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1) 신양리 김임생 어르신 이야기 2

출가 물질을 가서 동무들과 부르셨다던 이어도사나는 구슬프고 힒든 노래가 아닌 활력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한 노래였습니다.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출가 물질을 가서 동무들과 부르셨다던 이어도사나는 구슬프고 힒든 노래가 아닌 활력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한 노래였습니다.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세 남매를 낳고 바다일과 밭일을 병행하며 살아오신 김임생 어르신(1942년생)은 제주의 바다와 땅이 곧 어르신의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물질 행 온 돈에 빚 보태그네 밭 사고, 땅 중에 좀 너른 좋은 땅이 있어 그 땅에 당근하멍 그 빚 물며 두 해에 하나씩 밭을 샀던 것 닮아. 육지 물질은 24살에 아들 낳은 후에는 안했는데 중학교 다닐 땐 조개파러는 갔었어. 한창 밭 살 때 기억나는 건 육지에 가서 조개팔앙 돈 번거. 육지에 가민 뻘이 이시난 올라강 조개 캤주게. 그 때 조개 하나에 30원 이어신가. 그 물때에 맞춰 올라강 몇 천개씩 잡다보면 일주일에 40만원 벌었지. 일주일 하면 제주 왔다가 다시 물 때 되면 육지 올라가는거라. 그렇게 한 8번 정도 하면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넘어가. 그때 우리 경숙이가 고등학교 다니멍 오빠 밥이영 도시락이영 해줘서. 우리 아들 새벽에 일어나서 동남까지 걸어 강 세화고에 버스타멍 다닐때. 우리땐 다 그렇게 살안.”

어르시이 소녀였을 때 살림과 동생들 밥을 하며 컸던 것처럼 딸인 경숙이도 엄마를 따라 오빠의 밥을 해 줬다고 한다. 이렇게 착하게 자라 준 아이들 때문이라도 어르신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지역과 시간에 상관없이 움직였다.

김임생 어르신의 물질도구. / 김진경. ⓒ제주의소리
김임생 어르신의 물질도구. / 김진경. ⓒ제주의소리

돈이 되는 곳이라면 제주가 아니어도 선뜻 갈 수 있었던 젊은 시절, 어르신이 그렇게 일 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우리 아이들만큼은 없이 살게 하기 싫었다.

아이들이 차례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기에는 신양리는 거리가 멀었다. 자취 경험이 없었던 아이들만 제주시로 보내기에도 마음이 불편했고 그렇다고 어르신이 일을 그만두고 제주시로 들어가 아이들을 돌볼 형편도 되지 않았다. 이 때 친정어머니가 선뜻 제주시로 들어가 살림을 맡기로 해 주셨다. 김임생 어르신에게는 한 줄기 빛 같은 말이었다. 친정엄마는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며 밤낮으로 일하는 것도 안쓰러운 딸이 시내로 유학가는 아이들을 돌볼 근심까지 하고 있을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나는 손자들보다는 딸을 위해서 제주시로 들어간 친정엄마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아이들이 제주시에서 살아야 하니까 밭 하나 팔아서 도남에 집을 하나 샀어. 경숙이, 큰아들, 작은아들 이렇게 7년동안 우리 어머니가 밥해 주면서 나 대신 키워준거라. 경숙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24살에 시집가기 전까지 친정어머니가 우리 애들 키운거지 뭐.그때 우리 엄마가 한 말이 아직도 잊지 못해. 나 공부도 못 시켜주고 부모 도리를 못했다고 많이 미안하다고 하셨어.”

본인은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소위 없는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못 갔던 여성이었지만 남동생들이 부모님께 받은 사랑 못지 않게 친정어머니가 준 사랑만큼은 너무나 컸다고 하셨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친정어머니의 내리사랑의 크기는 감히 어르신이 잴 수 없을 정도였다고.

친정어머니는 81세, 딱 올해 어르신 나이에 돌아가셨다. 김임생 어르신은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남편과 내 아이들한테만 신경 써 왔던 자신이 보였다고 한다. 평소 친정어머니를 더 살뜰히 챙겨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죄송함, 그리고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결혼하고 애키우고 살다보니, 일하고 남편 아픈것만 신경쓰며 살다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어. 그렇게 어머니 돌아가시고 3년 내내 어머니께 죄송하고 보고싶어서 울었던 거 닮아. 어머니는 늘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지만 난 정말 한번도 엄마 원망을 하지 않았어.”

