 우선 일본 내 반응을 보자.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불러온 한일의 공감대

▲ &lt;수프와 이데올로기&gt; 관련 아사히 신문 디지털 기사. ⓒ 인터넷 갈무리<br>
▲ <수프와 이데올로기> 관련 아사히 신문 디지털 기사. ⓒ 인터넷 갈무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처음 보기 전까지, 한국·조선·일본의 현대사인 제주 4.3 사건은 전혀 몰랐다. 재일 코리안들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국적이 다르다. 픽션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공기감(환기)'이 가슴을 조인다.' (@uriuriyk)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남북 분단을 배경으로 한국 군사 정권에 의한 인민 학살 제주 4.3 사건. 한강 선생님의 최신장편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사건을 다룬 것이라고 한다. (일본어)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읽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kazoo_makino)

'<수프와 이데올로기> 상영 후 양영희 감독의 뜨거운 토크도 듣고,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너무 처참한 사건(제노사이드)이 경악스러웠다. 내 무지가 부끄러워졌다.' (@watabe06170)


개봉 이후 8월까지 일본 트위터 사용자들이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관람한 뒤 남긴 감상평들이다. 일본인들의 반응 역시 "제주 4.3을 몰라서 부끄럽고 미안하다"와 같이 4.3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나 콘텐츠를 접한 한국인들과 엇비슷하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인들도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고. 

트위터 상에서 일본어로 '済州4.3事件'을 검색하면 대다수 글들이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관람객들이 남긴 감상평들이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당시 제주 인구 30만 중 10분의 1이 넘는 최대 3만여 명이 희생당한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이자 제노사이드(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일본인들 역시 "몰랐다"거나 "놀랍다"는 반응들이 주를 이룬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와 같은 작품들이 대중적으로 공개되면서 제주 4.3 당시 제주민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오사카 등으로 피해야 했던 바로 그 일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언론들도 일본에서 활약하는 재일조선인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수 언론 보도 중 지난 7월말 <아사히 신문>은 '"원폭의 체험자처럼 어머니도" 만년에 말한 학살의 기억, 영화에'란 기사에서 "국가의 분단이나 역사와 마주하는 재일 코리안의 가족을 그린 영화"라며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앞서 <아사히 신문>은 영화에 등장하는 양 감독의 남편이자 언론인인 아라이 카오루씨의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또 최근 일본 영화 전문 매체인 <씨네모어>는 전문가 칼럼을 통해 제주 4.3을 이렇게 소개했다.

"오사카 한 가족의 비극은 역사의 비극과 연결돼 있다(...). (영화는) '제주도 4·3 사건'의 기억을 파헤쳐 나간다. 4.3은 1948년~1949년에 걸쳐 이승만 정권 하 군과 경찰에 의해 적어도 1만 4천 명의 도민이 학살되었다고 하는 한국사의 어두운 면이다. 양 감독의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이었다. 4·3 사건의 학살을 목격하고, 와중에서 배로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재일조선인 2세 감독이 제주 출신 어머니와 4.3을 이야기하기까지

▲ 영화 &lt;수프와 이데올로기&gt;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br>
▲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양영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다. 다큐멘터리 <디어평양>(2006)으로 데뷔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아버지는 조총련계 간부였다. 그 제주도 출신 재일조선인 아버지(와 어머니)와 양 감독 가족의 아픈 역사는 일본 내 조총련 사회와 오빠들을 북으로 보내야 했던 북송사업 등과 결부되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담담히 관찰한다.

이어 양 감독은 본인의 평양 방문기와 북송 사업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오빠들, 조카 선화를 주인공으로 삼은 <굿바이 평양>에 이어 일본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극 영화 <가족의 나라>(2012)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가족 다큐 3부작'의 완결작이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인 동시에 제주 4.3의 물리적 공간을 일본으로까지 확장시키며 일본 관객들에게조차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환기시키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양영희 감독은 지난 6월 초 광주독립영화관(GIFT) '4.3과 친구들 영화제 in 광주' 상영 당시 화상을 통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바 있다. 양 감독이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작품 세계를 털어 놓은 알찬 시간이었다. 당시 양 감독은 "어머니의 인생을 다루자면 꼭 4.3을 다뤄야 했습니다"라고 강조하며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2009년에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난생 처음 혼자 사시게 되니까, 이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신 거죠. 그래서 옛날 회상을 많이 하시게 된 거 같아요. 제가 그 전부터 몇 번이나 제주도에 대해서 물어 봤고, 한국이 이제 민주화가 됐다고 말씀드려도 별 말씀이 없으셨거든요. 조총련 사람들은 한국의 실정에 대해 늦기도 하고요.

'대통령도 4.3에 대해서 사과를 했어요', '이제는 말해도 돼요'라고 몇번이나 말씀을 드리니까 조금씩 얘기를 시작하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결혼하기 전에 사실 약혼자가 있었다는 얘기도 하시고요(웃음). 그렇게 조금씩 얘기하시다가 겁이 나서 그만 두시고. '이제 묻지마'라고 하시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셨죠. 근데 기억이 나기 시작하니까 나한테 말하고 싶어지신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찍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죠."