김임생 어르신의 물질도구. / 김진경. ⓒ제주의소리
김임생 어르신의 물질도구. / 김진경. ⓒ제주의소리

친정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에 김임생어르신의 부지런함으로 집안 형편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공부도 넉넉하게 시켜야 하고 집이라도 한 채 씩 장만해주며 시집장가 보낼 생각에 몸은 잠시도 쉴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지인의 추천으로 양식장의 소장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한달에 40만원을 받으며 일을 시작하며 양식장 일을 배웠다. 성실한 인품 덕분에 이후 양식장 매매권을 남편이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임생어르신이 일궈 온 밭과 집을 담보로 어르신이 52세 되던 해에 남편의 이름으로 양식장 사업을 시작했다. 양어장 시작 후 늘어나는 직원들의 밥을 어르신이 차려줘야 했고 매일같이 직원밥을 하게 되면서 바다일은 소라할 때만 간간히 나가고 본격적으로 양어장 사업을 거들어야 했다. 남편의 사업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당근밭도 54세까지만 하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다행히 남편의 양어장 사업은 잘 풀려갔다.

남편은 중매로 결혼할 당시 크게 잘나지도, 넉넉한 형편의 집은 아니었지만 늘 검소했고 어르신이 벌어온 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러다 50대가 들어서 성실함과 검소함으로 양식장 사업을 잘 일궈낼 수 있었다. 그런 남편을 존중했던 어르신은 남편의 사업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물질을 그만두고 17년동안이나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 와중에 큰 아들은 어머니가 지금껏 고생하며 뒷바라지 한 걸 져버릴 수 없다고 이를 악물고 독학으로 공부하여 검찰청에 7급으로 합격했다. 부모 도움 없이, 사교육 없이 그렇게 착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늘 고마웠다. 양식장 사업이 안정화되고 나이가 들어 아이들에게 경영을 넘기게 되었고 김임생어르신은 69세에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경제적으로 넉넉해진 형편에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는데 큰 아들은 이제 그만 고생하라고 극구 말렸다고 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바다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돈이 막 귀행 바다에 들어감서? 이제껏 내가 배운게 그것이라 가는 거. 큰아들은 지금도 못하게 말리지만 67년 할 줄 아는 건 물질밖에 어신거라. 마흔살 한창일 땐 막 잘해나신디 양어장 17년 살고 다시 바당 와 보난 이제 그 아이들(현직해녀)을 못 따라가커라. 요즘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 고망(구멍)엔 여물이 없어. 큰 돌을 들어 그 바닥에 물건이 좀 있어. 난 이제 무거워서 큰 돌은 못들고 작은 돌 정도만 들어. 그 정도면 소라는 잡지. 깊은데까지 숨비니까 소라는 잡아지는데 성게는 돌을 들어야 보이는 거라. 큰 돌 아래 있는 것이 큰 성게라. 겅행 난 성게는 잘 못해. 옛날 옷 말고 고무옷입기 시작할 때 빨간 성게라고 있어. 그땐 고멍에 있는 빨간성게로 많이 했어. 지금은 성게가 다 줄어서 (없어).”

/ 김진경. ⓒ제주의소리
 신양리 해녀들의 해녀복과 물질도구 / 김진경. ⓒ제주의소리

그나마 작업하기 쉬웠던 소라도 올해는 새끼 보기 힘들 정도로 신양리에서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예전엔 바다에 물건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소라와 성게, 보말 정도를 잡으며 돈벌이를 하고 있단다. 지금 해녀들은 예전 해녀들만큼 물질로 재미를 보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성게는 음력 6월에 끝나 다음해 음력 3월 말에 해야하난, 새해 되서 음력으로 3월 말 되면 그때야 성게를 할 수 있고 지금은 소라만 해. 어제도 20키로 하고 그저께는 16키로 했지. 지금은 소라밖에 잡을 게 없어. 보말도 옛날엔 분유 빈 깡통 들고가서 바닷가 입구에 낭가지(나뭇가지) 주워 왕 애덜끼리 보말 삶앙 먹어난건디.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들이 많이. 우리 아이들도 엄마 일할 때 바닷가 가서 겅 살아서. 얼굴도 막 희고 고왔던 애들이 뭐 다 시커매졌지.”

어르신이 어렸을 때 돈이 되었던 전복이 점점 없어지기 시작하고 소라가 돈이 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언제부터 돈이 됐냐 물어보니 한 사십년 정도 된 것 같다 하셨다. 사실 나에게 사십년 전이라 함은 내 인생이 시작된 지점이라 매우 오래된 시간이지만 어르신에게는 인생의 반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어르신과 나의 40년이라는 세월의 체감온도는 너무 달랐다. 암튼 자연산 전복이 점점 보기 어려워지고 소라와 성게가 돈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식당에서 보말칼국수가 인기를 얻으면서 보말도 나름 값을 받는 물건이 되었다. 60년대까지 한창 인기가 많았던 제주의 미역은 어느 순간 육지의 미역에 밀리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81년 살아온 인생 이야기는 곧 80년 된 제주의 농업과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의 변천사이기도 했다. 