양 감독의 이야기를 좀 더 전하자면, 양 감독이 4.3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1997~1998년 미국 뉴욕에서 영화 유학을 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바텐더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던 시기 만났던 영어 선생님의 남편이 유태인 역사학자였고, 그 백인 교수는 양 감독의 아버지가 제주 출신이란 얘기를 꺼내자 대번에 '제주는 학살이 있었던 섬'이라고 말해줬단다.

당시 4.3의 존재조차 몰랐던 양 감독은 이 외국인이 광주하고 헷갈렸구나 싶어 "노, 노 1980년대 광주 얘기죠?"라고 되물었고, '아니다. 1947년인가, 1948년인가 심한 학살이 있었다. 한번 찾아 봐라'는 답이 돌아왔단다. 조선학교를 다녔어도 4.3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양 감독은 그 길로 책도 사고 4.3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디어평양> 촬영 당시에도 4.3은 피해갈 수 없는 이슈였다. 1942년 15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던 아버지는 4.3을 체험하지 않았다. 먼 친척이나 소꿉친구들 중 희생자가 나왔지만 아버지도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관심이 크게 없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조금 달랐다. 그때까지 양 감독은 어머니가 4.3의 피해자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나서 오사카에서 자랐으니까 4.3도 잘 모르겠죠"고 묻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된 어머니의 당시 답변은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었다.

"그랬더니 '어, 몰라'라고 하셨어요. 제주도도 한 번도 안 갔다고 하시다가 조금만 갔다고 하고. 며칠 있다가 조금 제주도에 있어서, 라고 답하시고. 제주도라는 말이 나오면 어머니 말이 조금씩 틀려서 '뭐야,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 싶었죠. <디어평양> 때도 오사카 이카이노 동네에 4.3 희생자들이 많아서 내레이션이라도 한 마디 들어갈까 생각을 했지만 (주제에 집중하면서) 포기를 했죠. 그때부터 4.3 관련해서 책을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양 감독의 역할과 '포스트 <파친코>'를 기대하며

▲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양영희 감독(가운데)과 남편 아라이 카오루씨.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파친코> 같은 작품들도 많이 나와서, 작품의 바탕이 되는 사회적인 인식들이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식되면 기쁠 것 같고요. 일본 내 한국 영화팬들 사이에서 5.18 광주는 다 알려졌어요.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몰라?'라고 할 정도죠. <택시운전사>도 그렇고요. 4.3에 대해서는 지금 좋은 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일본 기자들도 열심히 검색해 보고요. 처음 들었다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지금의 광주처럼 '아니, 4.3을 아직도 몰라'란 상황으로 가는 입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 영화도요.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그 입문서의 제1페이지쯤 될까. 더 많은 작품들이 나오고 저 자신도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야 하고요. 사회운동가로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예순살 가까이 되어 가니까 '그런 역할이구나, 어느새 내가' 뭐 그런. 조금은 그런 역할을 담당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난 6월 양영희 감독)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관람한 일본 관객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택시운전사> 등을 통해 본 5.18 광주는 알았지만 제주 4.3은 처음 접해 본다'는 감상평이 적지 않았다. 이 역시 '5.18은 알아도 4.3은 몰랐다'는 적지 않은 한국 관객들의 반응과도 일치한다.

한편으로 언론인들을 포함해 제주 4.3에 궁금증을 갖는 일본인들이 늘었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기운일 것이다. 그 길에 양 감독이 일본인들을 위한 '4.3의 입문서 제1페이지'를 써내려간 <수프와 이데올로>가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지난 25일 개막한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에 '지금 여기 풍경' 섹션에 초청, 28일 상영에서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이후 이어진 호평과 매진 행렬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SIWFF 상영은 29일 1회 더 남아 있다. 아울러 <수프와 이데올로기> 배급사 엣나인필름은 오는 10월 극장 개봉을 확정하고 개봉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즌2가 확정된 <파친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한수는 제주 출신이다. 양영희 감독도 읽었다는 이민진 작가의 원작 속엔 없는 설정이던 7화 속 극동대지진에서 살아남았던 한수의 이야기도 시즌2에서 계속될 전망이다. 사려 깊은 제작진이 오사카를 비롯해 일본 내 재일한국인의 다수를 이루는 제주도민과 제주 4.3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룰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제주 4.3이 한국을 넘어 미국 뉴욕에까지 다다르길 바란다는 현기영 작가의 바람은 우선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일본 내에서 이뤄지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 K-컬쳐가 각광받는 OTT의 시대다. 향후 차기작인 극영화에서도 재일조선인과 북송 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양 감독과 같은 세계적인 감독들이, 또 '포스트 <파친코>'와 같은 작품들이 향후 4.3을 다루지 말라는 법도 없다. <순이삼촌>의 현기영 작가가 오랜 바람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제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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