/ 김진경. ⓒ제주의소리
해녀들과 함께 나간 육지 워크숍 / 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은 우도가 보이는 푸른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신양리 불턱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 불턱은 등록된 사십여명의 신양리 해녀 중 11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이 불턱을 사용하는 해녀들끼리는 전화로 연락하며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된다. 아침 7시반 즈음 되면 불턱으로 삼삼오오 모여들면서 서로의 안부와 인사를 나눈다. 집에서 싸 온 음식을 함께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놀다가 작업할 시간이 되면 바다에 들어가 물건을 해 온다. 작업이 끝나면 따뜻한 물에 씻을 수도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어 음식도 따뜻하게 해서 먹을 수 있는 이 신식 불턱은 옛날 돌로 쌓은 불턱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 하셨다.

/ 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의 불턱 / 김진경. ⓒ제주의소리

김임생 어르신은 올해 3월부터 또 다른 직장이 하나 생겼다. 인근 대형수족관 메인 수조에서 제주해녀물질시연을 하는 해녀로 발탁이 된 것. 9일에 한 번씩 나가는 일터이지만 가면 해녀를 위한 따뜻하고 아늑한 대기실도 있고 젊은 직원들과 이야기도 하니 재밌단다. 그 수족관 수심은 9미터 정도 되기 때문에 아무 해녀나 할 수 없다고 한다. 깊은 바다에도 잘 견디는 해녀만 할 수 있어서 고성리와 신양리 해녀가 합쳐서 60명인데 그 중 몇 명만 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폐경 전 해녀들은 수족관 상어들 때문에 아예 물질시연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하루 나가면 시연을 3~4번 하는 데 수족관 앞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셨다. 바다 속에 들어가 보는 바다와 수족관으로 사람들과 이어진 공간에서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라며 어린아이들이 손인사를 해 주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면 힘이 난다고 하셨다. 특히 그 대형수족관에서 흘러나오는 해녀노래는 우리 불턱에서 녹음해 간거라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한곡조 구성지게 불러 주셨다.

“뱅뱅 돌아진 돌아진 섬에 일년 열두덜 물질허영 한푼돈도 돈이로구나. 두푼돈도 돈이로구나. 영이나 허영 모여논 금전 정든님 약값에 다 들어간다. 한푼두푼 모여논 금전 정든 님 술값에 다 들어간다.”

물질의 고됨을 노래를 부르며 해소시켰을 이들에게 물질은 무엇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바다에 들어가야 하는 곳이 되었을까? 나는 어르신께 언제까지 물질을 할 것인지 여쭤보았다.

“나? 앞으로 3년은 하려고. 만 80되니까 한달에 20만원씩 나와. 돈이 나와서 좋은 것보다 내가 이번달도 물질을 할 수 있다는 인정 같아. 몸만 건강하면 85살 까지만 하젠. 우리 신양리에 84살 된 동료가 4명이나 이서. 아직도 둘은 너무 잘하고 90 나도록 할 것 같고. 나도 물 위에서는 허리랑 무릎 막 아파도 바다 속에서는 하나도 안아파. 그리고 아직도 소라 27키로까지는 다 짊어 진다게. 그러면서 아직도 우리 해 먹을 고추영 깨영 직접 해 먹어. 이번에도 고추 50근 해서”

나이가 들어 죽기 진전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전문직을 가진 여성들이 우리 주위에, 우리 이웃에 함께 살고 계시다. 어렸을 때는 가정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녀를 시작하셨지만 어르신이 살아온 인생은 어르신 집안의 역사이자 제주해녀의 역사의 한 축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편한 세상 살아보니까 일찍 돌아가신 분들,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랑 어른들이 너무 불쌍해. 고생만 그렇게 하고 돌아가셔서.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살았으니까 좋은 세상을 보잖아. 우리 아버지가 경숙이 태어나고 3살때 돌아가셨는데 그 해 음력 5월에 전기 시설만 하는 거 보고 마흔다섯에 돌아가셨어. 9월에 전기가 마을로 들어왔지. 우리 아버진 전기들어오는 건 못 봤어. 옛날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좋은 세상 하나도 못누리고 우리만 누려서 그게 미안해.” 

김임생 어르신의 소라젓<strong>&nbsp;</strong>/ 김진경. ⓒ제주의소리
김임생 어르신의 소라젓 / 김진경. ⓒ제주의소리

인터뷰를 하러 찾아온 우리를 위해 전날 잡아오신 소라로 소라젓을 맛있게 만들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어르신 댁에서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털어놓고 나머지는 제주시 들어오는 길에 친정엄마께 드렸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도 해녀셨다. 김임생어르신의 소라젓 맛은 외할머니의 소라젓 맛과 같았다. 친정엄마도 어르신이 해 준 이 음식을 먹으면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날 것 같았다.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되었지만 우리 엄마도 가끔 외할머니가 보고싶고 그립지 않을까? 어르신의 소라젓은 이렇게 나와 우리 엄마에게 그리움과 위안을 주는 음식이 되었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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